송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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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송평인 논설위원입니다.

pisong@donga.com

취재분야

2024-03-27~2024-04-26
칼럼97%
문학/출판3%
  • [횡설수설/송평인]세베로도네츠크 함락

    러시아 서부에는 돈강이 흐른다. 돈(Don)은 슬라브어로 강이란 뜻이다. 돈의 작은 말이 도네츠(Donets)다. 우크라이나 동부에는 도네츠강이 흐른다. 도네츠강은 돈강에 합류해 아조프해로 흘러 들어가고 아조프해는 다시 흑해로 흘러 들어간다. ▷도네츠강이 우크라이나 루한스크 지방을 관통하는 한 지점에 동쪽으로 세베로도네츠크, 서쪽으로 리시찬스크라는 도시가 마주 보고 있다. 세베로도네츠크가 25일 러시아군에 함락됐다. 우크라이나군은 강 서쪽으로 철수하고 있지만 리시찬스크가 넘어가는 것도 시간문제다. 외신은 세베로도네츠크의 함락으로 루한스크 전역이 러시아에 넘어갔다고 본다. ▷루한스크와 도네츠크 지방을 합쳐 도네츠 유역이란 뜻의 돈바스(Donbas)라고 부른다. 돈바스는 2014년 러시아계 주민이 부대 기장을 가린 러시아군의 도움으로 반란을 일으킨 이후 양측에서 그동안 약 1만 명이 사망한 내전 상태에 있었다. 러시아는 올 2월 24일 돈바스의 러시아계 주민을 우크라이나군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빌미로 이번에는 ‘Z’라는 기장을 달고 노골적인 침공을 감행했다. 러시아는 지난달 크림반도로 가는 도네츠크 지방 남단 도시이자 아조프해 항구 도시인 마리우폴을 함락시킨 데 이어 이번에 루한스크 지방의 거점 도시 세베로도네츠크를 함락시킴으로써 돈바스 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다. ▷러시아는 처음에는 수도 키이우를 포함해 우크라이나 전역의 주요 도시를 상대로 전면전을 강행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3월 22일부터는 키이우 외곽 등으로부터 군대를 철수해 돈바스에 집중했다. 부차 등에서는 러시아가 철수한 이후 민간인 학살 만행이 드러나 충격을 줬다. 러시아는 키이우 등에 대한 공격은 돈바스 전투에 앞서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지원 군사력을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런 것인지, 당초 목표에서 후퇴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돈바스 점령이 침공의 목적이었다면 러시아는 목적 달성에 근접한 셈이다. ▷러시아가 돈바스에서 침공을 멈춘다면 우크라이나는 종전 없이 사실상 휴전의 길로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 미국 등 서방국은 러시아에 대해 강력한 경제적 외교적 제재를 가하면서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지원만은 신중히 해 러시아와의 협상 여지를 열어뒀다. 러시아가 돈바스 경계를 넘어오면 가만있지 않겠지만 돈바스 점령까지는 일단 두고 본다는 양면 신호를 보낸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처지가 옛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침략으로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한반도 북쪽을 내주고 휴전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처지와 비슷해 안타깝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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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말로만 물가 안정인 윤석열 정부

    한국은행이 물가상승 목표치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남 일 얘기하듯 물가상승 전망치만 내놓으면서 2.0%(지난해 11월)→3.1%(2월)→4.5%(5월)로 계속 올리고 있을 뿐이다. 실은 이게 수정된 목표치다. 중앙은행의 통상적인 물가상승 목표치는 2%대 이하다. 통상적인 목표치는 포기했다는 뜻이다. 한은은 지난해 8월, 11월, 올 1월, 4월, 5월에 각각 0.25%씩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4월까지는 한은이 착실히 금리를 인상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지난달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0.5%를 올리는 빅스텝을 밟은 데 이어 이번 주에 또 한 번의 빅스텝은 일단 확실하고 0.75%를 올리는 자이언트스텝도 가능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한은의 다음 금리 결정은 7월에나 나온다. 5월 0.25%의 베이비스텝 결정은 물가 상황을 안이하게 본 것이다. 정부는 물가 안정과 경제 활성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한가한 얘기를 할 때가 아니다. 성장이고 일자리고 일단 다 제쳐두고 물가를 잡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비상한 상황이다. 비상한 상황에 맞는 비상한 인식이 윤석열 대통령에게도, 한덕수 국무총리에게도, 추경호 경제부총리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윤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50조 원 규모의 자영업자 지원을 약속했을 때 그 돈은 추경이 아니라 세출 조정을 통해 조달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 추경을 통해 조달함으로써 돈을 흡수해야 할 시점에 돈을 푸는 역주행을 했다. 정부가 물가안정을 위해 취한 조치 중 눈에 띄는 건 유류세 인하밖에 없다. 유류세 인하율을 지난달 1일 20%에서 30%로 확대했다. 사실 윤석열 정부가 한 것도 아니고 문재인 정부가 한 것이다. 유류세 인하율을 더 확대하려면 국회를 움직여야 하는데도 윤석열 정부는 유류세 인하로는 유가를 잡는 데 역부족이라며 손놓고 있다가 엊그제 ‘검은 월요일’을 보고서야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추경은 아직 걷히지도 않은 초과세수를 바탕으로 했다. 금리 인상으로 성장률이 당초 예상보다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예상한 만큼의 초과세수가 확보될지 의문이다. 초과세수를 확보하려면 어떻게든 세금을 거둬야 하기 때문에 윤석열 정부는 세금 인하를 주저한다. 재정을 긴축해야 할 때 확장하는 역주행을 해놓고 나니 모든 것이 꼬이고 있다. 지금 인플레이션에는 현금 압력(cash push)과 원가 압력(cost push)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현금 압력 인플레이션은 금리 인상으로 대응해야 하지만 원가 압력 인플레이션은 정부가 직접 가격을 규제하거나 세금을 내리는 방법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전기료 등 공공요금을 동결하거나 내려야 할 때 문재인 정부가 탈(脫)원전 정책으로 한전에 천문학적인 적자를 쌓아놓은 걸 생각하면 분통하다. 권위주의 정부에서나 하는 일이라고 치부하지 말고 민간기업에도 전화를 걸어 가격 억제를 당부해야 한다. 소득세 소비세를 중심으로 세금도 내려야 한다. 벤 버냉키 전 미국 연준 의장이 헬리콥터에서 돈을 살포하듯 해 2008년 금융위기를 넘겼다. 그랬으면 후임자 재닛 옐런이 재빨리 돈을 거둬들였어야 하는데 머뭇거리는 사이 코로나 위기가 터져 돈이 더 풀렸다. 한은은 연준을 그대로 따라가기만 했다. 지금 인플레이션의 상당 부분은 중앙은행들의 실패에서 비롯됐다. 금융위기 이후 세계에 엄청난 양의 돈이 풀렸음에도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중국과 러시아가 값싸게 소비재와 원자재를 공급했기 때문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세계 경제에서 반쯤 떨어져나가자 원가 압력이 숨겨진 현금 압력까지 드러냈다. 미중 갈등은 깊어질 수밖에 없고 우크라이나에서 휴전이 이뤄져도 러시아가 돈바스 지역을 내놓지 않는 한 서방의 경제 제재는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도 윤석열 정부는 말로만 퍼펙트스톰을 우려했을 뿐 실제로는 인플레이션을 지나갈 바람으로 보고 안이한 대응을 해왔다. 전쟁 다음으로 국민의 재산을 위협하는 것이 인플레이션이다. 물가가 10% 오르면 연봉 5000만 원 월급쟁이는 500만 원을 빼앗기는 셈이다. 문재인 정부처럼 허투루 돈을 나눠주는 건 바라지 않는다. 가진 돈을 빼앗지나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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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선거 앞 돈질’에 또 이용된 자영업자 손실보상

    문재인 정부가 자랑한 K방역은 자영업자의 희생 위에서 이뤄졌다. 자영업자에게 지급된 돈은 고작 1, 2차 방역지원금 400만 원이었다. 이마저도 처음엔 손실 보상은 법률적 근거가 없다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내세워 주지 않으려 했다. ‘영업의 자유’와 ‘손실 있는 곳에 보상 있다’는 헌법적 원칙은 문재인 정부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대신 ‘손실 없는 곳에도 보상 있다’는 포퓰리즘 원칙이 작용했다. 그 원칙에 따라 방역지원금은 쥐꼬리만큼 주고 국민 재난지원금으로 1차 가구당 100만 원, 2차 개인당 25만 원을 퍼부었다. 국민 재난지원금에는 23조2000억 원이 쓰였다. 방역지원금에는 17조 원이 쓰였다. 국민 재난지원금 대상을 실직자 등 실제 피해자로 한정했다면 그들에게 더 많은 돈을 주고 방역지원금으로도 400만 원의 2배 정도는 너끈히 줄 수 있었다. 윤석열 정부는 3차 방역지원금으로 39조 원을 배정하고 600만∼1000만 원의 지원을 시작했다. 문재인 정부보다 2배 이상 늘어난 액수다. 업체의 연 매출액과 매출 감소율에 따라 100만 원씩 단계적으로 차등을 두고 있지만 손실에 비례한 보상과는 여전히 한참 거리가 멀다. 여야는 똑같이 손실보전금과 손실보상금이라는, 족보에도 없는 구분을 사용한다. 손실보전금은 방역지원금처럼 일률적으로 주는 돈이고, 손실보상금은 손실에 비례해 주는 돈이라고 한다. 손실의 크기를 묻지 않는 보상은 이를 정당화할 어떤 근거도 없다. 그건 포퓰리즘일 뿐이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만이 아니라 윤석열 정부도 방역지원금을 선거를 앞두고 지급한다. 자영업자들이 숨넘어간다고? 숨이 넘어갔으면 이미 100번도 넘게 넘어갔을 시간이 지났다. ‘윤핵관’ 중 하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예산폭탄’이라고 떠벌렸다. 문재인 정부는 뒤늦게 지난해 7월 손실에 비례한 보상을 도입했다. 코로나로 인한 영업제한은 2020년 3월부터 시작됐는데도 지난해 7월 이후의 손실에 대해서만 보상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런데도 더불어민주당은 국회에서 단독으로 소급적용 없는 손실보상법을 통과시켰다. 지난해 7월 이전의 손실은 1, 2차 방역지원금 400만 원으로 퉁치려 했던 것이다. 국민의힘은 당시 소급적용을 주장하며 법 통과에 반대했다. 그러나 지난달 3차 방역지원금을 통과시킬 때는 국민의힘이 오히려 손실 보상의 소급적용에 반대하고 민주당이 소급적용을 주장하고 나왔다. 이번에는 국민의힘이 1, 2, 3차 방역지원금 1000만∼1200만 원이면 지난해 7월 이전의 손실은 충분히 보상이 이뤄졌다고 보고 뭉개려 한 것이다. 어떤 업체에는 충분한 보상을 넘어 공돈이 생긴 것일 수도 있지만 어떤 업체에는 쥐꼬리만 한 보상이다. 헌법은 영업의 자유를 보장한다. 정부의 영업제한에 따른 보상금은 국민 재난지원금과 달리 정부가 줄 수도 있고 안 줄 수도 있는 게 아니다. 실정법에 근거가 없으면 헌법에 근거해 행정명령으로라도 줘야 한다. 손실 보상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선거에만 눈이 어두워 지원금을 앞세우고 비례 보상 원칙에도 안 맞는 지원금으로 손실 보상을 대체하려 한 점에서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식으로 한다면 누가 이 나라에서 영업을 하고 영업을 확대할 생각을 하겠는가. 여야는 소급 보상 여부를 선거 뒤에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소급 보상을 한다면 방역지원금은 전체 보상액을 결정하는 데 포함할 것인가 말 것인가. 제때제때 손실에 따른 보상을 하지 않다 보니 아예 영업을 포기하고 논 사람들이 보상받을 액수가 오히려 불어나는 역전 현상은 어떻게 다룰 것인가.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나니 많은 것이 엉망이 됐다. 손실에 따른 보상을 해야 하지만 100% 보상이라는 것도 무지한 얘기다. 코로나 발생 같은 위기 상황에서 정부는 돈을 써야 할 곳이 많아진다. 그래서 100% 보상은 어려울 수 있다. 얼마를 보상할지는 국가의 재정 여력에 달려 있다. 그래서 보상 비율을 법으로 못 박는 건 법으로 규정해선 안 되는 걸 법으로 규정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재정 여력이 안 되면 80%나 70%로 보상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분담하면서 공정하게 보상받는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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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마리우폴 함락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이 17일 러시아에 함락됐다. 마리우폴은 돈바스 지역 최남단에 위치해 크림반도로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다. 러시아는 자국에서 돈바스 지역을 거쳐 크림반도로 이어지는 육로를 확보함과 동시에 오데사와 몰도바 내 친러시아계 지역으로의 진격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러시아로서는 침공 이후 가장 큰 승리이고 우크라이나로서는 뼈아픈 패배다. ▷러시아로서는 승리이긴 하지만 너무 늦은 승리다. 러시아는 이미 한 달 전 마리우폴을 장악하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마리우폴의 우크라이나군은 소련 시대 때부터 거의 요새화된 아조우스탈 제철소 지하에 자리 잡고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결국 항복하긴 했지만 개전 이후 80여 일간 러시아군의 주요 전력을 이곳에 붙잡아뒀고 그것이 다른 곳의 우크라이나군이 선전한 한 원인이 됐다. ▷마리우폴 우크라이나군의 핵심 전력은 아조우연대다. 2014년 돈바스에서 친러시아 반군에 맞서기 위해 결성된 민병대지만 정규군보다 전투력이 더 강하다고 알려졌다. 아조우연대와 친러시아 반군은 서로 죽고 죽이는 과정에서 깊은 원한이 쌓였다. 아조우연대는 창설 당시 신나치 성향의 부대원들이 일부 있었으나 극단주의 성향은 현재 많이 희석됐다는 것이 서방 언론의 보도다. 그러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나치를 쫓아내기 위한 특별 군사작전 ‘Z’를 수행한다며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러시아 쪽에서는 아조우스탈에 있다가 항복한 군인 중에 미군 특수전 사령관을 지낸 에릭 올슨 예비역 대장을 비롯해 서방 국가 군 고위 장교들이 있다는 소문을 흘리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군에 끌려가는 모습으로 알려진 인터넷 사진 속 인물은 올슨이 아닌 것으로 팩트체크 사이트에서 확인됐다. 전쟁 보도는 선전 활동과 섞여 있기 때문에 가려들어야 한다. ▷러시아 의회는 아조우연대는 테러리스트이며 테러리스트를 포로 교환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명분이 나치 테러리스트 퇴치이므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포로 교환에 응한다면 거짓 명분을 내세운 것이 되고 포로 교환에 응하지 않으면 자국 군 포로 가족들이 분노할 것이다. ▷러시아는 마리우폴 장악에 만족하고 우크라이나와 새 협상을 시작할 것인가. 우크라이나는 마리우폴을 수복하기 위한 시도를 포기하고 협상에 응할 것인가. 핀란드와 스웨덴은 마리우폴 함락과 거의 동시에 나토 가입 신청을 했다. 러시아로서는 마리우폴을 얻은 대신 핀란드 쪽 국경의 안보가 취약해졌다. 미국과 유럽연합(EU)도 장기전으로 가는 건 부담스럽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새 국면에 접어들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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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이재명의 反지성, 윤석열의 半지성

    미국 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1963년 ‘미국의 반(反)지성주의’란 책에서 미국이 유럽에 비해 반지성적이라고 보면서 미국의 반지성주의를 조장하는 요인 중 하나로 다수 의사의 단순한 관철을 민주주의로 보는 선동정치를 들었다. 호프스태터는 미국 정치사에서 반지성주의를 조장한 인물 중 하나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을 꼽는다. 브라이언은 1896년, 1900년, 1908년 세 차례 민주당 대선 후보로 뽑혔으나 공화당 후보에게 모두 패했다. 금(金)본위제를 비판하는 그의 ‘금십자가 연설(금십자가에 농민을 못 박았다는 연설)’은 경제적 약자인 농민들의 이익을 우선한 것이지만 그의 주장대로 금본위제 대신 은화(銀貨)의 자유주조권이 허용됐다면 20세기 경제대국 미국은 없었을 것이다. 민주당은 연이은 패배를 겪은 후 1912년 대선에서야 대학 총장 출신의 우드로 윌슨을 후보로 내세워 당선시키면서 급진파들의 장악에서 벗어났다. 남북전쟁 이후 민주당 후보로 첫 집권한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만 해도 자신과 당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국가를 우선했다. 그러나 이후 브라이언의 등장으로 민주당은 약 20년간 혼란을 겪었다. 윌슨, 루스벨트, 케네디, 클린턴, 오바마 등으로 이어지는 현대 민주당의 전통은 브라이언의 선동정치를 극복하고 난 뒤에 확립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다수의 힘으로 상대를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렸다”고 말했다. 호프스태터라면 “다수의 힘으로 상대를 억압하는 민주주의가 반지성주의를 조장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국회에서 다수인 더불어민주당이 숙의는커녕 숙의를 위한 최소한의 시간조차 허용하지 않고 자당 의원을 무소속으로 빼내면서까지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을 통과시킨 과정은 반지성적 민주주의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올 3월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온 이재명 전 경기지사는 ‘기본소득론’ 같은 선동적 주장을 펴다 패한 정치가라는 점에서 한국판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라고 할 만하다. 민주당이 이 전 지사를 대선 후보로 뽑은 것과 최근 검수완박 법안의 강행은 그 성격이 다르지 않다. 민주당은 반지성주의의 긴 혼란기를 지나고 있다. 한국 정당 정치의 발전은 민주당이 언제쯤 급진파들에서 벗어나 윌슨 같은 합리적 인물을 당을 이끌 후보로 뽑을 수 있느냐에 달렸다. 호프스태터는 지성(intellect)과 지적 능력(intelligence)을 구별한다. 좋은 대학을 나오거나 사법시험에 일찍 합격하는 것은 지적 능력을 보장할지언정 지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지성은 어떤 사안을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 일반화해서 볼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더 큰 틀 속에서 한발 앞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다. 지성보다 직관(intuition)을 중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호프스태터는 민주주의를 이용한 선동정치 외에도 기독교 복음주의와 기업의 실용주의 정신을 반지성주의를 조장하는 요인으로 꼽았다. 열성적인 기독교인과 실용적인 기업가 중에는 직관을 중시하는 사람이 많다. 기독교와 기업가 정신은 그 자체로는 전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보여줬듯 그것이 반지성주의와 연결되면 큰 해악이 될 수 있다. 대선 운동 당시 손에 왕(王)자를 그리고 TV 토론에 나온 윤 대통령은 얼마나 지성적인가. 윤 대통령 부부에게서 사업이나 관직의 성공과 무속적 신앙의 기이한 병존이 목격됐다. 대통령집무실의 광화문 이전 약속을 하루아침에 용산으로 바꾼 것은 약속 내용의 중대한 변경이 있었기 때문에 약속을 지킨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전을 결정한 쪽은 성공을 장담하지만 세심한 검토를 거친 것이 아니어서 그 결과를 알 수 없다. 이런 결정은 직관적일 수는 있어도 지성적이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그 직관은 신비적인 구석까지 있다. 부인이 무속인과 전화통화를 할 때 ‘조국이 대통령 될 것 같으냐’고 물어보라는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누구 것이었던가. 출퇴근하면서까지 청와대에서는 하루도 안 살겠다는 비상식적 고집은 과연 무속과 무관한가. 상대편의 반지성주의를 비판하기 전에 본인의 지성부터 확실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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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게이츠와 머스크

    빌 게이츠(67)가 20세기 후반의 혁신가라면 일론 머스크(51)는 21세기 초반의 혁신가다. 게이츠는 도스와 윈도 등 범용 운영체제(OS) 개발로 정보기술(IT) 혁명을 주도했고 머스크는 전기차, 재활용 우주선 등의 개발로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IT를 자동차, 로켓 등 전통 산업에 접목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머스크는 모범생적인 게이츠와 달리 기계 산업 종사자 특유의 활달하면서도 거친 면이 있다. ▷게이츠는 미국 출신으로 하버드대를 다니다 자퇴했다. 머스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으로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외가 쪽 고향인 캐나다 국적을 취득해 퀸스대를 다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로 옮겨 공부했다. 이후 스탠퍼드대 박사 과정에 합격했으나 이틀 만에 자퇴했다. 머스크는 리버럴(민주당 지지) 일색인 미국 IT 업계에서 특이하게 공화당 친화적인 성향을 보여 왔는데 그가 미국 밖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것과 무관치 않다. ▷게이츠는 머스크가 지난달 트위터를 인수하면서 트위터를 ‘표현의 자유’가 있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만들겠다고 한 데 대해 우려 섞인 반응을 내놓았다. 게이츠는 “소셜미디어는 허위 정보 확산을 막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며 “백신이 사람을 죽인다는 이야기에 대해 그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라고 물었다. 트위터광(狂)인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가짜 뉴스를 유포하고 폭력을 선동해 계정이 삭제됐다. 사업가이기도 한 트럼프는 ‘트루스 소셜(Truth Social)’이라는 새 SNS를 출범시키며 이에 반발했다. 머스크의 트위터 인수의 배후에 트럼프가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머스크가 운영하는 3대 업체인 우주선 스페이스X, 전기차 테슬라, 태양광 솔라시티만 해도 사업의 내적 연관성이 있다. 스페이스X로 화성에 사람을 실어 나르고, 솔라시티 기술로 태양광을 활용해 화성에 기지를 건설하고, 태양광을 전기에너지로 전환해 테슬라를 구동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업 구도에서 보면 트위터 인수는 맥락에서 벗어난다. ▷트위터가 트럼프의 계정을 삭제했을 때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는 트위터의 조치가 ‘표현의 자유’에 반한다고 비판했다. 게이츠 자신은 코로나19 사태 초기 그가 고의로 바이러스를 만들어 퍼뜨렸다는 음모론에 시달렸다. SNS라고 해서 가짜 뉴스를 방치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기존 언론처럼 가짜 뉴스를 골라내 차단하는 것이 옳은지 세계적으로 논란이 있다. 이 논란에 일도 열심히 하지만 책 또한 많이 읽기로 소문난 두 구루(guru)가 끼어들었다. 그 결론이 자못 궁금해진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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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병사 월급 포퓰리즘

    병사들에게 월급 200만 원이 아니라 그 이상을 줘도 그 자체로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 대전현충원을 1980년대 중반 이후 거의 매해 찾는다. 사촌 형님이 20대에 군 복무 중 사망해 그곳에 묻혀 있다. 40년도 안 돼 100만 평 가까운 땅이 더 이상 묘비가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찼다. 나 역시 군 복무 중 수송트럭을 타고 이동하다가 트럭이 옆으로 굴러 죽을 뻔한 아찔한 사고가 있었다.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 복무하는데 200만 원이 아니라 1000만 원인들 많겠는가. 그러나 최저시급에 맞춰 병사들에게 200만 원을 준다는 건 계산부터가 틀렸다. 병사들은 국가로부터 숙식을 제공받는다. 일반인의 최저시급에 맞춰 월 200만 원을 받는 것이라면 병사들은 국가로부터 숙식을 제공받는 비용을 빼고 받아야 한다. 국가로부터 숙식을 제공받는 병사들의 월급이 200만 원이라면 영외 생활을 기본으로 하는 장교와 부사관은 최소한 300만 원 이상은 돼야 한다. 2021년 기준으로 육군 하사 1호봉 월급은 고작 166만 원이다. 원사나 돼야 비로소 1호봉이 300만 원을 넘는다. 육군 소위 1호봉은 170만 원이다. 소령 1호봉이 299만 원이다. 물론 장교와 부사관은 수당이 있어서 실제 받는 월급은 이보다 많다. 그럼에도 병사들의 월급을 200만 원으로 올리면 장교와 부사관의 월급도 함께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군이 병사 월급 200만 원이 문제가 많은 공약인 줄 알면서도 잠자코 있는 것은 병사 월급이 오르면 장교와 부사관의 월급이 덩달아 오르지 않을까 기대해서다. 병사들의 월급을 200만 원으로 올리는 데는 국방 예산 5조1000억 원이 더 필요하다. 올해 국방 예산의 9.3%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액수이다. 여기에다 장교와 부사관의 월급 인상분을 합치면 현재 40% 정도인 국방 인건비가 50%를 넘어 최대 60%까지 근접할 수 있다. 병사 월급 200만 원은 예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로 인해 초급 장교의 충원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우리나라는 병사들만이 아니라 장교들도 의무복무를 겸하는 단기복무 장교가 많다. 육군 초급 장교의 70%가 ROTC 등 단기복무 장교다. 이미 병사들의 복무 기간이 크게 단축되면서 군은 초급 장교 충원에 애를 먹고 있다. 병사들의 복무 기간은 노무현 정권 전까지만 해도 2년 2개월이었으나 문재인 정권에서 지난해부터 1년 6개월까지 내려온 반면 단기복무 장교의 의무복무 기간은 2년 4개월로 수십 년째 고정돼 있다. 복무 기간도 병사들보다 10개월이 긴 데다 병사로 근무해도 월급 200만 원을 받게 되면 굳이 장교로 가서 많은 책임을 지면서 근무할 이유가 없어진다. 전투력은 징병제 병사들이 모병제 병사들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그렇다고 의무 복무하는 병사들에게 직업군인 같은 자세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병사들의 월급 수준이 낮게 책정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현대전으로 올수록 첨단 장비를 사용하는 전투 훈련이 필요하다. 고작 1년 6개월 근무하고 제대하는 병사들에게 이런 훈련을 숙달시키긴 어렵다. 1년 6개월은 미리 정해진 작전·경계 지역에 병사들을 투입하고 퇴각시키는 기동 훈련만으로도 벅찬 시간이다. 그렇다면 징병제를 유지하면서 병사들에게 200만 원을 지급하기보다는 돈을 좀 더 주더라도 모병을 늘려 정예화하는 게 전투력을 키우면서도 예산을 줄이는 길이다. 병사 월급 액수보다 먼저 그려야 할 큰 그림은 모병제로 언제, 어느 정도나 갈 것이냐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대선 운동 당시 취임 첫해부터 200만 원을 약속했다. 그는 부동시(不同視) 판정을 받아 군 면제를 받았다. 군에서 총 한 번 안 쏴본 사람이다. 군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당장 눈앞의 20대 남성 유권자를 겨냥한 공약을 했다. 대통령직인수위는 어제 2025년 병장 월급 200만 원으로 목표를 하향했다. 병장 월급이 200만 원이면 이병 월급도 최소한 150만 원 이상이 돼야 한다. 하향이라기보다 공약의 실현 시기만 3년 늦춘 것이지만 그래도 과도하다. 문재인 정부에서 병사 월급이 많이 올라 올해 병장 월급이 67만 원이다. 2025년까지 병장 월급 100만 원 이상이 현실적인 목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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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검사가 ‘제왕’ 된 나라에서의 검찰 개혁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은 아니지만 검수더박(검찰 수사권 더 박탈)이라면 옳은 방향이다. 우리나라 검찰이 중요 사건의 직접 수사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알기 위해 법률가들도 잘 모르는 외국 형사사법제도와 비교해보려 하지 마시라. 신문을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검찰발 수사 기사가 우리나라처럼 많은 나라가 없다. 일본 신문에서는 간혹 눈에 띌 뿐이고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신문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요즘 ‘스며든다’는 말이 유행이다. 미국이나 유럽 국가에서 검사는 좀처럼 수사의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사실상의 수사 조율을 통해, 유럽 국가에서는 법적인 수사지휘권을 통해 수사에 스며든다. 검사의 수사 개입은 검사가 수사를 잘해서 하는 게 아니다. 소송 절차를 잘 알고 수사 현장에서 한발 떨어져 객관적으로 조언할 수 있기에 한다. 대형 비리 사건에 예외적으로 검사가 전면에 나설 때도 수사는 수사기관을 통해 주로 한다. 우리나라 검찰에는 많은 수사관이 있다. 어느 나라 검사나 사무보조원을 두고 있지만 우리나라 검찰에는 사무보조원을 넘어서는 수사관들이 있다. 검사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직접 수사를 한다. 미국으로 치면 연방검찰 속에 연방수사국(FBI)이 들어와 있는 셈이다. 세상에 이런 검찰이 없다. 검수완박에 항의하는 검사들 중에는 수사를 할 수 있다면 경찰에라도 가겠다는 이들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은 기소권과 수사권 중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검찰이 제가 잘나서 수사까지 잘하는 줄 알면 착각이다. 경찰이 99%의 일반 사건들을 처리하느라 허덕이는 동안 검사는 1%의 중요 사건만 골라 수사하면서 노하우를 쌓았다. 경찰에도 우수한 인력을 모아 검찰처럼 수사할 여건을 만들어 주고 중요 사건을 수사하도록 한다면 얼마든지 전문성을 높일 수 있다. 기소와 수사는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검수완박은 틀렸다. 그러나 기소와 수사는 상호 견제가 가능할 정도로 적절히 분리돼야 한다. 바람직한 대안은 수사관 등을 줄여 검찰의 직접 수사를 가능하게 하는 물적(物的) 기반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동시에 검사의 수사지휘권을 부활시키되 수사지휘는 주로 보완수사 요구를 통해서 하고 예외적으로 검사가 수사의 전면에 나설 때도 수사 자체는 가능한 수사기관의 도움을 받아서 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검찰과 수사기관 관계의 모범적인 글로벌 프랙티스(global practice)다. 검경수사권 조정 당시 조국 대통령민정수석과 윤석열 검찰총장 사이에 검찰이 수사지휘권을 포기하는 대신 부패 등 6대 범죄 직접 수사권을 갖는 타협이 이뤄졌다. 문재인 정권은 그때만 해도 박근혜 이명박 정권 청산에 앞장선 ‘우리 윤 총장’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남아 있어 직접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하지는 않았다. 당시 검찰은 직접 수사권을 포기하더라도 수사지휘권을 지켰어야 했다. 사퇴를 불사하는 결기는 그때 보였어야 한다. 잘못된 거래 때문에 형사사법제도 개혁은 스텝이 꼬여 버렸다. 민주당의 검수완박 추진의 부당성을 따지기 위해 형사사법제도 운운할 필요도 없다. 누가 봐도 문재인과 이재명 두 사람을 향한 수사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스스로가 이해당사자라는 점, 졸속의 흔적이 곳곳에 드러난다는 점만으로도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 그럼에도 문제는 남는다. 검찰이 또다시 과거 정권 수사를 직접 하도록 함으로써 논란의 여지를 남길 것인가. 권한이 적절히 나뉜 상태에서 수사와 기소가 이뤄지면 그 결과는 덜 정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우리나라 국민은 문민정부 이래 홍준표부터 윤석열까지 스타 검사들에게 가스라이팅당한 측면이 있다. 그 결과가 대통령도 검찰 출신, 대통령과 당내 경선에서 1, 2위를 다툰 후보도 검찰 출신, 황태자 법무장관 지명자도 검찰 출신, 여당 원내대표도 검찰 출신인 나라다. 검찰은 대통령을 제왕적으로 만든 결정적 수단이었으나 제왕을 갈아 치우면서 스스로 제왕이 됐다. 윤석열 정부에서 더 이상 검찰 개혁은 없다는 우려를 민주당만 갖고 있는 게 아니다. 검수완박은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글로벌 프랙티스에 맞는 검찰 개혁안을 제시하고 나서 검수완박에 반대해도 반대해야 할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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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프랑스 결선투표

    10일 치러진 대선 1차 투표 결과 중도파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극우파 마린 르펜이 각각 27.8%, 23.1%를 얻어 2주 뒤인 24일 2차 결선투표에서 맞붙게 됐다. 프랑스는 두 번 선거를 치러 대통령을 뽑는다.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1, 2위 후보가 양자 대결로 승부를 결정짓는다. 두 사람은 2017년 대선에 이어 재대결이다. 당시는 마크롱이 르펜을 따돌렸다. ▷극좌파 장뤼크 멜랑숑은 21.9%로 3위를 차지했다. 결국 멜랑숑의 지지자들이 결선투표에서 누구를 지지하느냐에 대선의 향방이 달렸다. 멜랑숑 자신은 르펜은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멜랑숑의 지지자들의 의견은 마크롱, 르펜, 지지 후보 없음 사이에서 갈리고 있다. 언론인 출신인 에리크 제무르는 7.0%의 득표로 4위를 차지했다. 제무르는 극우 성향으로 출마 초 큰 관심을 끌었으나 르펜의 아성을 뚫지 못해 르펜의 대체재가 되지 못함이 입증됐다. ▷프랑스의 전통적 우파인 공화당과 전통적 좌파인 사회당은 이번 대선에서 완전히 몰락했다. 공화당은 5년 전에만 해도 19.9%의 득표로 3위를 차지했으나 이번에는 고작 4.7%를 얻었다. 5% 미만인 정당은 최대 800만 유로(약 108억 원)까지 환급받는 선거비용도 돌려받지 못한다. 5년 전 이미 몰락을 경험한 사회당은 이번에는 1.7%를 얻어 꼴찌에 가까웠다. 공화당을 세운 샤를 드골과 사회당을 세운 프랑수아 미테랑이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다. ▷이번 대선 1차 투표는 공화당이 몰락한 자리에 극우파 르펜의 ‘국민전선’, 사회당이 몰락한 자리에 극좌파 멜랑숑의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가 들어서는 것으로 프랑스 정치판의 재편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5년 전 중도파 정당인 ‘전진’을 창당한 마크롱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르펜 대 멜랑숑, 즉 극우파 대 극좌파의 결선투표를 막은 것만으로 이미 큰일을 했다. ▷프랑스 결선투표는 다당제 상황에서 극단적 성향의 후보가 뽑히는 걸 막아왔다. 20년 전 마린 르펜의 아버지 장마리 르펜과 공화당 자크 시라크가 맞붙은 결선투표에서는 극우파에 도저히 표를 던질 수 없는 유권자들도 상대적으로 온건한 시라크를 찍었다. 5년 전에는 마크롱을 찍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보는 예상이 우세하다. 극우파와 달리 극좌파는 한 번도 결선투표에 진출하지 못했다. 이번에 멜랑숑이 조금만 더 지지를 얻었다면 르펜을 따돌리고 결선투표에 진출할 뻔했다. 극우파든 극좌파든 어느 쪽이 결선에 올라와도 결선투표는 정치의 극단화를 막는 기능을 꽤 잘하리라는 기대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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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퍼펙트 스톰이 다가오는데 큰일 났다

    “큰일 났다. 봄이 왔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얼마 전 국민통합위 첫 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한 말이다. 위원 중 한 명이 “큰일 났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니 윤 당선인이 “‘큰일 났다. 봄이 왔다’는 말이 있다. ‘큰일 났다. 겨울이 왔다’보다는 느낌이 있지 않나. 그렇게 큰일이 났다는 말로 이해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윤 당선인은 검사 시절 변양균 씨가 기획예산처 장관일 때 작품 2점을 신정아 씨로부터 구입한 사실도 수사했는데 그중 한 작품이 사진작가 황규태의 ‘큰일 났다. 봄이 왔다’다. 흐드러지게 핀 매화 사진이다. 강현국 시인의 시 ‘후렴’에도 같은 표현이 있다. 윤 당선인이 어느 쪽을 떠올렸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현실은 ‘큰일 났다. 겨울이 왔다’ 정도가 아니라 ‘큰일 났다.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이 다가오고 있다’여서 ‘봄이 왔다’는 말은 분투를 당부하는 것으로 새겨듣더라도 화자의 현실감 떨어지는 상황 인식으로 들린다. 문재인 대통령 임기 중 집값이 배나 오르면서 전세 사는 이들은 벼락거지가 됐다. 전세금마저 41% 넘게 올라 전셋집을 더 좁은 곳으로 옮기고 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있는 전세금마저 까먹게 생겼다.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면 예전엔 2인 가족 1주일 치 먹을거리를 15만 원에 샀으나 지금은 20만 원에서 25만 원까지 든다. 코로나가 지나갈 조짐을 보이자 인플레이션이 몰려오고 있다. 인플레이션은 전세금같이 현금밖에 없는 사람에게는 대재앙이다. 나라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는데도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얼마 전 문 대통령을 위한 별도의 퇴임식 운운했다. 민주화 이후 대통령 퇴임 행사는 새 대통령의 취임식에 부부가 함께 참석한 뒤 식이 끝나면 새 대통령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것으로 간소하게 해왔다. 암군(暗君)에게는 그것도 과분하다. 윤 당선인은 쉰 살에 늦장가를 갈 때 수중에 달랑 2000만 원 있었다고 한다. 주택청약통장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결혼하자마자 강남에 아파트가 생긴 사람이다. 먹고 싶은 것 못 먹고 입고 싶은 것 못 입으면서 적금 붓고 집 살 날만을 기다려온 이들의 좌절을 알 턱이 없다. 그러니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자신이 무엇 때문에 당선됐는지도 잊어버리고 집값 잡을 주도면밀한 구상보다 집 가진 사람들의 보유세 걱정을 먼저 하면서 다시 집값 상승을 부추기고 있다. 대통령은 국민 전체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상정되는 왕이 아니다. 대통령의 득표율은 대부분 50% 안팎이다. 국민 절반은 새 대통령의 취임을 환영하겠지만 나머지 절반은 그렇지 않다. 별도의 퇴임식은 가당치도 않은 얘기이고 취임식도 가능한 한 간소하게 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식에 7만 명을 초청해놓고 싸이를 불러 공연을 시켰다. 이명박 대통령 때는 장사익 등이 불려왔다. 지금은 BTS가 최고이니까 어떻게든 BTS를 부르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 인수위 측이 얼마 전 BTS 기획사를 찾았다는 뉴스를 흘려들을 수 없었다. 문 대통령은 의도치 않게 취임식을 간소하게 했다. 당선 직후 바로 취임했기 때문에 성대한 취임식을 준비할 시간도 없었지만 전직 대통령이 탄핵으로 감옥에 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취임식으로선 그게 보기 좋았다. 말이 좋아서 취임식을 계기로 각계각층 각 지역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 축하 잔치를 벌인다고 하지만 전두환 시절 국풍(國風)의 아류 같은 행사로는 국민통합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없다. 윤 당선인은 청와대의 세입자일 뿐인데 집주인 행세하며 살 곳을 제멋대로 결정하고 밀어붙이고 있다. 국민과의 소통은 공원을 찾는 한가한 시민과의 만남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만나야 한다. 그래서 소통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다. 총리로 지명된 한덕수 씨는 사고를 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창의적인 사람도 아니어서 수선(修繕)의 시기에 적합한지 의문이다. 정곡을 찌르지 못하는 국정 운영으로는 퍼펙트 스톰을 헤쳐 나가는 건 고사하고 문 정권이 문을 연, ‘가진 자는 더 가질 것이고 가지지 못한 자는 있는 것마저도 빼앗기는’ 극한 양극화를 고착시킬 뿐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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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누가 청와대를 돌려달라고 했나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게서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듣는 게 불편하다. 국민은 대통령에게 제왕적 통치에서 벗어나라고 했지, 청와대를 돌려달라고 한 적이 없다. 그가 국민을 들먹이며 스스로 안 들어가겠다고 한 것이지 국민이 요구한 것이 아니다. 청와대가 공원이 되지 않아도 그 일대는 충분히 좋다. 경복궁 담벼락을 따라 청와대 정문 앞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은 서울 최고의 산책길 중 하나다. 성곽길을 따라 청와대 뒤편 북악산으로 오르는 길도 잘 조성돼 있어 굳이 경복궁역에서 출발해 청와대를 통해 올라갈 필요도 없다. 궁의 뒤편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공간이다. 경복궁에서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자칫 흉흉해질 수 있는 공간에 사람 사는 활력을 불어넣는 곳이 24시간 불 켜진 청와대다. 그곳을 비워 공원으로 만드는 게 좋은 것인지 의문이다. 윤 당선인이 광화문 시대를 열겠다고 했을 때 경호 보안 등의 문제를 해결할 복안이 서 있는 줄 알았다. 전혀 없었는데도 호언장담을 했다. 그가 광화문 시대를 열겠다고 한 이유는 소통이었다. 그러나 그 팀은 이미 청와대에 대통령 집무실이 비서동에 자리 잡고 기자실과도 가깝다는 기본 사실도 몰랐다. 그런 팀이 최초 아이디어 이후 닷새 만에 결정한 용산 시대가 졸속이 아니라고 한다면 누가 믿어주겠는가. 여론조사 결과 용산 이전에 58%가 반대를, 33%가 찬성이다. 윤 당선인은 500억 원이면 이전이 완료될 것처럼 말했다. 다음 날 합동참모본부를 남태령으로 옮기는 데 1200억 원이 든다는 발표가 따로 나왔다. 대통령 관저를 새로 짓는다면 또 큰돈이 들어갈 것이다. 정말 그 돈만 들 것인지도 의문이다. 승효상 유홍준 씨 등 문재인의 친구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청와대 흉지(兇地)론을 들먹였다. 청와대 옛 본관이 있던 수궁 터는 예로부터 길지(吉地)로 꼽힌다. 그래서 일본의 조선총독이 그곳에 관저를 지었다. 대통령들의 불운은 청와대가 흉지여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잘못해서다. 대통령 개인과 달리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발전했다. 길지여서 그랬을 것이다. 지금은 미사일 시대다. 이런 시대에 북한 쪽으로 가파른 북악산이 솟아 있고 양 측면으로 대공 방어망을 구축할 수 있는 산들에 둘러싸인 청와대야말로 분단국가의 대통령이 입지할 최적의 장소다. 10년 전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주겠다”고 말하고 5년 전 광화문 시대를 추진한 원조는 문 대통령이다. 광화문 시대는 문 대통령도, 윤 당선인도 실패했다. 당초 천혜의 길지를 두고 광화문으로 간다는 구상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고 그 잘못된 구상이 다시 용산으로 간다는 더 잘못된 구상으로 이어졌다. 문 대통령은 안보 공백을 이유로 윤 당선인의 용산 구상에 제동을 걸었다. 임기 내내 한미 연합훈련을 지휘소 훈련으로 대체하고 연대급 이상 기동훈련을 없앤 대통령이 안보 운운하는 것이 기가 막힐 따름이고 문-윤 만남을 앞두고 인사 뒷거래를 위한 선제적 조치라는 소문도 있지만 안보 공백이라는 빌미를 준 데는 윤 당선인이 책임 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특히 안보와 같이 빈틈이 없어야 하는 일에는 시간이 걸려도 순서를 밟아야 한다. 용산 시대를 열려면 남태령의 수방사가 먼저 이전해야 하고, 이전 완료 후 문제가 없음이 확인될 때 합참이 남태령으로 이전해야 하고, 다시 이전 완료 후 문제가 없음이 확인될 때 국방부가 합참 자리로 들어가고 대통령 집무실의 이전이 시작돼야 한다. 윤 당선인은 문 대통령의 예비비 지출 결정을 몽니로 여기고만 있지 말고 지나치게 성급히 추진된 용산 시대 구상을 시간을 갖고 숙고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취임 이후 용산 집무실이 완공될 때까지 통의동 인수위 사무실에서 일하겠다는 무모한 고집은 접어야 한다. 윤 당선인은 청와대를 잘 알지 못한다. 일단 청와대로 들어가서 경험해보라. 들어가면 못 나온다는 자세로 무슨 실사구시적인 개혁을 하겠는가. 간혹 토리와 함께 경복궁 주변을 산책하고 간혹 광화문에 나와 식사도 하면서 국민과의 소통도 시도해보라. 윤 당선인같이 혼밥을 싫어하는 성격이 해봐도 안 되면 정말 안 되는 것이다. 그때 가서 다시 논의하자.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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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알랭 들롱의 안락사 결정

    40대 이상은 알랭 들롱을 ‘아랑 드롱’이라고 불렀다. 그레고리 펙이니 리처드 버턴이니 하는 미국 할리우드 미남 배우들의 이름은 몰라도 이 프랑스 배우의 이름은 알았다. 지금 60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를 개봉 영화관이 아니라 TV 영화를 통해 봤을 뿐인데도 그렇다. 한국인에게 미남 배우의 대명사는 알랭 들롱이다. ▷들롱의 첫 히트작은 주제음악으로도 유명한 ‘태양은 가득히’(1960년)다. 자신이 한 거짓말을 사실처럼 믿는 병을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영화에서 들롱이 맡은 리플리 역에서 나왔다. 하지만 들롱 하면 역시 ‘누아르(범죄)’ 영화에서 트렌치코트의 깃을 세우고 중절모를 푹 눌러쓴 냉혹한 범죄자 연기다. 장폴 벨몽도와 같이 나온 ‘볼사리노’(1970년), 장 가뱅과 함께한 ‘암흑가의 두 사람’(1973년)이 한국에서 특히 인기가 있었다. ▷들롱은 젊었을 때 독일 미녀 배우인 로미 슈나이더, 록 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객원 멤버인 니코와 염문을 뿌리고 70대에도 20대 여성 모델과 동거했지만 결혼은 1964∼69년 여배우 나탈리 들롱과 한 것이 유일하다. 그 사이에 낳은 아들이 앙토니다. 지난해 나탈리가 췌장암에 걸렸을 때 안락사를 시도했다. 그때 이 아들이 어머니를 끝까지 모셨다. 아들은 19일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로부터 자신이 죽게 되면 안락사를 택할 텐데 그때 끝까지 곁에 있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그러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들롱은 1999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해 이후 스위스에 살고 있다. 스위스는 안락사가 가능한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그의 이주는 프랑스의 많은 부자들처럼 ‘부유세’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가긴 갔으나 안락사가 맘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들롱은 나탈리가 죽은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누구나 어느 나이가 되면 병원을 거치지 않고 수술 자국 없이 조용히 사라질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들롱의 나이 올해 87세다. 그는 2019년 뇌졸중을 겪었지만 아직 건강하니 당장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유명인의 안락사 결심이 하나둘 늘고 있는 초고령사회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2016년 일본 인기 TV 드라마 ‘오싱’의 작가 하시다 스가코(橋田壽賀子)가 한 월간지에 “안락사로 죽고 싶다”는 글을 게재해 우리나라에서까지 화제를 모았다. 안락사를 뜻하는 에우타나시아(euthanasia)를 그리스 어원으로 직역하면 아름다운 죽음이란 뜻이다. 세상에 아름다운 죽음이 어디 있겠냐마는 아름답지 않은 죽음을 피하려는 욕구는 조금씩 커져가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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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샤이 이재명’

    근래 우리나라 여론조사에서는 ‘샤이 보수’보다는 ‘샤이 진보’가 조사를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20대 총선(2016년)에서는 선거 전 여론조사에서 야권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나뉘어 여당이던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이 압승하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결과는 크게 빗나갔다. 민주당(123석)이 새누리당(122석)에 간발의 차이로 이겼다. ▷이듬해 19대 대선(2017년)은 탄핵 직후의 선거로 ‘샤이 진보’가 있을 이유가 없었다. 5년 뒤인 이번 대선에서는 여론조사 공표금지 기간에 실시돼 본투표 직후 공개된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적게는 3.1%포인트, 많게는 7.6%포인트까지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투표 결과는 0.73%포인트 차의 신승(辛勝)이었다. 여론조사 공표금지 며칠 동안 윤 후보에 대한 여론을 불리한 쪽으로 크게 바꿀 만한 사건이 없었기 때문에 ‘샤이 진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대선이나 총선 국면에서 수백 번의 여론조사가 이뤄진다. 전국 단위에서 몇몇 후보를 대상으로 하는 대선 여론조사는 많은 지역구의 많은 후보를 대상으로 하는 총선 여론조사보다 정확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이번 대선 여론조사는 그렇지 못했다. 공표금지 기간 직전 실시된 17개 여론조사에서 윤 후보는 막판 단일화 전 안철수 후보가 포함된 대결임에도 15개에서 이 후보를 앞섰고 그중 4개에서는 오차 범위 밖에서 앞섰다. ▷20대 총선에서 여론조사의 부정확성이 쟁점이 된 후 21대 총선(2020년)부터는 휴대전화 안심번호의 이용이 가능해졌다. 그 때문에 21대 총선 여론조사는 20대 총선보다 정확해졌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과연 그런지는 더 검토가 필요하다. 당시 여론조사는 어느 지역구에서는 더 정확했고 어느 지역구에서는 더 부정확했다. 전국 단위의 몇몇 후보에게 조사가 집중되는 이번 대선 국면에서 그 정확성이 다시 입증돼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여론조사는 현대 정치 활동의 기초 자료다. 여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정치 토론이 이뤄지고 정부와 정당은 그 결과에 맞춰 정책을 수정하기도 한다. 안심번호가 이용 가능해져 휴대전화 등장 이후 발생한 샘플링의 난점은 어느 정도 극복됐다. 다만 응답을 거부하는 샤이한 유권자가 있으면 샘플링을 잘해도 체계적인 왜곡이 발생한다. 샤이한 유권자의 응답을 끌어내려면 조사비를 많이 쓰는 수밖에 없다. 싸구려로 막 하는 여론조사는 여론조사가 아니라 여론조작이다. 여론조사의 질을 높일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민심(民心)의 방향을 잘못 읽는 후진적 정치 활동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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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문재인 정권에서 ‘완장’ 찼던 언론인들

    문재인 정권 들어 KBS에는 진실과미래위원회(진미위), MBC에는 정상화위원회, 연합뉴스에는 혁신위원회, YTN에는 미래발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법원은 진미위의 운영규정이 위법이라는 판단을 현재 2심까지 내린 상태다. 기자들이 스스로 완장을 차고 동료들을 상대로 조사를 한 뒤 회사에 징계를 요구하고 회사는 그 요구대로 징계하는 모습이 언론사에 들이닥친 인민위원회를 보는 듯했다. KBS에서는 문재인 지지 원탁회의 멤버인 김상근 이사장-양승동 사장 체제에서, MBC에서는 최승호 사장-보도국의 실세로 나중에 사장까지 한 박성제 보도국 취재센터장 체제에서, 연합뉴스에서는 노무현재단 상임중앙위원을 지낸 강기석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조성부 사장 체제에서, YTN에서는 자사 출신 최남수 사장이 내정자라는 불안정한 상태에 있을 때 노조 주도로 이 같은 일이 벌어졌다. KBS에서는 민노총 언론노조 KBS본부가 기존 이사들을 몰아내고 진미위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진미위 위원장을 맡은 정필모 부사장은 지난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의 비례대표로 정치권에 직행해 스스로 진미위 활동의 정치성을 드러냈다. MBC에서는 사측 2인, 노측 2인으로 정상화위원회를 만들었다. 주인 없는 회사에서 말이 사측이고 노측이지 실은 한통속이었다. 노사 공동조직이었기 때문에 위원회와 독립한 회사의 견제도 없었다. 그 결과 KBS만 해도 해고는 삼갔으나 MBC는 해고의 칼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YTN 최남수 사장 내정자는 결국 내정자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TBS 사장 재직 시 ‘김어준의 뉴스공장’ 프로그램을 만든 정찬형 사장에게 자리를 내줬다. 미래발전위원회 구성을 주도한 해직 기자 중 한 명인 우장균은 정찬형에 이어 사장을 했다. KBS MBC YTN은 국영이나 다름없는 공영방송사이고 공기업이 대개 그렇듯이 민노총 언론노조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 직원들은 보수 정권이 잡으면 곁눈질로, 진보 정권이 잡으면 정면으로 언론노조의 눈치를 본다. 완장질이 가능한 것은 그런 구조이기 때문이다. KBS MBC야 원래 그러려니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연합뉴스의 변질이다. 과거 연합뉴스는 언론사들로부터 전재료(轉載料)를 받아 운영됐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에서부터 국영이나 다름없는 공영통신사가 됐다. 언론사들의 공유체제에서 벗어나자 연합뉴스도 주인 없는 공영방송사를 닮아갔다. MBC에서는 19명이 해고됐다. 이명박 정권 때 불법파업으로 해고된 5명보다 훨씬 많다. KBS에서는 17명이 징계를 받았다. 이명박 정권 초 불법파업으로 징계를 받은 7명보다 훨씬 많다. 연합뉴스에서는 전례 없이 1명이 해고되고 3명이 징계를 받았다. YTN에서만 이명박 정권 때 6명이 해고됐지만 6명을 징계하는 선에서 끝났다. 해고와 징계 사유는 ‘파업에 가담하지 않았다’ ‘사조직을 결성해 직장 질서를 문란케 했다’는 등 정상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법인카드의 경미한 오용 등 걸면 걸리는 사유도 있다. 보도의 불공정성을 문제 삼아 해고나 징계를 했으면 보도가 나아져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완장들이 설친 후 보도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수준’으로 편향적이 됐다. 이들 언론사에도 상식적인 기자들이 있으니 정권이 바뀌면 자율적으로 바로잡아 주기를 바라지만 수적으로 열세여서 자정(自淨) 기능이 발휘될지 의문이다. 공영방송사 노조가 민노총에 장악된 상태에서 정권이 진보에서 보수로 바뀔 때 MBC 광우병 보도가 터져 나왔다. 가짜뉴스로 혹세무민하면서 나라를 뒤흔드는 보도가 다시 나올 수 있다. 그렇다고 이명박 정권처럼 조급하게 사태를 바로잡으려 해서는 불법파업-해직-인민위원회식 보복의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 완장질의 폐해는 감사와 수사 의뢰로 도려내되 멀리 내다보고 공영언론사의 구조 자체를 개혁해야 한다. MBC 같은 제2의 공영방송은 과잉이다. 연합뉴스와 YTN은 민영화해야 한다. KBS는 보도 기능을 축소하고 단순화해 전쟁과 같은 국가비상사태 시의 보도에 최적화된 시스템으로 바꿔야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이들 공영언론사가 다 없어도 옳은 판단을 하는 데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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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푸틴의 核 위협

    ‘사탄(악마) 2’라고 불리는 러시아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있다. 프랑스 크기 정도의 국가는 한 방에 초토화시킬 수 있는 위력을 갖고 있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사탄이라는 무시무시한 코드명을 붙였다. 러시아에서는 ‘RS-28 사르마트’라고 불린다. 블라디미르함은 스텔스 전략핵잠수함으로 수중발사 ICBM 20기를 싣고 수심 400m까지 내려가 잠항할 수 있다. 장거리 전략핵폭격기 투폴레프-160은 이륙 중량이 270t으로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항공기이면서 가장 빨리 나는 전폭기로 통한다. ▷미국과 러시아는 냉전 해체 이후 상호 합의로 전략무기를 감축해 왔다. 1991년 최초로 전략무기감축협정을 체결했다. 2010년에는 신(新)전략무기감축협정을 체결했고 지난해 5년 재연장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전략무기의 수를 줄이는 대신 전략무기를 현대화하는 방식으로 협정을 우회했다. 2018년에도 최신형 전략무기 6종류를 공개했는데 그중 하나가 ‘사탄 2’이다. 극초음속 미사일로 지상발사용인 아방가르드와 공중발사용인 킨잘도 그때 공개한 전략무기다. ▷‘사탄 2’와 같은 전략핵무기는 실제 사용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억지력으로 존재한다. 그나마 사용 가능성이 거론되는 건 전술핵무기다. 전술핵무기는 보통 20kt 이하의 폭발력을 가진 소형 핵무기를 말한다. 소형이라고 하지만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이 각각 15kt과 21kt이었으니 전술핵무기라도 위력은 엄청나다. 러시아의 전술핵무기를 실어 나르는 대표적 신형 발사체가 이스칸데르-M 미사일이다. 불규칙 기동이 특징으로 북한도 비슷한 것을 개발했다. ▷소련 해체 이후의 러시아는 체첸이나 조지아를 침공할 때 재래식 군사력으로 싸우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유사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전술핵무기 사용이 가능한 쪽으로 군사작전계획의 수정을 거듭해왔다. 이번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은 재래식 군사력만으로 신속한 점령에 난항을 겪자 핵무기 운용 부대에 ‘특별 경계’ 태세 돌입을 명령했다. ▷작계가 어떠하든 푸틴이 말짱한 정신이라면 함부로 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의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푸틴의 정신상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원래 마초적인 데다 20년 넘게 장기집권하면서 권력이 무소불위 수준으로 커지자 자아도취와 과대망상에 빠져 판단력이 떨어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참모들이 견제할 수 있으면 다행이나 독재자 곁에는 늘 독재자를 거스르지 않는 참모들이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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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어퍼컷 대 하이킥

    MZ세대 사이에 현타라는 말이 쓰인다. ‘현실 자각 타임’의 터무니없는 축약어다. 어쨌든 그 말은 망상에 빠져 있다가 자신이 처한 현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을 뜻한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대선에서 이긴다면 며칠 안에 현타가 찾아올 것이다. 윤 후보는 한순간도 청와대에서 집무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그것부터가 더불어민주당의 OK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 대통령 집무실을 꾸리려면 현재 입주해 있는 외교·통일·여성가족부 중 일부가 어디론가 옮겨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정중심복합도시특별법을 바꿔야 한다. 여가부를 폐지하려면 정부조직법을 바꿔야 한다. 모두 민주당이 통과시켜 줘야 한다. 법 개정이 어려우니 외교·통일·여가부를 한쪽으로 밀어버리고 대통령 집무실을 설치할 수도 있겠다. 대통령에 맞는 경호와 보안 시설을 갖추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보수 작업이 필요하다. 테러 가능성에 대비해 집무실에 방탄유리를 설치하고 긴급 사태에 대비한 지하벙커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현실이 알려지면 멀쩡한 청와대를 놔두고 왜 집무실을 옮기느냐는 소리가 높아질 수 있다. 그래도 윤석열 부부가 강행하려 하면 청와대 터가 나쁘다고 여겨 옮기려는 게 아니냐는 무속 논란이 벌어질 수도 있다. 윤 후보는 취임 100일 이내에 대통령 직속 ‘코로나 긴급구조 특별본부’를 설치하고 자영업자 손실보상에 43조 원, 대출 보증기금에 5조 원을 쓰겠다고 공약했다. 재원 조달이 문제인데 그는 국채 발행 없는 세출 구조조정을 언급했지만 현실감 없는 얘기다. 우리나라 예산 규모가 600조 원 정도다. 이 중 반드시 써야 할 고정비를 뺀 재량 사업비는 200조 원 정도다. 재량 사업비도 사회기반시설(SOC) 투자 계획 등에 따라 다 지출이 예정돼 있어 10%를 깎기도 어렵다. 최대 10%를 깎는다고 해봐야 고작 20조 원이다. 병사들에게 월급 200만 원씩 주고, 아이 출산 시 부모에게 월 100만 원씩 1년간 모두 1200만 원을 주고, 노인 기초연금을 월 30만 원에서 40만 원으로 올려주겠다는 공약은 민주당이 받아서 ‘묻고 더블로’ 가버리면 국민의힘보다 더한 민주당의 포퓰리즘에 이용되는 꼴만 되고 만다. 주식양도세 폐지 같은 법 개정이 필요한 공약은 민주당이 반대하니 될 리가 없다. 윤 후보는 법무장관의 수사지휘권을 폐지하고 수사권을 재조정하겠다고 했으나 민주당이 반대하기 때문에 공허한 약속이다. 그러고 보면 윤 후보가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킬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검찰을 통해 문재인 정부의 비리를 수사하는 것밖에 남지 않는다. 윤 후보가 박근혜 정권에 적용한 직권남용죄의 기준을 문재인 정권에 적용하면 기소될 자들이 수두룩하다. 사실 박근혜 탄핵에 앞장선 윤 후보를 박근혜 지지자들이 지지해준 데는 그가 박근혜를 수사한 그 기준으로 문재인도 수사해달라는 암묵적 기대가 담겨 있다. 윤 후보가 그 기대를 저버리면 국민의힘 내에서 이반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이 기대를 충족시키려 하면 민주당과의 동물적 대결이 불가피하다. 윤석열의 어퍼컷과 이재명의 하이킥은 그런 대결의 예고편이다. 민주당은 민노총 등과 연합해 제2의 광우병 사태, 제2의 촛불시위를 일으킬 수 있고 국회 의석을 바탕으로 제2의 탄핵도 추진할 수 있다. 박근혜 탄핵 과정에서 탄핵소추와 심판이 엄밀함을 잃어버려 여소야대(與小野大)하의 대통령은 언제든지 탄핵 위기에 몰릴 수 있다. 민주주의는 과반(majority)의 지배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50% 이상으로 확인되고 있는 것은 정권교체 의지밖에 없다. 그러나 민주당이 국회의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야당 후보가 대선에서 이기는 것은 정권교체의 완성이 아니라 정권교체의 시작일 뿐이다. 이번 경우는 정권교체가 정부 권력만이 아니라 국회 권력을 교체해야 완성된다. 야권 전체가 주도면밀하고 단합된 힘으로 헤쳐가야 할 험난한 2년이 남아 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오만불손해진 국민의힘이 야권연대를 차버렸다. 권력에의 의지를 넘어 권력에의 탐욕을 날것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국민의힘은 80대가 당권을 쥐건 30대가 당권을 쥐건 세대를 넘어서도 변하는 게 없다. 이따위 정당에 정권을 넘겨주려고 국민들이 애썼나 하는 회의가 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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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가짜 깃발 작전

    공산당이나 파시스트가 일으키는 전쟁에서는 가짜 깃발 작전이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 독일이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하기 전날 SS대원 7명이 폴란드인을 가장해 국경 인근의 독일 라디오 송신탑을 장악하고 그 사실을 알리는 방송을 내보냈다. 히틀러는 자국 시설이 공격받았다며 폴란드를 침공했다. 같은 해 핀란드와의 국경에 위치한 한 러시아 마을이 포격을 받았다. 소련은 핀란드군이 포격을 한 것이라며 핀란드를 상대로 겨울전쟁을 개시했다. 포격은 실은 소련 보안기관의 자작극이었는데 소련 해체 이후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비로소 그 사실을 시인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때는 러시아 군복을 입었지만 부대 기장을 달지 않은 사람들이 무장한 채 크림반도와 동부 돈바스 지역에 나타났다. 러시아는 그들이 우크라이나의 지배에 반대하는 러시아계 주민들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러시아 군인들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이번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에 앞서 가짜 영상을 만들어 뿌리는 작전을 펴고 있다. 영상 속에는 돈바스 지역이 우크라이나 정부군의 포탄 공격을 받고 러시아계 주민들이 러시아로 피란하는 모습이 담겼다. ▷가짜 깃발이란 말은 해적들이 상선에 접근하기 위해 그 상선에 우호적인 나라의 깃발을 건 데서 비롯됐다. 가짜 깃발 작전은 나중에 국제해양법에 의해 해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작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단 조건이 하나 있다. 가짜 깃발을 걸고 공격한 직후에는 즉시 진짜 깃발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2014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지금까지도 진짜 깃발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의 국경을 둘러싸고 공격 준비를 끝낸 지금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자극해서 얻을 게 없다. 군사력도 러시아에 비해 턱없이 약하다. 세력 관계에 비춰 우크라이나의 선제공격은 날조다. 그러나 러시아의 자작극 혹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측 도발에 피치 못해 한 대응을 우크라이나의 선제공격인 양 영상을 만들어 보여주면 보는 이들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2014년 러시아의 가짜 깃발 작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번에는 당하고 있을 수만 없다고 판단했는지 러시아가 제작하는 가짜 영상 정보를 사전에 입수해 공개하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러시아가 가스관 폭파 자작극에 이어 화학공장 폭파 자작극까지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스마트폰이 전 세계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시대다. 스마트폰을 통해 한쪽에서는 가짜 영상을 뿌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가짜임을 폭로하고 있다. 누가 하이브리드라고 불리는 이 미래형 전쟁의 승자가 될 것인가.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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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벽을 뚫고 간’ 황대헌

    중국 베이징 겨울올림픽 쇼트트랙 1000m 준결선 경기에서 황대헌 선수가 1, 2위로 앞서가던 중국 선수 2명을 순식간에 제치는 순간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한국인만 애국심 때문에 그런 게 아님은 생중계하던 미국 NBC 방송의 해설자도 놀라면서 ‘교과서적인 (완벽한) 추월’이라는 찬사를 보낸 데서 드러난다. 그러나 황 선수는 그 장면 때문에 실격됐다. 중국 선수들이 그 덕에 결선에 올라 금·은메달을 따자 ‘이따위 경기는 해서 뭐하나. 차라리 보이콧하고 돌아오라’고 할 정도로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누구보다 실의에 빠졌을 사람은 4년간 피땀 흘려 훈련해온 황 선수 자신이다. 그는 기다리던 기자들에게 ‘나중에 얘기할게요’라는 말 한마디를 던지고 믹스트존을 빠져나갔다. 그 이후의 시간을 그가 어떻게 보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날 밤 그의 인스타그램에 글 하나가 올라왔다. 미국 프로농구(NBA) 선수 마이클 조던의 말이다. ‘장애물이 너를 멈추게 해서는 안 된다. 벽에 부닥쳤을 때 포기하고 돌아서지 마라. 벽을 기어오르든, 벽을 뚫고 가든, 벽을 돌아가든 방법을 찾아라.’ ▷다른 사람 같으면 심판을 탓하고 중국을 탓할 시간에 그는 방법을 찾았다. 이틀 뒤 1500m 경기에서 찾은 답을 보여줬다. 그는 뒤쪽에서 기회를 엿보다 결승선을 9바퀴 남기고 치고 나가 순식간에 선두로 올라섰다. 여기까지는 늘 하던 것이다. 이후 9바퀴를 계속 선두에서 도는 건 체력이 바닥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판정 시비를 초래할 접촉을 아예 피하기 위해 그 방법을 택했다. 마지막 바퀴에서 그는 극한의 질주를 하는 듯 다리가 후들거리는 모습까지 보였다. 더 이상 체력이 아니라 분노의 힘으로 달리는 듯했다. ▷그가 금메달을 따자 한국 선수들이 늘 반칙으로 메달을 딴다고 우기던 중국은 야단맞은 학생처럼 조용해졌다. 한국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것 봐라’ 할 여유를 갖게 됐다. 그럼에도 황 선수의 실격 사유인 ‘접촉을 일으킨 뒤늦은 추월(late pass causing the contact)’이 과연 있었는지 국제재판을 통해서라도 끝까지 밝혀야 한다. ▷장애물을 만났을 때 하늘에서 갑자기 뚝 내려오는 사다리 같은 건 없다. 조던처럼 부단히 노력해서 실력을 쌓는 사람에게만 벽을 극복할 길이 보인다. 벽이 나타나면 그 벽을 극복하기 위해 실력을 쌓고, 다시 실력을 쌓다보면 새로운 벽이 나타나도 그 벽을 극복할 길이 반드시 생긴다는 사실을 23세의 젊은이가 보여줬다는 점이 장하다. 그런 정신이라면 어느 분야의 어떤 벽도 극복하지 못할 게 없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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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뫼비우스의 띠에 갇히지 않는 정권교체

    조국 부인 정경심 씨의 자녀 입시 서류 조작이 대법원에서 유죄로 확정됐다. 한 번 하고 마는 표절은 없다. 마찬가지로 한 번 하고 마는 서류 조작도 없다. 한 번 하면 반드시 다시 하게 돼 있는 게 표절이고 조작이다. 7가지 서류 조작이 최종적으로 확인됐다. 그럼에도 조국 부부만 탈탈 털렸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조국 지지자들에게는 그게 불만이었다. 조국에게 분노한 사람들에게도 사실 그게 불만이다. 예전에는 사회적으로 널리 퍼져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비리의 일각이 드러나면 그 밑의 빙산을 파헤쳤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국에게 ‘마음의 빚’ 운운하며 막았다. 그로 인해 사회 전체가 조국 찬반으로 나뉘어 하지 않아도 될 싸움을 했고 좀 더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조국 가족의 비리는 좌파에도 우파에서처럼 똘똘 뭉친 권력 집단이 형성됐음을 보여준다는 심장(深長)한 의미를 갖고 있다. 서민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품앗이 조작이 일부 교수들끼리는, 혹은 일부 법조인들끼리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것이다. 하나의 기득권이 아니라 두 기득권을 그려봐야 한다. 두 기득권 사이에서 핑퐁처럼 오가는 정권교체는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정권교체가 아니다. 조선 영조 때 유수원이란 뛰어난 실학자가 있었다. 그에 따르면 조선은 본래 천민이 아닌 한 누구나 벼슬아치가 될 수 있는 사회였다. 15세기 건국 초만 해도 시골 ‘가붕개(가재 붕어 개구리)’에서 명신(名臣)이 나왔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벼슬아치의 세습성이 높아지기 시작해 17세기에 이르러서는 그 구조를 깨기 힘들어졌다. 조국 사태는 정치적 색깔을 빼고 보면 부모의 권력 네트워크에 의해 자녀의 삶이 결정되는 사회로 접어들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한민국의 사회적 이동성이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해 조선으로 치면 16세기 후반쯤에 와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대선의 정권교체가 기득권 사이의 정권교체가 아니라 기득권을 타파하는 정권교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사이에 벌어지는 대선 경쟁이 진짜 대결이 아니다. 진짜 대결은 지난해 4월 재·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이 국민의힘 밖의 야권과 연대해 서울과 부산의 권력을 교체한 뒤 대선을 혼자 차지하려 하면서 시작됐다. 그 오만불손한 시도는 안철수를 향해 ‘건방지다’고 한 김종인에 의해 스핀오프(spin off)됐다. 김종인의 격세(隔世) 제자 이준석이 젊다는 이유만으로 ‘어쩌다 당 대표’가 돼서는 국민의힘 밖의 윤석열이라는 태풍을 당내로 끌어들여 가두리에 가둔 후 찻잔 속의 바람으로 소멸시키려 했다. 원희룡과의 통화에서 이준석이 ‘그것 곧 정리된다’고 한 말이 그 뜻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윤석열이 국민의힘에 남아있는 구태(舊態) 세력의 대표자인 홍준표와 구태 아버지들에 대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가득 찬 쇄신파의 대표자 유승민을 누르고 대통령 후보로 뽑혔다. 국민의힘에서 정치 신인이 기성 정치인을 제압한 것은 재·보선에 이은 가치 있는 두 번째 승리였다. 파리 떼들은 윤석열에 붙어서 권력을 장악하려 했지만 왕파리는 윤석열의 머리 꼭대기에서 ‘연기’나 시키려다 쫓겨났다. 그러나 어린 왕파리는 여전히 남아서 끝까지 국민의힘 단독으로 정권을 차지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 지금은 윤석열과 어린 왕파리가 휴전한 모양새이지만 국민의힘이 단독으로 정권을 잡으면 윤석열을 포위해 손발을 묶으려 할 것이다. 가치 있는 세 번째 승리는 재·보선의 연대정신을 되살려 정치 신인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된 것을 매개로 국민의힘 안팎이 다시 연대해 대선에서 이기는 것이다. 그래야 뫼비우스의 띠에 갇히지 않는 정권교체가 된다. 대의(大義)를 저버리고 소리(小利)에 집착해 안철수를 불러낸 사람들은 최소한 그에게 물러나라고 말해선 안 된다. 안철수 입장에서 계산하는 정치공학으로는 자진 철수든 단일화든 얻을 게 없다. 이 정치공학의 한계를 깨려면 얻을 게 있는 쪽이 적극적이어야 한다. 이준석이 주장하듯이 국민의힘만으로도 승리에 자신이 있다면 4자 대결로 가면 된다. 다만 높이 멀리 내다보는 국민들은 국민의힘으로의 정권교체에 절실해야 할 이유가 없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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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하이브리드 전쟁

    기습공격으로 전면전을 유발하는 것은 20세기 중반까지도 전쟁을 시작하는 주된 방식이었다.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과 여섯 달 뒤인 12월 일본의 미국 진주만 공습은 소련과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초래한 기습공격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도 북한 김일성의 전격적인 남침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과연 이것이 전쟁의 시작인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방식으로 전쟁이 시작되기 시작했다. ▷2001년 알카에다가 납치한 비행기로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빌딩과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에 충돌했을 때 미국인이 새로운 종류의 전쟁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범죄와의 전쟁’처럼 비유적으로 ‘테러와의 전쟁’으로 불렸던 것은 실제 전쟁이었다. 미군은 곧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로 쳐들어가서 최근에야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고 이라크에는 아직 남아 있다. ▷2006년 제2차 레바논 전쟁은 이스라엘과 레바논이 34일간이라는 짧은 기간에 벌인 전쟁이었지만 하이브리드 전쟁(hybrid war)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열었다. 전쟁과 평화,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경계가 애매모호하고 국적을 뛰어넘어 뒤엉켜 싸운다고 해서 하이브리드다. 제2차 레바논 전쟁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면적 도발보다는 단계가 낮은 로켓포 공격을 하면서 시작됐다. 이스라엘은 공군으로 헤즈볼라의 은신처를 공격했으나 계속 로켓포 공격을 받았고 레바논에 진입해서는 친(親)헤즈볼라 의용군을 상대하느라 힘들어했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동부 돈바스 지역을 장악한 우크라이나 사태도 하이브리드 전쟁의 양상으로 진행됐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친(親)러시아 우크라이나인이 반(反)러시아 정부에 항거해 분리주의 운동을 벌이는 것으로 포장했다. 실제로는 군복에서 부대 기장을 떼어낸 러시아 군인들이 러시아로부터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는 우크라이나 친러시아 반군들과 함께 싸웠다. ▷러시아가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우크라이나 국경 지대에 배치해 다시 우크라이나를 위협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얼마 전 정부 홈페이지가 일제히 해킹 공격을 받아 시스템이 마비됐다. 미국 정보당국은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영토 또는 친러시아 반군이 장악한 우크라이나 동부를 공격하는 가짜 영상을 입수했는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할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무력 사용에 앞서 사이버의 위력을 최대한 활용한 정보전과 선전전을 펼쳐 상대방의 싸울 의지 자체를 꺾는 것 역시 하이브리드로 개념화되고 있는 새로운 전쟁의 수법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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