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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송평인 논설위원입니다.

pisong@donga.com

취재분야

2024-03-27~2024-04-26
칼럼97%
문학/출판3%
  • [송평인 칼럼]세계 시민의 자세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세계 시민’을 언급했다. ‘세계 공화국’과 한 묶음인 ‘세계 시민(weltbürger)’이란 말은 칸트에서 비롯됐다. 칸트가 실제 언급한 것은 세계 공화국이 아니라 민족연합(民族聯合·völkerbund)이다. 하지만 독재가 아니라 공화적 가치가 중심이 된 민족들의 연합은 세계 공화국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20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세계 공화국을 통한 영구평화(永久平和)는 철학에서나 하는 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참사를 겪고 난 뒤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이 탄생했다. 이 명칭은 칸트의 민족연합을 영어로 직역한 것이다. 물론 말만 그럴 뿐이다. 국제연맹도, 그 후신인 국제연합(United Nations·유엔)도 세계 공화국과는 거리가 멀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명백한 잘못에도 유엔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러시아의 거부권 때문이다. 유엔 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이 나머지 국가들에 우월성을 갖는 체제다. 그런 점에서는 19세기 빈 체제나 다를 바 없다. 전승국의 우월성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등 5개국이 상임이사국으로서 갖는 거부권으로 나타난다. 이들 국가는 나중에 핵확산금지조약(NPT)을 만들어 핵무기를 보유할 권리까지 독차지함으로써 우월성의 군사적 토대를 완성했다. 유엔 체제는 정확히는 전승국 중에서도 핵 선제공격으로부터 살아남아 응징할 수 있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세 나라의 핵 균형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핵무기 사용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지만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하는 순간 NPT는 깨지고 NPT가 그 위에 서 있는 유엔 체제도 끝난다. 유엔 체제는 핵전쟁으로는 극복될 수 없다. 핵전쟁은 인류의 전멸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후의 체제가 있을 수 없다. 어렵기는 하지만 핵전쟁을 피하면서 유엔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뒤이은 공산권의 몰락을 초래한 내파(內破·implosion)다. 전쟁과 같은 외부적 힘에 의해 초래되는 외파(外破·explosion)가 아니라 스스로 무너진다는 점에서 내파다. 물론 내파라고 해서 순수하게 스스로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공산권의 내파는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된 봉쇄(containment) 정책의 결과였다. 지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더라도 서방의 제재를 피할 수 없고 또 한 차례의 내파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스스로 무너지던 중국을 수교를 통해 구해주고 세계화에 합류시켜 준 것은 미국이다. 그런 미국이 중국을 상대로 신(新)봉쇄 정책으로 돌아섰다. 군사적으로 아시아·태평양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라고 할 수 있는 쿼드를 출범시키고, 경제적으로는 중국을 배제하고 동맹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공급망을 짜는 움직임이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러시아나 중국이 전술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정밀하고 압도적인 재래식 무기로 초토화시키는 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재래식 군사력의 한계를 드러냈다. 러시아에 대해 상응하는 핵무기를 쓰지 않고도 초토화시킬 수 있다는 미국과 나토의 자신감은 그로부터 왔다. 시진핑이 연임된 후 대만 침공을 시도해도 미국과 아시아 국가의 협력 태세가 확고하면 중국의 전술핵무기 사용 위협에 핵전쟁을 피하면서 대응할 수 있다. 물론 전술핵무기가 아니라 전략핵무기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공멸을 뜻하기 때문에 더 생각할 것도 없고 단지 인간 유전자 속에 새겨진 자멸 본능을 한탄해야 할 것이다. 북한에 대한 제재가 통하려면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봉쇄가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 북한의 핵 도발 역시 중국과 러시아의 핵 도발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때 막을 수 있다.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북한을 다룰 실효적인 궤도에 올라섰다고 할 수 있다. 봉쇄는 봉쇄하는 측에도 고통을 요구한다. 세계가 지금 겪고 있는 경제위기가 그것이다.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를 확보하는 것도 인적 물적 고통을 수반한다. 열정(passion)은 동시에 고통이다. 그 고통을 견뎌낼 각오가 세계 공화국을 준비하는 세계 시민의 자세일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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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괴물 미사일’ 현무-5

    한국형 유도탄인 현무 시리즈 중에서는 현무-1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탄도미사일 현무-2와 순항미사일인 현무-3가 실전 배치돼 있다. 우리나라는 사실 미사일 강국이다. 현무-3의 사거리는 1500km로 이 정도 사거리의 순항미사일은 미국 러시아 이스라엘 한국 정도만 보유하고 있다. 현무-2는 2021년 5월 한미 미사일 지침 해제 전 사거리가 800km로 제한돼 있을 때도 약간의 개량만으로도 중거리미사일로 전환할 수 있었다. ▷현무-4부터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 있다. 탄도미사일인 현무-4는 2017년 미국이 한국의 미사일 탄두 중량 제한을 해제한 이후 개발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t에 불과한 현무-3의 탄두 중량을 2.5t까지 늘린 것으로 추정된다. 현무-5는 ‘괴물’로만 알려져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현무-5가 배치되면 재래식 전력으로도 북한의 핵 공격을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1일 국군의날 기념식에서 8초가량의 흐릿한 탄도미사일 발사 영상이 공개됐다. 그것이 현무-5였다. 군이 이 영상을 정식으로 공개하는 방안을 검토하면서 추정 제원도 나오기 시작했다. 탄두 중량이 무려 8t이다. 한미 미사일 지침이 해제될 때까지 한국이 개발하는 미사일은 사거리 제한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한국은 폭발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탄두 중량을 늘리는 데 집중해 왔다. 그렇게 쌓은 노하우로 현무-5의 탄두 중량을 현무-4보다도 3배 이상 늘렸다. ▷재래식 무기의 폭발력 최대치는 10t 정도다. 탄두 중량 8t이면 세계 최대급이다. 전술핵무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수십 개를 동시에 터뜨리면 핵 배낭과 맞먹는 폭발력을 지닌다. 관통력에서는 재래식 무기가 우수하다. 핵폭탄으로는 지하 50m 정도밖에 뚫을 수 없지만 현무-5로는 지하 100m보다 더 깊은 갱도 속의 표적도 파괴할 수 있다고 한다. 북한 김정은과 군 지휘부의 위치는 한미 정보자산에 의해 감시되고 있다. 김정은이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즉각 현무-5의 표적이 될 수 있다. ▷다만 현무-5를 현 시점에서 정식으로 공개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는 의문이다. 현무-5는 한미 미사일 지침이 해제된 후 개발됐기 때문에 현무-4까지 사거리가 800km로 제한돼 있던 탄도미사일과는 달리 탄두 중량을 줄이면 3000km 이상까지 날릴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정도 사거리면 중거리탄도미사일이다. 중국과 일본으로서는 크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에 맞서 국민의 안보 불안을 잠재울 필요가 있지만 더 적절한 공개 시점을 찾아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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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벨상 받은 ‘헬리콥터 벤’ [횡설수설/송평인]

    ‘불확실성의 시대’(1977년)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가 ‘1927년 대폭락’(1955년)에서 주장한 이후 대공황의 원인으로 상식처럼 굳어진 견해가 투기 과열과 이로 인한 주식시장의 붕괴다. 그러나 밀턴 프리드먼은 1963년 안나 슈워츠와 함께 ‘미국 통화의 역사, 1867∼1960’이라는 책을 써서 대공황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서툰 긴축 통화정책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통화주의의 시작이다. ▷프리드먼의 90세 생일을 축하하는 학술 행사가 2002년 열렸다. 당시 연준 이사였던 벤 버냉키는 그 행사에 참석해 “당신이 쓴 책에 빠져 통화사를 공부했다”면서 “대공황과 관련해 당신이 옳았다. 우리(연준)가 죄송하다. 당신 덕분에 다시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연설을 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2008년 버냉키는 연준 의장으로서 대공황에 버금가는 금융위기가 찾아왔을 때 헬리콥터에서 뿌리듯 돈을 풀어 ‘헬리콥터 벤’이란 별명을 얻었지만 미국과 세계 경제를 구했다. 연준 의장은 대부분 경제학자 출신이지만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건 버냉키가 처음이다. ▷버냉키는 하버드대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MIT는 폴 새뮤얼슨이 1940년대 하버드대에서 옮겨온 이후 케인스주의를 주도했다. 그러나 버냉키가 입학한 1970년대 중반에는 이미 케인스주의에 의문을 품은 시카고학파의 신고전주의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케인스주의에도 반(反)케인스주의에도 동의하지 않고 케인스주의와 신고전주의의 종합을 추구했다. ▷버냉키는 대공황 연구를 거시경제학의 성배(聖杯)로 여겼다. 지질학을 연구하려면 지진을 연구해야 하듯이 경제학을 이해하려면 대공황을 연구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2000년 ‘대공황 연구’란 책을 통해 연준이 주식시장의 투기적 과열에 대한 경계심으로 성급히 금리 인상을 단행하는 바람에 대공황을 격화시켰다는 논거를 집대성했다. ▷그러나 버냉키의 ‘통화주의’는 프리드먼적이라기보다 케인스적이다. 그의 통화주의는 케인스식 재정 부양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재정 부양을 동반한 것이다. 돈을 풀었으면 제때 회수해야 하는데 경기가 다시 침체로 빠져들까 계속 우려하면서 회수를 주저한 태도도 프리드먼적이지 않다. 그가 제때 회수하지 못한 돈이 자산에 거품으로 끼어 있다가 코로나 유행 시 풀린 돈과 함께 인플레이션을 촉발했다는 비판이 있다. 2008년 이후 연준의 통화정책에 대한 평가는 이번 인플레이션이 끝나봐야 객관적으로 내려질 수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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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아니 에르노

    프랑스 여성 작가 아니 에르노가 2008년 ‘Les Ann´ees’를 출간해 프랑스 국내 문학상을 휩쓸 때 파리특파원으로 있었다. 누군가가 이 책이 좋다고 권했고 그때 구입해서 갖고 있다가 2010년 귀국하면서 들고 왔다. 작가가 겪은 크고 작은 사건과 그 단상(斷想)을 무작위로, 다만 연대순으로 나열해 놓은 책이다. 쭉 읽을 필요도 없이 아무 데나 펼쳐 읽어도 좋다. 국내에서는 올 5월 ‘세월’로 번역됐다. ▷프랑스인 친구가 올여름 책을 몇 권 보내줬는데 그중 하나가 에르노의 ‘사건’이다. 책 표지에 ‘최근 인기 있는’이라고 손수 써 놓았다. 이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져 2021년 베네치아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탔다. 그러나 작품 자체는 2000년 출간됐다. ‘최근 인기 있는’이라는 설명은 영화제에서 상을 탄 후 다시 널리 읽히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중에 에르노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에르노는 1940년생으로 프랑스의 신구(新舊) 문화가 충돌하던 1960년대에 20대를 보냈다. 젊은이들은 자유연애에 빠져들었고 그럼에도 낙태가 불법인 사회에서 덜컥 임신하게 된 20대 여학생이 낙태시술을 시도하면서 겪는 심리적 육체적 고통이 ‘사건’의 내용이다. 불법이기 때문에 정보가 차단되고 시술이 비밀리에 행해지기 때문에 원시적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겪는 어려움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낙태천국이라는 한국에서도 활자화되지 못한 얘기를 프랑스 작가의 글로 보는 기분이 묘했다. ▷에르노는 체험한 것만 쓴다는 작가다. 체험을 바탕으로 형상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체험한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쓰는 게 그의 특징이다. 그의 작품은 모두 17권이 번역돼 있는데 2001년 번역된 ‘단순한 열정’ 등 몇 권을 빼고는 대부분 최근 3년간 집중적으로 번역됐다. 자의식이 강한 프랑스 여성이 10대부터 40대까지 겪은, 1950∼1980년대의 오래전 성과 사랑의 얘기가 대부분이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읽히는 측면이 있다. ▷에르노는 일기의 형태로든 뭐로든 기록을 열심히 한 작가인 듯하다. 그런 기록의 나열을 아예 책으로 구성한 것이 ‘세월’이다. ‘세월’은 ‘모든 이미지는 사라질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사라져가는 이미지를 잡으려고 노력한 것이 기록이다. 역사책에 나오는 큰 사건만이 사건이 아니다. 시대의 크고 작은 사건과 그 단상이 모여 시대의 구체적 모습이 드러난다. 그런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역사와 다른 소설의 존재 가치라는 점에서 에르노의 글쓰기는 소설 본연의 의미를 새삼 묻고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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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인플레 방임 정부

    정부가 발표하는 소비자 물가상승률 5∼6%는 체감보다 훨씬 낮다. 서울 도심에서 1만 원 이하 점심을 먹기도 쉽지 않아졌지만 그나마 8000원짜리는 9000원으로 12.5%, 9000원짜리는 1만 원으로 11% 올랐다. 소주 값은 대부분 식당에서 병당 4000원에서 5000원으로 25% 올랐다. 국민 과자 값은 소매점 기준으로 새우깡이 1300원에서 1400원으로 7.6%, 꽃게랑이 1500원에서 1700원으로 13.3% 올랐다. 휘발유·경유 가격은 내가 사는 동네 기준으로 각각 L당 1600원대, 1700원대다. 여전히 둘 다 높은 수준이지만 한때 2000원을 상회하다가 떨어졌다. 무 등 채소 값도 기후 요인으로 높아졌지만 곧 다소 떨어질 것이다. 기름 값이나 채소 값은 오르락내리락한다. 그러나 한번 오른 밥값, 술값, 과자 값은 좀처럼 다시 내리지 않는다. 이 밖에도 한번 오르면 좀처럼 내리지 않는 더 중요한 품목이 많다. 이런 근원 물가가 체감으로 10% 정도 올랐다. 연봉 5000만 원 월급쟁이 기준으로 약 500만 원의 소득이 영구히 감소한 것이다. 정부는 이달부터 적용하는 주택용 도시가스 요금과 가정용 전기 요금을 가구당 평균 월 5400원, 2270원씩 올렸다. 각각 15.9%, 5.1% 인상이다. 전기요금 인상은 올 3번째로 지난해 말과 비교하면 18% 인상이다. 올 들어 급격한 해외 에너지 가격 상승에 따른 인상분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문재인 정부 때 올리지 않은 것까지 한꺼번에 올리는 건 악덕 기업주가 장마철에 하수구로 폐수를 쏟아내는 것처럼 고약한 짓이다. 설혹 한국가스공사와 한국전력공사의 적자가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정도가 돼 가스와 전기요금을 올린다면 정부가 먼저 선심성 공약을 거둬들여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병사 월급을 올해 82만 원에서 내년 130만 원으로 올린다. 또 내년부터 출산 첫해 월 70만 원씩, 1년간 840만 원을 부모급여로 지급한다. 더불어민주당은 노인기초연금을 30만 원에서 40만 원으로 올리는 입법을 추진하는데 윤석열 대통령도 같은 공약을 한 바 있어 거부하기 어렵다. 이 세 가지에만 10조 원이 넘게 들어가며 한 해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매해 들어간다. 병사 월급 200만 원 공약은 올해 82만 원만 해도 이미 다른 징병제 국가보다 많고 병사 월급이 커질수록 초급 간부와의 격차가 적어져 우수 간부 충원이 힘들어지는 자해(自害)성 공약이다. 정부는 출산 휴직자에게 법으로 정해진 월급 100%가 지급되도록 힘써야 하지만 출산 첫해 별도의 부모급여로 1200만 원을 주는 건 유례를 찾기 힘들고 비용 대비 효과도 의심스러운 공약이다. 국민연금과 연계되지 않은 노인기초연금 인상은 국민연금 가입 의지를 꺾는 대(大)재앙이 될 수 있다. 청와대 광화문 이전처럼 충분한 검토가 없었던 섣부른 공약에 돈을 퍼부으면서 적자를 핑계로 공공요금은 거리낌 없이 올리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관리하기는커녕 사실상 방치하는 물가로 인해 내년 각 기업에서 임금인상 요구는 거세질 것이다. 경제학 법칙에 따르면 결국 물가상승분은 시기적으로 지체되지만 임금인상분으로 보충되면서 물가의 뉴노멀이 형성된다. 그때 궁극적 피해자는 자산 없는 현금보유자, 주로 세입자다. 집 한 채 가진 사람에게는 집값은 오르나 내리나 큰 의미가 없다. 내 집이 오르면 다른 집도 오르고 내 집이 내리면 다른 집도 내린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집값이 정점에서 40%가량은 떨어져야 집값이 비정상적 상승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과연 그만큼 떨어질지도 의문이지만 집은 자산이므로 집값은 아무리 내려도 최소한 물가상승분을 반영한다. 그러나 물가가 10% 오르면 5억 원 전세를 사는 사람은 전세를 갱신할 때 수중에 고작 4억5000만 원을 쥐는 셈이 된다. 문재인 정부에서 벼락거지가 된 세입자는 그나마 가진 돈의 가치마저 잃게 된다. 인플레이션이 끝났을 때 양극화는 더 심해질 것이다. 그래서 물가를 억제하는 데 최우선을 두어야 하는데도 정부가 그러고 있는지 의문이다. 말로는 비상 경제시국 운운하면서도 대통령의 나쁜 공약을 지키는 데 매달리고, 말로는 물가 안정 운운하지만 물가와 임금이 다 높아진 나쁜 뉴노멀을 막아볼 생각도 없이 방임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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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김일과 이노키

    흑백 TV 시절인 1970년대 시청자를 열광시켰던 양자 대결 경기로 1977년 홍수환이 파나마에서 카라스키야를 상대로 4전5기의 승리를 거둔 프로권투 경기와 더불어 1975년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키가 장충체육관에서 벌인 프로레슬링 경기를 꼽을 수 있다. 아이들은 100% 진짜인줄 알고 열광했고 어른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열광했다. 이노키는 김일과 싸워 대부분 무승부에 1승 9패를 기록했다. 둘의 경기는 한국에서 열리면 이노키가 악역(惡役)을, 일본에서 열리면 김일이 악역을 맡는 식으로 정한다는 말도 있어 승패에 큰 의미를 부여하긴 어렵다. 프로레슬링은 실력이면서 연기이기도 하다. ▷일본 프로레슬링은 한국계인 리키도잔(力道山)에서 시작한다. 리키도잔에게는 3명의 수제자가 있었으니 자이언트 바바, 김일, 안토니오 이노키다. 셋 다 거구였지만 바바의 덩치가 가장 커 자이언트란 별명이 붙었고 그 다음이 이노키, 김일 순이다. 이노키는 일본에서 태어났으나 중학생 때 부모를 따라 브라질로 이주해 그곳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안토니오란 링네임을 얻었다. 리키도잔은 바바를 후계자로 택했다. 이노키는 실망하고 나중에 바바와 결별했다. 1976년 프로레슬링을 대표해서 프로권투의 최고봉이었던 무하마드 알리와 이종(異種) 대결을 벌였던 사람은 이노키다. 물론 알리는 서서 무릎 밑으로는 주먹을 휘두르지 못하고 이노키는 누워 있기만 해서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경기 중 하나가 되고 말았지만…. ▷턱의 이노키다. 강인해 보이는 턱을 하늘로 치켜들고 주먹을 번쩍 들어올려 ‘다아∼’라고 떠나갈 듯 소리치는 것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는 말재주도 쇼맨십도 좋아서 정계로 진출해 두 차례 참의원에 당선되는 등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이노키는 북한에도 서른 번 이상 방문했다. 그가 북한과의 교류에 힘썼던 것은 리키도잔의 영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리키도잔은 한국계지만 함경도 출신으로 친북 성향이었다. 북한에서도 리키도잔의 명성이 높았고 이노키는 그 덕을 봤다. ▷김일은 리키도잔 밑에서 연습생으로 구박을 많이 받던 이노키를 선배로서 자상하게 대해줬다고 한다. 정치인 이노키는 기본적으로 우익이지만 김일과의 관계를 의식해서인지 한일(韓日) 역사 문제에는 신중한 편이었다. 김일이 말년에 앓아누운 이후로는 거의 매해 한 번씩 방한해 김일을 병문안했는데 2000년 방한했을 때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나눔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일에서 프로레슬링의 열기는 식고 김일은 2006년, 이노키는 1일 세상을 떠났지만 두 사람이 남긴 경쟁과 우정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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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상 최저 찍은 英 파운드 [횡설수설/송평인]

    영국 파운드화는 미국 달러,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유로, 일본 엔화에 이어 4번째로 많이 거래되는 통화다. 그러나 영국은 경제력으로는 독일보다도 작아 유로존 전체에 큰 격차로 뒤떨어지고, 일본처럼 세계 최대 순채권국도 되지 못해 파운드화는 달러 가치 변동에 유로나 엔화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1파운드는 1940년만 해도 4.03달러에 고정돼 있었다. 1949년 브레턴우즈 체제에서 30% 절하돼 2.8달러에 거래됐다. 1960년대 파운드화는 절하 압력을 받아 2.4달러까지 내려갔다. 가장 큰 위기는 1976년에 일어났다. 노동당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로 적자가 커졌다. 금융시장은 파운드화가 과대평가돼 있다고 봤다. 노동당 정부는 파운드화 가치의 자유 낙하를 허용하든가 아니면 긴축을 약속하고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고 결국 후자를 택했다. ▷파운드화는 1985년 1.03달러까지 떨어져 바닥을 쳤다가 보수당 마거릿 대처 총리의 통화주의 정책이 뒤늦게 효과를 보면서 1989년에 1.7달러까지 올랐다. 대처는 1990년 파운드화의 안정을 위해 유럽환율메커니즘(ERM)에 가입했다. 그것은 1파운드를 2.95마르크 주변에 고정시키는 것이었다. 영국 정부가 보유 외환을 풀어 인위적으로 환율을 유지하는 걸 눈치 챈 투기세력의 공세로 환율이 치솟는 사태가 발생했으니 그것이 1992년 9월 16일 ‘검은 수요일’이다. 영국은 ERM에서 탈퇴했다. ▷파운드의 가치가 26일 1.03달러로 폭락했다. 역사상 최저치인 37년 전 1985년과 같은 기록이다. 연초만 해도 1.35달러였으나 연말쯤에는 가치가 더 떨어져 1파운드=1달러 시대가 오리라는 전망이 나온다. 파운드화 폭락은 보수당 리즈 트러스 정부의 대규모 감세안 때문이다. 경제성장을 위해 감세안을 내놓았지만 금융시장은 1970년대 노동당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 정책과 마찬가지로 재정 악화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파운드화를 내다 팔았다. ▷영국이 다시 IMF 구제금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국채금리가 유로존의 병자(病者) 국가인 이탈리아나 그리스보다 높아졌다. 국가부도 위험이 그만큼 더 높아졌다는 의미다. 우리나라는 문재인 정부 때의 늘어난 재정을 유지하고 거기에 더해 감세 정책까지 펴고 있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인데 무역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외인(外人)들이 원화를 팔아치우는 공세가 시작되면 그것이 퍼펙트 스톰이다. 한국 같은 나라가 대비하는 길은 국가부채를 평소 낮게 유지하고 외환보유액을 쌓을 수 있는 만큼 많이 쌓는 것밖에 없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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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푸틴의 국민 동원령

    러시아는 18∼27세 남성들을 대상으로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으나 복무 기간은 1년에 불과하다. 직업 군인은 대우가 좋지 않은 데다 최상층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측근 기업가나 정보 관계자가 장악하고 있어 우수 인력이 드물다. 중요한 것은 사기인데 군인들은 푸틴의 독단에 의해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하르키우 지역을 빼앗기는 등 러시아 쪽 전세가 불리해지자 푸틴은 21일 대국민 TV 연설을 통해 예비군 동원령을 내렸다. 공산주의 시절이나 지금이나 양적 우위와 인해전술로 적을 압도한다는 사고는 변함이 없다. ▷러시아의 예비군은 약 2500만 명에 이른다. 현재 동원이 예정된 예비군은 30만 명이지만 더 늘어날 수도 있다고 한다. 전쟁에서 개죽음을 당하느니 팔이 부러지는 게 낫다고 여겼던지 인터넷에서는 ‘팔 부러뜨리는 방법’ 등의 검색 건수가 늘었다. 징집을 피하려고 인접국으로 향하는 직항 항공편이 동나고 곳곳에서 반전시위가 벌어졌다. ▷푸틴의 논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그동안 전쟁이 아니라 특수군사작전이었을 뿐이다. 우크라이나의 신나치 조직에 위협받는 러시아계 주민의 요청에 따라 그들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명분에 맞지 않게 부대의 정체를 숨기는 Z라는 기장을 사용했다. 이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후 각 지역에 세운 친러시아 공화국들이 합병을 청원하고 러시아는 그 청원을 받아들일 태세다. 합병이 이뤄지면 우크라이나 정부군은 러시아 영토를 공격하는 게 되고 특수군사작전은 전쟁이 된다. 예비군 동원령을 내린 해괴한 논리다. ▷어린 시절 푸틴은 다른 아이들보다 체구가 작았다. 그러나 누군가 자신을 깔보거나 무시하면 달려들어 격렬하게 싸웠고, 물어뜯든 할퀴든 어떤 비열한 방법을 써서라도 반드시 이기려 했다. 게다가 그는 지금 코너에 몰린 쥐 꼴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패배한 것으로 결론이 나면 몰락이 확실하다. 스스로 발을 빼는 걸 기대하기 어렵다. ▷1989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의 철수는 소련의 해체로 이어졌다. 당시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은 전쟁 패배의 인정이 소련의 해체로 이어질지 예상 못 했다. 푸틴은 독일 드레스덴에 파견된 KGB 요원으로 그 과정을 지켜봤다. 그래서 걱정이다. 그러나 소련 해체로 몰락한 것은 러시아나 동유럽 국가 자체가 아니라 그 속의 공산 독재 세력이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진다고 해도 러시아가 몰락하는 건 아니다. 푸틴의 무모한 전쟁을 막을 수 있느냐는 국제사회의 더 일치된 노력과 러시아 국민의 반전 의지에 달려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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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삼청나이트’

    가을밤 서울 삼청동 화랑가에 하루는 전례 없는 활기가 돌았다. 2일 갤러리들이 야간 개장을 했다. 국제갤러리에서는 파티까지 열렸다. 와인과 안주가 무료로 나왔다. 와인을 들고 작품을 감상하기도 하고 갤러리 안팎을 오가며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젊은이들은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기도 했다. 갤러리현대에서는 야외 파티 준비하는 것까지 보고 왔는데 거기서도 파티가 열린 SNS 사진을 나중에 봤다. 전날에는 한남동 갤러리들이 한남나이트를 열었고 이날은 삼청나이트였다. 오래전 이탈리아 밀라노의 디자인 전시회 취재가 떠올랐다. 전시회에 맞춰 곳곳에서 밤 파티가 열렸다. 그때 간 한 파티에 소녀 모양의 와인따개로 유명한 알레시사(社)의 디자이너 필리프 스타르크가 왔다. 동반한 부인의 미니스커트가 너무 짧아 스타르크가 치마 뒤를 손바닥으로 계속 가리던 게 기억에 남아 있다. 세계 각지에서 온 디자인 관계자들은 셀럽 디자이너와 함께한 파티에서 세련된 디자인에 어울리는 멋진 문화까지 체험할 수 있었다. 전시회를 잘 가지 않는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본 전시라고는 어느 로펌 대표가 보고 나서 추천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의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가 고작이다. 월북한 모더니스트 최재덕의 매력적인 그림을 거기서 처음 봤다. 그런데 오랜만에 나무갤러리에서 카톡으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지난달 31일 ‘신홍규 컬렉션’ 전시 프리뷰가 있어 초대한다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간다고 해놓았으나 몸이 좋지 않아 망설이다가 인사나 하고 오자는 생각으로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관객이 북적거렸고 외국인도 적지 않았다. 잠깐 머물렀을 뿐인데도 최정화 등 정상급 미술 작가들이 왔다 가는 게 눈에 띄었다. 갤러리 쪽 말로는 국제아트페어 프리즈(Frieze)에 맞춰 외국 미술 관계자들이 대거 한국을 방문했고 그에 맞춰 국내 미술계도 활기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 프리즈는 스위스 아트바젤, 프랑스 피아크(Fiac)와 함께 세계 3대 아트페어다. 프리즈는 그림을 파는 장(場)이다. 일반인보다는 구매력 있는 VIP를 노골적으로 특별 대우한다. 프리즈가 들어와 국내 고객의 돈을 잠식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그러나 국내 고객도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을 살 권리가 있다. 또 한국에서 아트페어를 연다고 국내 고객만 오는 건 아니다. 중국 일본 등 인근 국가의 고객도 찾아온다. 더 중요한 건 프리즈에 작품을 내놓은 세계 갤러리 관계자들이 1주일가량 머물다 간다는 사실이다. 삼청나이트에 갔다가 학고재에서 강요배 전시를 봤다. 정선의 ‘금강전도’를 연상시키는 ‘중향성(衆香城)’을 사진으로는 봤지만 실제로는 처음 봤다. 계속 보고 있고 싶었다. 그런 그림이면 사고 싶어지고 그래서 아트페어가 있는 모양이다. 외국의 미술 관계자들이 얼마나 많이 이런 그림들을 보고 갔는지 또 그림들을 보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그들이 직접 보는 기회를 갖게 해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나무 갤러리에는 가을밤에 잘 어울리는 테라스 식당이 있다. 그곳을 삼청나이트의 밤 크리스티 경매 관계자들이 통째로 예약해 식사를 했다. 그들도 삼청동 이곳저곳의 갤러리를 둘러봤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프리즈 효과’라고 부르고 싶다. 아시아에는 그동안 홍콩이 파인 아트(fine art)의 허브였다. 중국의 미술 작품이 세계적 인기를 얻고 있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리즈는 홍콩 대신 서울을 택해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아트페어를 열었다. 중국의 강압정치로 홍콩의 매력은 떨어지는 데 반해 K영화 K팝 K드라마에 힘입어 한국의 매력은 올라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은 고급문화의 영역에서도 클래식 음악에서 이미 세계적 수준을 보여줬다. 이제 남은 건 파인 아트다. 프리즈는 일단 5년간 서울에서 아트페어를 연다. 이 기회를 얼마나 잘 활용할지는 국내 미술계의 능력에 달렸다. 미술계는 이번에 ‘아트 파인더’라는 안내센터까지 운영하며 노력했다. 안내센터에 놓인 이헌정의 의자 작품도 멋졌다. 삼청동에 한 달이 멀다 하고 새 카페가 들어서고 있다. 중요한 것은 멋진 거리를 채울 소프트웨어다. 삼청동의 소프트웨어는 미술이다. 전통과 현대가 어울린 삼청동은 아시아의 소호가 될 충분한 자격이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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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금통위가 밥값 하는 길

    금리 인하는 정부 기업 가계 등 모든 경제주체가 환영하는 바다. 금리 인하 시기에 금융통화위원은 ‘누워서 떡 먹기’ 같은 결정을 하면서 3억 원이 훨씬 넘는 연봉에 법인카드, 차량 지원까지 포함해 5억 원에 가까운 실질 보수를 받는다. 나중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해도 책임지지 않는다. 금통위원이 받는 돈만큼 제 역할을 하는 때가 금리 인상기다. 아무도 금리 인상을 원하지 않는다. 기업과 가계는 이자 부담이 늘어 괴롭다. 정부는 경기가 나빠져 지지율이 떨어지니 괴롭다. 금통위로서는 금리 인상을 잘못했다가는 경기 침체를 초래했다는 독박을 쓰게 된다.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 임기는 긴 금리 인하의 시기였다. 금통위는 박근혜 정부 시절 내내 금리를 내렸다. 문재인 정부 들어 금리를 0.25%포인트씩 두 번 찔끔 인상했다가 2019년 7월부터 도로 내리기 시작했다. 2020년 2월부터는 코로나가 돌아 금리를 더 내렸다. 2021년 8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금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금통위는 당연직인 한은 총재와 부총재를 포함해 7명으로 구성된다. 비당연직 5명은 추천과 임명 과정이 그다지 독립적이지 못해 대부분 정부 기조에 순응하는 비둘기파로 구성된다. 두 정부에 걸친 저금리 기조는 비둘기파인 비당연직 위원들이 앞장서고 통상 매파 편에 서는 한은 쪽 인사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기는커녕 마지못한 척하며 따라간 결과다. 다만 문재인 정부 때 집값이 너무 오르면서 정부마저 저금리를 원하지 않자 정부 기조에 맞춰 비둘기파에서 매파로 돌아선 위원들이 있었다. 2021년 8월 금리 인상은 그렇게 시작됐다. 금통위 의사록을 보면 집값이 오를 대로 오른 2020년 7월에도 “통화정책과 부동산가격 가계부채 간 관계에 대한 보다 종합적이고 심층적인 분석이 필요하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는 위원이 있었다. 코로나가 영향을 미치기 전인 2019년 7월에는 “가계부채의 증가와 함께 가계의 소득 대비 가계대출 비율이 사상 최고 수준을 나타내고 있으나 대출 금리가 추세적으로 하락함에 따라 소득 대비 이자 부담 비율은 오히려 과거보다 낮다”는 한가하다 못해 한심한 소리를 하는 위원이 있었다. 일부 위원은 “최근 수년간 물가상승률이 낮아지고 있다. 저물가 현상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며 세계 경제가 돈을 풀어도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는 뉴노멀로 향하고 있다는 듯이 말하기도 했다. 금융은 압력과 부피에 관한 ‘보일의 법칙’처럼 정확해서 뉴노멀이 없다. 뉴노멀은 대개 월가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다. 앨런 그린스펀은 월가가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위험을 잘게 쪼개 팔아 눈에 보이지 않게 분산시킨 것을 골디락스라고 여겼다가 대공황 이후 최악이라는 2008년 금융위기를 초래했다. 벤 버냉키는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헬리콥터에서 뿌리듯이 돈을 풀고도 모자라 양적 완화까지 하며 ‘인플레이션 없는 저금리의 지속’이 가능한 듯 대처하다가 그도 후임자들도 돈을 제때 거둬들이지 못하는 사태를 맞았다. 그린스펀도 버냉키도 무슨 매직이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인플레이션 파이터 폴 볼커가 상대한 1980년 전후의 인플레이션은 일견 석유 파동에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민주당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 공약에 따른 퍼주기와 공화당 리처드 닉슨이 ‘사회정책만은 (표를 얻기 위해) 진보적으로’ 한 결과인 더 많은 퍼주기에 의해 누적된 통화량이 석유 파동을 계기로 폭발한 것이라는 점에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상황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경제학자들이 눈앞의 몇몇 지표에만 매달려 일반인에게도 뻔히 느껴지는 돈의 큰 흐름을 놓치곤 한다. 2008년 금융위기가 오기 전 한은의 기준금리는 5%를 넘었다. 지금 기준금리가 올랐다고 해도 고작 2.25%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수억 원씩 돈 빌리는 걸 만만하게 여겼던가. 돈이 풀린 상태를 뉴노멀로 고착시켜 이익을 지키려는 세력이 경기 침체로 겁주면서 금리 인상에 제동을 걸고 있다. 이번 인플레이션은 볼커 때처럼 경기 침체를 감수하지 않으면 못 잡을 수도 있다. 당장의 경기 침체보다 걱정해야 할 것은 비정상적 저금리가 심연을 파놓은 사회적 간극의 고착화다. 빅스텝은 밀린 숙제를 한꺼번에 하는 것임을 금통위는 명심하라.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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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가뭄이 드러낸 수천 년 유적

    올 6월 이라크 북부 쿠르드 자치구에서는 모술댐이 가뭄으로 수위가 낮아지면서 3400년 전 ‘자키쿠(Zakhiku)’로 추정되는 고대 도시의 유적지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자키쿠는 기원전 1550년부터 기원전 1350년까지 약 200년간 지금의 이라크 북부 지역과 시리아 대부분을 지배했던 미탄니 왕국의 중심지다. 19세기에 독일인 슐리만은 고대 그리스 문화권의 트로이와 미케네 유적을 발굴했고 영국인 레이어드는 고대 아수르(아시리아)의 니나와(니네베) 유적을 발굴했다. 바로 이 니나와가 한때 미탄니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8월 들어 중국도 유례없는 가뭄을 겪고 있는 가운데 양쯔강이 말라 바닥이 드러나면서 약 600년 전인 명나라나 청나라 때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 3개가 발견됐다. 양쯔강은 강이라기보다는 바다라고 할 만큼 크다. 양쯔강은 해구(海丘)처럼 바닥에서 7m 높이로 솟아 있는 바위 언덕을 품고 있었다. 이번에 발견된 불상은 그 바위 언덕 맨 위쪽의 솟은 부분을 깎아 석굴과 함께 만든 것이다. 강을 지나는 배들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 최악의 가뭄으로 스페인에서는 ‘과달페랄의 고인돌’로 불리는 5000년 전 거석 수백 개가 서부 카세레스주의 발데카냐스 저수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고대 켈트족은 유럽의 대서양 연안을 따라 아일랜드로부터 영국 콘월, 프랑스 브르타뉴,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에까지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그런 흔적 중 하나가 거석(巨石) 문화다. 영국에는 스톤헨지, 프랑스에는 카르나크 열석이 있다. 과달페랄의 고인돌은 스페인의 스톤헨지라고 불릴 만큼 신비스러운 모습을 지녔지만 1963년 프랑코 독재 치하에서 인공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안타깝게 물에 잠겼다. ▷이탈리아에서는 포강의 수위가 70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하면서 피에몬테에서 고대 마을의 유적이 나타났다. 롬바르디아 올리오강에서는 청동기 시대 목재 건축물 토대가 나왔다. 로마 티베르강에서는 네로 황제가 건설한 것으로 추정되는 다리 유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르웨이에서는 빙하가 녹으면서 철기 시대 양털 옷과 로마 시대 샌들이 발견됐다. 고고학자들이 바빠졌다. ▷강이 마를 때 강바닥 돌에 사람들이 연도와 이름을 새겨넣은 기근석(饑饉石)이란 게 있다. 엘베강과 다뉴브강 곳곳에서 기근석이 보일 정도이다 보니 수천 년 전 수백 년 전 문화 유적도, 인공저수지에 묻은 유적도,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 때 침몰한 군함과 누군가 몰래 유기한 시신의 유골까지 오만 것이 다 드러난다. 한 길 물속에 비밀이 참 많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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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맨홀 참사

    19세기에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도시는 프랑스 파리였다. 나폴레옹 3세는 복잡하게 뒤엉켜 있고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는 골목길을 대대적으로 정비해 개선문을 중심으로 12개 방향으로 뻗어가는 방사형 도로를 만들었다. 하지만 지상만 봐서는 그가 한 파리 현대화 작업의 절반을 본 것일 뿐이다. 그의 시대에 만들어져 파리의 독특한 관광명소가 된 곳이 하수구다. 현대화된 파리를 떠받치는 시설의 절반은 지하에 있다. ▷맨홀은 농촌에는 없다. 맨홀은 도시에서 지상과 지하를 연결하는 통로다. 사람(man)이 들어가는 구멍(hole)이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프랑스어로도 같은 뜻의 트루 돔(trou d‘homme)이다. 하수도로 통하는 맨홀이 있고 상수도로 통하는 맨홀이 있고 전기통신선이 모여 있는 곳으로 통하는 맨홀이 있다. 맨홀을 통해 사람이 들어가서 이런 것을 점검하고 정비하지 않으면 도시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무심코 지나가는 행인이 열려 있는 맨홀에 빠지는 사고가 세계적으로 보면 심심찮게 발생한다. 그래서 맨홀에 들어가 작업할 때는 안내판을 주변에 설치해야 한다. 맨홀 뚜껑은 아무나 쉽게 열 수 없도록 두꺼운 쇳덩어리로 만들어진다. 두꺼운 쇳덩어리다 보니 팔면 돈이 꽤 돼 도난사고도 간혹 일어난다. 그 경우 도난은 둘째 치고 뚜껑이 없어져 맨홀이 열려있는 상태 자체가 아주 위험하다. 그래서 맨홀 뚜껑에 잠금 장치를 해두기도 한다. ▷최근 집중호우로 서울 강남에서 하천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하수도 물이 역류해 엄청난 수압에 의해 무거운 맨홀 뚜껑이 열리고 지하로부터 물이 솟구쳐 오르는 모습이 이곳저곳에서 눈에 띄었다. 물이 솟구쳐 오를 때도 위험하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순간은 하수도의 수압이 다시 낮아져 지상의 물이 빠져나갈 때다. 마침 그럴 때 한 성인 남매가 맨홀 근처를 지나다가 먼저 누나가 맨홀에 빨려 들어갔고 누나를 구하려던 남동생마저 빠져 들어가는 참사를 당했다. 맨홀에 빠지면 구조가 난망이다. 지하관로로 휩쓸려 가버려 위치 파악 자체가 어렵다. 로봇을 이용한 수색 끝에 남동생의 시신은 다른 맨홀에서 찾았지만 그 누이를 찾는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침수 지역의 한 시민은 열린 맨홀을 쓰레기통으로 막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다. 그것도 맨홀이 보일 때의 얘기다. 물이 깊고 탁해 열렸는지 닫혔는지 알 수 없는 맨홀이 도처에 있을 수 있다. 서울시에 보도에만 11만 개가 넘는 맨홀이 있다. 이 중 하수도 맨홀은 4만여 개다. 침수 순간 4만여 개의 맨홀이 죽음의 구멍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할 뿐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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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논설風의 광화문 戀歌

    서울 광화문광장 자리는 본래 광장이 들어설 자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일대를 인간 친화적으로 만들고 싶었다면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처럼 양쪽 인도를 크게 넓히고 차도를 줄였어야 한다. ‘지상 최대 중앙분리대’ 같은 광장을 만들어 놓고는 광장 구실을 못 하니까 접근성을 높인다고 한쪽으로 치우치게 만들어 놓은 것이 재조성된 광화문광장이다. 건축을 배우지 않아도 유럽 도시들을 여행하다 보면 광장이 어떤 곳인지 저절로 알게 된다. 광장은 본래 텅 빈 곳이다. 광장에는 나무를 심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광화문광장을 처음 조성할 때 세종대로 한가운데 있던 아름드리 은행나무들을 다 뽑아버렸다. 이제 광장에 그늘이 없다고 다시 나무를 심었다. 건축물까지 세웠다. 광장은 반쯤 공원이 됐다. ‘광장이면 어떻고 공원이면 어떤가. 전보다 접근성이 좋아지고 소음도 줄고 쉴 곳도 있어 나아졌다’는 호평이 적지 않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돈을 들였으니 좋아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문제는 지금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광화문 편측 광장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반쪽의 데칼코마니 상(相)이 저절로 그려진다. 광화문 일대 전체가 광장이 되는 모습이다. 박원순 전 시장과 건축 탈레반들이 편측 광장을 설계했을 때 이러한 설계도를 알박기 해놓았다. 그것을 오세훈 시장이 우유부단하게 받았다. 아니 처음 엉터리 광장을 조성해놓은 죄가 있어서 받을 수밖에 없었다. 건축 탈레반과 사실상 한 무리인 문화재 탈레반들은 광화문 현판이 본래 검은 바탕에 흰 글씨임에도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엉터리 복원을 해놓고도 고칠 생각을 않는다. 그러면서 이번엔 광화문 앞 월대 복원을 밀어붙여 그 공사가 한창이다. 광화문 앞 월대는 고종 때 중건된 경복궁에는 있었지만 그전부터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세종 때 ‘중국 사신을 맞으려면 월대가 있어야 한다’는 예조판서의 주장을 세종이 농번기에 민력(民力)을 차출할 수 없다며 거부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설혹 그 얼마간 후에 월대가 지어졌다고 하더라도 중국 사신을 맞기 위한 사대(事大)의 난간을 광화문 앞 직선도로를 비틀어 가면서까지 복원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다. 월대가 복원되면 광장의 치우침이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서울시를 다시 차지할 때 자신들이 알박기 해놓은 치우침을 핑계로 광화문 일대 전체를 광장으로 만들겠다고 덤비는 것이 가능하도록 일이 착착 진행된 셈이다. 새로운 길을 낼 수 있으면 모르되 그럴 수도 없으면서 사람들이 오랫동안 다닌 길을 비틀고 막을 수 있다고 여기는 건 세상에 엄한 게 없는 자들의 발상이다. 우리를 쉬게 해주는 건 광장이나 공원인지 몰라도 우리를 먹고살게 해주는 건 길이다. 광화문에서 지켜야 할 가치 있는 유산 중 하나가 1960년대 미국 차관을 들여와 우리 기술로는 못 짓고 필리핀 기술로 지은 남국(南國)풍의 쌍둥이 건물이었다. 미국대사관과 똑같은 건물이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리에 있었으나 박물관을 개조하면서 그 쌍둥이성(性)을 없애버렸다. 국민이 하기에 따라 한국과 필리핀처럼 국력이 역전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의 교훈과도 같은 건물을 아이로니컬하게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없애버렸다. 광화문 주변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과잉 상태다. 우선 국립현대미술관이 있고 그 분관이 덕수궁 안에도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국립고궁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도 인근에 있다. 옛 풍문여고 자리에는 새로 공예박물관도 들어섰다. 그런데도 송현동 빈터에 이건희 박물관을 짓기로 했다. 여기에 더해 문화체육관광부는 청와대를 베르사유궁처럼 미술관으로 만들겠다고 한다. 광화문에 꼭 필요한 것은 음악당이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은 음향에 한계가 있고 3000석이나 되는 객석은 그 많은 자리를 채울 공연이 많지 않아 장점보다 단점에 가깝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이나 롯데콘서트홀 같은 2000석 규모의 최고급 음악당이 필요하다. 세종문화회관을 전면 개조하든 뭘 하든 광화문광장을 두 번 세 번 고칠 돈이나 새로 미술관을 지을 돈이 있으면 음악당부터 지어야 한다. 문화의 향유자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이런 과잉과 결핍이 왜 서울시장이나 문체부 장관에게는 느껴지지 않을까.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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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김건희 논문, 국민대의 결론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박사과정 때인 2007년 한 학술지에 실은 논문의 제목은 ‘온라인 운세 콘텐츠 이용자들의 이용 만족과 불만족에 따른 회원 유지와 탈퇴에 관한 연구’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적당한 영어 번역으로 ‘A Study on user‘s retention or withdrawal of membership by satisfaction or dissatisfaction in online fortune contents’ 등이 제시돼 있다. ▷논문에 나온 영어 제목은 ‘Use satisfaction of users of online fortune and member Yuji by dissatisfaction and a study for withdrawal’이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게 돼 있다. 회원 유지의 유지는 고유명사처럼 Yuji로 번역됐다. 맨 앞에 나와야 하는 study는 중간에 들어가 있다. 유지와 탈퇴, 만족과 불만족은 상관어인데도 서로 관련 없는 말인 듯 떨어져 있다. 지도교수가 공저자로 참여한 논문인데도 이렇다. ▷김 여사가 같은 해 같은 학술지에 실은 또 다른 논문의 제목은 ‘온라인 쇼핑몰 소비자들의 구매시 e-satisfaction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대한 연구’다. 논문에서 영어 제목은 ‘The Analyze of the affecting factors…’로 시작한다. ‘연구’ 대신 ‘분석’이란 단어를 쓸 수는 있다. 그러나 명사 Analysis로 써야 할 곳에 동사 analyze를 명사형처럼 썼다. ▷국민대는 2008년 김 여사의 박사학위 논문 ‘아바타를 이용한 운세 콘텐츠 개발 연구’를 포함해 이 세 논문은 연구부정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그제 결론을 내렸다. 국민대는 당초 검증 시효가 지났다고 재심사를 거부하다가 문재인 정부 교육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늦게 재심사에 착수했다. 결론은 연구부정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할 때 드는 상투적 이유를 몇 가지 들기는 했으나 그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보다는 검증 시효 5년이 지났다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 ▷김 여사는 공직에 몸담은 사람이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표절 여부를 정색하고 따지는 게 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의 학술지 논문들은 연구부정이냐 아니냐를 따지기 전에 연구자로서의 최소한의 성실성조차 갖추지 못했음을 액면으로도 보여준다. 지도교수가 공저자로 참여한 논문의 지도마저 엉터리로 한 대학이 학위논문 지도나 심사는 제대로 했겠는가. 국민대가 오점을 남기지 않으려다 지워지지 않을 오점을 남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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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부정선거 의혹의 결말

    박근혜 대통령이 더불어민주당(당시 통합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2012년 대선 직후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 부정선거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다. 의혹을 키운 것은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나꼼수)였다. 2020년 총선에서 국민의힘(당시 미래통합당)이 대패한 뒤 부정선거 의혹을 확산시킨 것은 가로세로연구소 공병호TV 등 보수 유튜브들이다. ▷의혹의 중심에는 인천 연수을에 출마했다가 떨어진 민경욱 국민의힘 후보가 있다. 대법원은 그제 민 후보가 제기한 선거 무효 소송을 기각했다. 대법원은 “수많은 사람의 감시하에서 원고의 주장과 같은 부정한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전산기술과 해킹 능력뿐만 아니라 대규모 조직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할 것이나 원고 측은 부정선거를 실행한 주체가 누구인지조차 증명하지 못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부정선거를 실행한 주체가 중앙선관위인지 아니면 제3자인지, 제3자라면 어떤 세력인지 증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민 후보 측은 한 통계학자의 분석을 이용해 본투표에서 민 후보와 이정미 정의당 후보가 얻은 표를 3분의 1씩 덜어 정일영 민주당 후보에게 더해 주면 사전투표 득표율이 나온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본투표 개표 직후 바로 사전 투표 개표를 한다. 참관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누가 어떻게 본투표에서 3분의 1씩 덜어내 바꿔칠 수 있는지 설명이 안 된다. 만약 개표 당일에는 숫자만 조작하고 재검표에 앞서 그 숫자에 맞춰 표를 조작한 것이라면 선관위의 총체적 개입 없이는 불가능하다. ▷신문 방송 등 언론은 대체로 대법원이 판결한 것과 비슷한 이유로 의혹에 거리를 뒀다. 유튜브만 듣는 유권자들은 언론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다녔다. 이들은 그제 판결도 ‘김명수 대법원’의 판결이라며 수긍하지 않고 있다. 현 대법원의 신뢰도가 많이 떨어져 있긴 하지만 보수 정권이 들어선 뒤 판결이 나오고 중립으로 분류되는 천대엽 대법관이 판결의 주심을 맡은 게 그나마 다행이다. 한번 현실을 부정하면 끝없이 현실을 부정하게 된다. ▷선거소송은 원고 측이 입증 책임을 지고 입증하지 못하면 진다. 원고 측이 졌다고 해서 선관위의 잘못이 없었던 것으로 되는 게 아니다. 비록 많은 수는 아니지만 배춧잎 모양이 인쇄된 투표용지는 실수 정도로 치부할 수 없다. 어떻게 나왔는지 추적해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만년도장 대신 일장기 모양이 찍힌 투표용지가 1000장 이상 나온 것은 명백한 투표관리 부실이다. 책임자를 찾아 징계해야 소모적인 의혹이 반복되는 걸 피할 수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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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경찰국 신설은 왜 퇴행인가

    일본에서 경찰을 관리·감독하는 국가공안위원회는 총리 직속이지만 총리에게 위원회에 대한 지휘 권한은 없다. 그래서 위원회를 총리의 간카쓰(管轄·관할)라 하지 않고 총리의 쇼카쓰(所轄·소할)라 한다. 아쉽게도 우리나라 행정용어에는 이런 구별이 없다. 국가공안위원장은 국무대신(우리나라의 장관)이며 5명의 위원은 민간인 중에서 중·참의원 양원의 동의를 얻어 총리가 임명한다. 위원회도 경찰의 사안 하나하나에 대한 사전적 지휘권은 없다. 대강의 방침을 정해 관리하면서 사후적 감찰 등 감독을 주로 한다. 총리의 승인을 받아 고위직 경찰 인사도 한다. 우리나라 국가경찰위원회는 행정안전부 소속으로 위원장은 장관도 아니고 심지어 상임조차도 아니다. 다만 위원회는 경찰청장 동의권 등이 있어 실질적으로 운영한다면 합의체의 기능을 살릴 수 있다. 그러나 위원장을 포함해 7명의 위원 모두 행안부 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기 때문에 정부의 거수기 역할 이상을 하지 못한다. 문재인 정부가 임명한 현 위원회도 위원장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출신 변호사이고 위원 대부분이 중립과 거리가 멀다. 역대 정부는 보수건 진보건 대통령이 청와대 치안비서관의 도움을 받아 경찰청장을 임명한 뒤 경찰청장의 추천을 받아 행안부 장관의 제청을 거쳐 총경 이상 경찰관에 대한 광범위한 인사를 했다. 현 정부가 행안부 내에 경찰국을 신설키로 한 것은 누가 없애라고 한 적도 없는 치안비서관 자리를 스스로 없앤 데 따른 조치이기도 하지만 이유야 어떻든 경찰을 더 철저히 장악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정부 측에서는 국가가 경찰을 통제하지 않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다. 미국의 뉴욕경찰청장 LA경찰청장 등은 시장이 임명한다. 영국에서는 런던경찰청장을 빼고는 주민이 직접 선출한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각 경찰청에 민간인으로 구성된 경찰위원회(police panel)를 두고 경찰을 관리·감독한다. 군대처럼 총을 가진 무장조직인데도 그렇다. 그것은 자치경찰에나 해당하고 국가경찰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맞지 않다. 일본은 국가공안위원회가 자치경찰과 국가경찰을 모두 관리·감독한다. 미국에서 연방수사국(FBI) 등 연방경찰기관의 장(長)은 대통령이 상원의 인준을 얻어 임명하지만 거기까지다. FBI는 법무부 소속이지만 예산 관리 지원만 받을 뿐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영국은 자치경찰인 런던경찰청이 국가경찰 임무까지 수행하는 나라인데 런던경찰청장은 선출되면 중립성을 강화하기 위해 다른 지방경찰청장과는 달리 공무원 신분이 아니라 커미셔너(commissioner)라고 불리는 민간인 신분이 된다. 경찰의 중립성을 보장할 제도가 충분히 갖춰져 있다면 경찰국을 둔다고 누가 뭐라 하겠는가. 영국은 내무부에 경찰을 지원하는 경찰국을 두고 있지만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경찰청장을 주민이 선출하지도 않고 경찰위원회는 거수기 역할밖에 못하고 대통령이 총경 이상 경찰관을 죄다 임명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경찰국 신설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경찰국 신설이 왜 문제인지는 5년 후에 정권이 바뀐다고 생각해보면 분명하지 않은가. 문재인의 더불어민주당 정부는 경찰국 없이도 경찰을 장악해 경찰을 피폐화시켰다. 경찰국의 도움까지 받는다면 그렇지 않아도 방대하지만 앞으로 더 방대해질 경찰도 속속들이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현 정부의 경찰국 신설은 검찰과 경찰이라는 두 마리 사냥개를 몰아 이 정부가 당장 원하는 걸 얻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으나 장기적으로는 큰 후과를 초래할 수 있는 제도적 퇴행이다. 정부는 경찰국 신설을 밀어붙이기 전에 경찰위원회를 실질화하는 법 개정을 제안했어야 한다. 민주당이 응하지 않았다면 경찰국 신설을 추진할 명분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 경찰의 본질에 대한 성찰도, 경찰의 선진화를 위한 그림도 없었고 나랏일은 밀어붙일 게 아니라 정당성에 호소해야 한다는 기본도 몰랐다. 우리나라 경찰위원회는 민주화 과정의 특수한 경험에서 나온 산물이다. 그것은 우리 경찰이 프랑스 등의 국가주의 경찰과 차별화해서 국민에게 보다 밀착한 영미식 경찰에 접근할 씨앗을 제공했다. 역사를 더 전진시키지는 못할망정 후퇴시키는 우를 범하지 말라.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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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다시 만난 창경궁-종묘

    경복궁은 조선 태조가 정도(定都)한 서울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고 가장 먼저 만들어졌지만 훼손이 잦았다. 태종 이후 임금 대부분이 거처했고 옛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은 창덕궁이다. 왕가의 식구들이 많아지면서 창덕궁 옆에 궁궐 하나를 더 지었으니 창경궁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아울러서 동궐(東闕)로 불리던 하나의 궁궐이었다. 창덕궁의 후원은 창경궁의 후원이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 창경궁과 종묘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문으로 이어져 있었다. 임금이 비공식적으로 종묘에 행차할 때는 이 문을 이용했다고 한다. 사자(死者)들의 공간, 그러니까 신위(神位)를 모신 곳에는 문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종묘의 정문은 현판이 없다. 마찬가지로 창경궁과 종묘를 가르는 담장에 있는 문에도 현판이 없다. 다만 궁궐 사람들이 그 문을 북신문(北神門) 북문(北門) 북장문(北牆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을 뿐이다. ▷일본이 1932년 지금의 율곡로를 만들면서 창경궁과 종묘는 분리됐다. 서울시는 율곡로 위에 터널을 만들고 그 위를 흙으로 덮어 창경궁과 종묘를 잇고 어제 개통식을 가졌다. 90년 만의 재연결이다. 물론 담장과 그 한가운데 문도 복원됐다. 다만 단체관람에 화요 휴무인 종묘와 개인관람에 월요 휴무인 창경궁의 입장 체계가 달라 문화재청이 이를 통합하기 전까지 한동안은 담장 사이 문을 통해 종묘와 창경궁을 왕래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운 점이다. ▷그 대신 터널 위로 율곡로의 축선을 따라 만들어진 담장길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창덕궁 돈화문 쪽이나 길 건너편에서 올라 원남동 사거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이미 종묘의 서쪽 담장길인 서순라길, 동쪽 담장길인 동순라길에 카페와 식당이 들어서면서 이곳이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이번에 서순라길과 동순라길을 연결하는 북쪽 담장길까지 열리면서 이 일대가 더욱 활기를 띨 전망이다. ▷건축가들의 숙제 중 하나가 북한산에서 동궐로 이어진 녹지를 어떻게 남산까지 연결하느냐는 것이다. 이번에 녹지가 종묘까지는 이어졌다. 인왕산에서 발견된 산양이 종묘까지 내려올지도 모를 일이다. 종묘 앞에서 남쪽으로 세운상가가 시작된다. 세운상가가 종로 을지로 충무로 일대를 동서로 절단하고 있어 개발을 방해하고 있으니 없는 것으로 여기고 새로 개발하자는 생각과 어쨌든 세운상가가 보존해온 남북축을 활용해 종묘에서 남산까지 녹지공간이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충돌하고 있다. 어려워 보이지만 개발도 하고 녹지공간도 잇는 쾌도난마의 아이디어가 나왔으면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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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한은과 금통위에는 연준 같은 자기반성이 없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자아비판을 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에서 연준 의장을 맡아 헬기로 돈을 뿌리듯 돈을 푼 벤 버냉키는 현 의장인 제롬 파월의 인플레이션 대응이 너무 늦었다고 비판했다. 버냉키의 후임이자 파월의 전임인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물가 상승이 일시적이라고 봤던 게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했다. 연준 바깥에서는 버냉키를 조준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쉬운 돈의 영주들(The Lords of Easy Money)’에는 버냉키 의장 당시 토머스 호니그 캔자스시티 연방준비은행 총재가 이유 없이 큰 폭으로 오른 캔자스시티 농산물 가격을 증거로 들면서 버냉키의 양적완화에 8차례나 반대한 내용이 나온다. 버냉키가 시작했으나 그를 포함해 누구도 끊지 못한 팽창적 통화정책은 자산가격을 필요 이상으로 부풀려서 월가의 탐욕만 채우는 결과를 빚었다. 미국 연준은 자아비판이라도 하지만 한국은행과 금융통화위원회는 자기반성이 없다. 부동산 가격이 상승세로 돌아선 것이 경기 성남시 대장동 개발이 확정된 2014년 무렵이다. 그때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임명됐고 2018년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연임돼 문 정부 말까지 재임했다. 한국을 국내총생산(GDP)보다 가계대출이 많은 유일한 나라로 만든 부동산 가격 상승은 그의 재임 8년에 걸쳐 이뤄졌다. 문 정부의 부동산 실패에 가려져 있지만 실은 박, 문 두 정부에 걸친 부동산 가격 상승의 자락을 깐 것은 한은의 저금리 기조다. 집값이 전셋값과 큰 격차를 벌리며 폭등하자 전세살이를 당연시하던 2030세대까지 주택 구입에 뛰어들었다. 집값이 오른 나라가 우리만이 아니지만 젊은 부부들이 집값의 태반을 빚으로 조달하며 집 사는 데 몰두한 나라가 또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한은과 금통위는 미국 연준을 곁눈질하며 약간 앞서가거나 약간 뒤따라가는 식으로 안이하게 대응했다. 통계청이 내는 소비자 물가지수에는 임차(전월세)에 드는 비용만 들어갈 뿐 자가 소유자가 주거를 위해 지불하는 비용, 즉 주택 구입을 위해 빌린 돈의 이자 비용 등은 들어가지 않는다. 미국 등 주요국에서는 이들 비용도 모두 물가지수에 포함한다. 이런 차이로 우리나라의 물가지수는 낮게 나오고 집값 상승기에는 훨씬 낮게 나온다. 가계대출이 급등하면서 자가 소유자의 주거비도 물가지수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나왔지만 통계청은 무시했고 한국은행은 ‘집은 소비재보다는 자산’이라는 인식을 고수했다. 통계청의 물가지수가 낮게 나오니까 한은은 필요 이상의 저금리를 유지했고 필요 이상의 저금리는 다시 부동산 가격을 부채질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세계 경제를 강타한 인플레이션의 원인은 현금 압박(cash push)만도 아니고 원가 압박(cost push)만도 아니다. 둘이 긴밀히 연결돼 있다. 그동안은 미국 등이 돈을 풀어도 러시아와 중국의 값싼 원자재와 원유를 사는 데 흘러들어가 물가를 올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나 지금은 풀린 돈이 서방 세계에서만 돌고 있다. 신(新)냉전의 추세가 변하지 않는 한 공급망 교란은 피하기 어렵고 물가 상승은 일시적이지 않다. 밀턴 프리드먼의 말대로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통화적 현상이다. 원가 압박처럼 보여도 물가 상승이 일시적이지 않다면 통화적 현상이다. 소비 절약으로는 극복할 수 없고 과감한 금리 인상만이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있다. 한은과 금통위는 인플레이션에 대처하기 위해 파격적으로 금리를 올려야 하지만 스스로 쌓은 가계대출의 후유증 때문에 베이비스텝만 밟고 있다. 가계대출의 대부분은 주택대출이다. 주택대출은 담보가 있다. 금리가 부담되면 주택을 처분해서 조기 상환해도 아직은 큰 이익을 본다. 신용대출은 결정적 타격을 받겠지만 ‘빚투(빚내서 투자)’는 자기 책임 원칙에 입각해 파산이나 회생 절차를 통해 구제하는 수밖에 없다. 다만 전세대출과 자영업자 대출에는 정책적 지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가능한 한 빚 안 내고 성실히 살아온 월급 생활자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준다. 인플레이션 고통과 금리 인상 고통 중에 어느 것을 더 피해야 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인플레이션 고통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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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나 양 가족의 죽음 [횡설수설/송평인]

    어제 전남 완도군 신지도 송곡선착장 인근 바다에서 인양된 아우디 승용차 안에 결국 시신 3구가 발견됐다. 조유나 양(11) 가족 소유의 아우디 승용차가 발견됐다는 뉴스를 처음 들었을 때 세 식구가 몰래 차를 버리고서라도 어디론가 도망가 숨어 있길 바랐다. 설혹 시신이 발견돼도 3구는 아니길 바랐으나 불안한 추측은 현실이 됐다. ▷유나 양 가족은 지난달 30일 오후 11시 신지도의 한 숙소를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가 추적할 수 있는 모든 기록으로부터 자취를 감췄다. 숙소 앞 CCTV 영상에는 유나 양 어머니 이모 씨(35)가 축 늘어진 유나 양을 업은 모습이 보였다. 밤이 늦어서 숙면에 빠진 것인지 수면제라도 먹인 것인지 알 수 없다. 왜 아빠가 아니라 엄마가 아이를 업고 있었을까. 마지막으로라도 엄마가 직접 업고 가고 싶었던 것일까. ▷유나 양 어머니는 퇴실 전 여행용 가방에 쇼핑백까지 챙겨 차에 실었다. 이어 숙소로 들어갔다가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와 꼼꼼히 분리 배출을 했다. 마지막으로 아이를 업고 나와 남편 조모 씨(36)와 함께 차를 타고 숙소를 떠났다. 죽으러 가는 사람이 짐을 다 챙기고 쓰레기까지 꼼꼼히 버리나. 아무튼 경찰 조사에 따르면 차는 9분 뒤 송곡선착장 방파제에서 바다로 뛰어들었다. ▷사진 속의 유나 양은 귀엽게 웃고 있다. 광주에 살던 부모는 유나 양 학교에 지난달 19일부터 이달 15일까지 제주도로 체험 학습을 떠난다는 신청서를 이틀 전인 지난달 17일에 급히 냈다. 유나 양은 그날부터 결석했다. 그로부터 지난달 30일까지 이 가족의 마지막 여행은 어땠을까. ▷학교 측은 체험 학습이 끝나도 유나 양이 등교하지 않고 유나 양 부모와도 연락이 닿지 않아 집을 방문했다. 집 앞에 우편물만 가득 쌓인 것을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 우편물 중에는 신용카드사에 2000여만 원을 변제하라는 법원의 통지서도 있었다. 경찰 수사에 따르면 아버지 조 씨는 광주의 한 전자상가에서 조립 컴퓨터 판매를 했으나 지난해 7월 폐업했다. 주변 사람들은 조 씨가 가상화폐에 투자했다가 실패하고 빚을 졌다고 전했다. ▷안정된 직장이 없는 30대 부부에게 2억 원이란 빚의 무게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빚은 그보다 훨씬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직 젊은 사람이 죽을 생각을 하는가. 그가 완도로 가기 전 인터넷에서 ‘수면제’ ‘방파제 추락 충격’ 같은 단어를 검색하는 대신 죽도록 힘들다고 주변에 소리라도 질렀다면 세 가족을 살릴 수 있었을까. 엄마 아빠와 여행을 떠난다며 좋아했을 아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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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경찰국 신설은 퇴행

    미국 연방검찰과 연방수사국(FBI)은 법무부 소속이다. 그러나 미국 법무부에 한국 법무부의 검찰국에 해당하는 형사국(criminal division)은 있어도 FBI를 관할하는 부서는 없다. 연방검찰은 기소기관이지만 FBI는 수사기관이고, 권력으로부터의 강한 독립성이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건 수사기관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경찰보다 독립성이 강하게 요구되는 검찰 조직도 법무부에 검찰국을 두고 있다”며 행정안전부의 경찰국 신설을 당연시했다. 이 발언에는 검찰을 기소기관에 앞서 수사기관으로 여기는 한국 특수부 검사 특유의 갈라파고스적 인식이 들어 있다. 그러면서도 수사기관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수사기관의 독립에 대한 의식은 이상하리만치 희박하다. 한국 법무부가 검찰국을 두는 것도 검찰이 기소기관이기 때문이다. 검찰이 수사기관이라면 검찰국은 수사의 독립성을 침해하기 쉽다. 한국 검찰도 여건이 허락되는 대로 가능한 한 빨리 직접 수사에서 손을 떼고 예외적으로 수사를 총괄하더라도 직접 수사는 미국처럼 수사기관을 통해서 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법무부 검찰국은 정권의 입맛에 맞게 수사하는 검사를 골라내는 역할에서 벗어나 미국 법무부의 형사국처럼 검사의 기소 활동을 위해 조언하고 지원하는 본연의 임무로 돌아갈 수 있다. 이상민 행안부 장관은 경찰국 신설의 이유로 경찰 권한의 강화를 들었다. 강화되는 건 사법경찰에 속한 수사 권한이다. 행정경찰에 속한 경비나 정보 권한이 강화되면 지휘·감독을 강화하는 게 필요할 수 있겠다. 그러나 수사 권한이 커졌다고 지휘·감독을 강화하겠다는 건 더 독립시켜야 할 것을 오히려 더 종속시키는 역주행이다. 동굴 밖으로 나가 참된 검찰국의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동굴 속의 왜곡된 검찰국의 모습을 정상이라고 여기고 그것과 꼭 닮은 경찰국을 만들지 않고는 불안해서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내무부(행안부의 전신) 소속의 치안본부를 없애고 경찰위원회를 만들었다. 이후 보수든 진보든 어떤 정부도 경찰위원회 자체를 의문시하지 않았다. 물론 경찰위원회는 그동안 그렇게 중립적이지도 않았고 그렇게 효율적이지도 않았다. 경찰위원회의 개선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검찰국 시대가 저물어가자 경찰국 시대를 열어 제왕적 대통령의 영원회귀를 시도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다. 윤 대통령은 한동훈 장관이 있는 법무부에 인사 검증권을 주면서 미국 법무부도 그렇게 한다고 아는 체를 했지만 미국에서 인사 검증은 백악관 법률고문(legal advisor)이 한다. 다만 FBI를 활용해 한다. FBI는 독립적으로 의회와도 일하고 독립적으로 백악관과도 일하고 독립적으로 법무부와도 일한다. 그래서 FBI는 법무부에 소속돼 있지만 독립적이다. 한 장관이 미국의 인사 검증 방식을 배우기 위해 FBI를 방문할 계획이라고 한다. 인사 검증 방식이나 기계적으로 배워오지 말고 FBI같이 독립적인 수사기관은 어떻게 가능한지부터 배워오길 바란다. 행안부에 경찰국 같은 걸 만들어 국가수사본부를 통제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이 생긴다면 중수청을 어느 부처에 두더라도 관할국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 깨닫고 와도 큰 수확이다. FBI가 독립적이라고 하지만 연방검찰에 의해 간접적으로 통제를 받는다. FBI가 특정한 수사기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연방검찰의 허가를 얻어야 하고 피의자를 상대로 승소하기 위해서는 연방검찰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우리나라 검찰의 경찰 통제권은 어느 나라보다 강하다. 기소권만이 아니라 영장청구권도 검사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정부는 수사기관장에 대한 임면권을 보유하고 검찰의 경찰 통제만 지켜보면 된다. 정권의 입맛에 맞는 수사를 원하지 않은 한 그 이상의 통제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이 검찰도 그것을 지휘·감독하는 검찰국이 있는데 경찰을 지휘·감독할 경찰국을 두지 않는 게 가당키나 하냐는 식으로 말하는 나라에서 수사기관이 검찰이 됐든 경찰이 됐든 중수청이 되든 그 독립은 요원하다. 대통령은 국민의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검사들의 대통령이기도 하고 경찰관들의 대통령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아직도 의식은 검찰총장에 머물러 있는 검사 대통령인 듯해 안타깝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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