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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송평인 논설위원입니다.

pisong@donga.com

취재분야

2024-03-26~2024-04-25
칼럼97%
문학/출판3%
  • [송평인 칼럼]샤머니스트 레이디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부인 김건희 씨가 한 유튜브 채널 직원과 주고받은 무속 관련 발언은 씁쓸히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이 직원이 “아는 도사 중 (한 명이) 윤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청와대에 들어가자마자 영빈관을 옮겨야 된다고 하더라”고 하자 김 씨는 그런 생각이 도사들 세계에서는 널리 퍼져 있는 것인 양 그 도사가 누군지도 정말 그런 말을 했는지도 되묻지 않고 “응. 옮길 거야”라고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김 씨는 “이 바닥에선 누가 굿 하는지 나한테 다 보고가 들어온다”고 떠벌렸다. 유튜브 채널 직원이 “홍준표도 굿 했어요?” “유승민도?”라고 묻자 김 씨는 “그럼”이라고 답했다. 홍준표 유승민 둘 다 굿을 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굿의 세계에 참과 거짓의 구별이 중요하겠는가. 그 세계는 효험(effect)만이 중요한 세계다. 그러니 허위 이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적어 넣었을 것이다. 김 씨는 “내가 신(내림)을 받거나 한 건 아닌데 웬만한 사람보다 (점을) 더 잘 본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무당을 많이 만난다는 세간의 소문을 굳이 부정하지 않은 채 “무당이 저를 잘 못 보고 제가 무당을 더 잘 본다”는 말도 했다. 김 씨의 자의식(自意識)은 단순한 무속의 소비자가 아니라 스스로가 무속인이다. 김 씨는 “남편도 약간 영적인 끼가 있거든. 그래서 나랑 연결된 거야”라고 말했다. 손바닥에 ‘왕(王)’자를 그리고 토론에 나오는 건 영적인 끼가 없으면 어렵겠다. 이미 3명의 도사가 등장했는데 그중 무정은 윤 후보도 진즉 알았던 모양이다. 김 씨는 “무정은 남편을 20대 때 만났다. (남편이) 계속 사법고시에 떨어져 한국은행 취직하려고 하니까 ‘너는 3년 더 해야 한다’고 해서 붙었다”고 말했다. 김 씨가 윤 후보를 만나기 전에 알고 지낸 다른 검사의 어머니는 암자 비슷한 걸 차려놓고 점 보는 사람이었다. 굿 하고 점 보는 것 자체를 욕할 건 아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인도 불교도도 샤머니즘적인 신자가 적지 않다. 교회나 절에 다니면서 복을 비는 것과 굿이나 점을 보며 복을 비는 것이 뭔 차이가 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별로 없다. 새벽에 정화수 떠놓고 천지신명께 빌던 어머니들의 정성을 기복(祈福)신앙이라고 비판할 수만은 없다. 굿을 하든 점을 보든, 교회를 다니든 절을 다니든 그런 정성으로 훌륭한 삶을 산다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러나 김 씨는 허위 이력을 적은 서류가 적지 않게 드러났다. 그의 어머니는 은행 통장 잔액을 위조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김 씨는 주가 조작한 도이치모터스에 돈을 빌려준 데 대해 수사를 받고 있다. 그 집안이 검사 사위를 얻는 데 집착한 이유와 무속을 가까이 한 이유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부정한 방법으로 아슬아슬 살아왔으니 늘 불안했을 것이다. 김 씨와의 통화 내용을 공개한 유튜브 채널 직원이 기자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자가 아니니 단순히 취재윤리를 위반한 것이 아니라 사생활로 보호받아야 할 영역을 침해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속한 곳은 위법수집증거라고 해서 사실에 눈감는 법정이 아니라 이면(裏面)의 진실에 관심이 많은 일반 사회다. ‘엎질러진 물’의 책임은 그와 ‘누나 동생’한 김 씨에게 있다. 김 씨가 샤머니즘에 빠졌다는 사실 이상으로 충격적인 건 통화 공개 이후 ‘원더우먼’ 등 영화 포스터에 김 씨 얼굴을 합성하며 ‘걸크러시’하다고 두둔하는 반응이다. 물질주의와 무속의 결합이 김 씨 같은 서울 강남 졸부들에게 이상한 것이 못 되듯 이준석이나 ‘이대남(이십대 대학생 남자)’에게도 그런 것인가. 국민의힘은 이런 반응을 내세워 윤 후보 자신이 그 일부인 샤머니즘의 문제를 뭉개고 넘어가려 한다. 조선 고종 때 민비는 임오군란으로 쫓겨났다가 환궁하면서 박창렬이라는 무녀를 데리고 들어와 국(國)무당으로 세우고 대소사(大小事)를 의논했다. 민비는 그를 언니라고까지 부르며 가까이 했다고 한다. 무녀에게 놀아난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나. 장희빈에 이어 민비, 그리고…. 샤머니스트가 퍼스트레이디가 되는 건 두고 볼 수 없다. 사죄로 퉁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납득할 만한 처리가 있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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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화산 폭발 이후 통가

    남태평양의 외로운 섬나라가 천년 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위력의 화산 폭발에서 살아남아 첫 소식을 전하는 데 사흘이 걸렸다. 통가 정부는 18일 화산 폭발 이후 최대 15m 높이의 거대 쓰나미가 통가를 강타했다고 전했다. 통가는 약 170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뤄져 있고 이 중 36개 섬에 사람이 살고 있다. 다행히 전체 인구의 70%인 10만여 명이 살고 있는 본섬 통가타푸에는 파고가 80cm 정도로 상대적으로 낮았다. 통가 정부가 확인한 사망자는 현재까지 3명이다. 아직 연락이 닿지 않은 섬들이 있어 인명 피해는 늘어날 전망이다. ▷쓰나미로 망고 포노이푸아 등 작은 섬들에서는 주택 대부분이 파괴됐다. 위성을 이용한 일부 통신만이 가능하고 해저 케이블이 파손돼 인터넷 연결이 끊겼다. 섬 대부분이 화산재에 덮이면서 빗물이 오염돼 식수 공급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로 대두했다. 통가에서 가장 가까운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지원 채비를 하고 있으나 통가타푸섬의 국제공항 활주로가 일부는 침수되고 일부는 화산재로 덮여 항공기 착륙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통가인들은 공항의 화산재 청소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화산재가 계속 떨어지고 있어 항공기 착륙까지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도 변수다. 통가는 코로나 청정국이다. 구호가 이뤄져도 바이러스가 유입되지 않도록 신중하게 이뤄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15일 화산 폭발 당시 위성이 찍은 사진을 보면 폭발로 인한 재와 연기가 반경 약 250km로 퍼져갔다, 250km는 서울에서 대구까지의 거리 정도다. 화산이 폭발한 곳은 통가타푸섬에서 65km 떨어진 곳으로 1912년경 한 번 폭발했던 곳이다. 무인도인 훙가하아파이섬과 훙가통가섬이 5km 너비의 화산 분화구를 사이에 두고 연결돼 있었다. 이번에 화산이 폭발하기 2시간 전 분화구가 바닷속으로 푹 꺼지더니 두 섬이 나뉘었다. 폭발은 수면 밑에서 일어났다. 엄청난 폭발력에 두 섬의 일부까지 날아가 버려 두 섬의 높은 지대만이 조금 남아 바다 위로 보이고 있을 뿐이다. ▷2018 평창 겨울올림픽 개회식에서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상의를 벗은 건장한 몸을 과시하며 통가 대표팀 기수 역할을 한 스키 선수가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선수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는 태권도 선수로 출전했다. 통가 피지 사모아 등 폴리네시아 문화권에서는 하카 춤이 유명하다. 보는 것만으로 전율을 느끼게 하는 용사들의 춤이다. 그들이 재난 앞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기를 바라면서 우리도 뭔가 도울 방법을 찾아야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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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중국 인구절벽

    중국은 사람이 바다를 이뤄 전쟁하는 나라였다. 6·25전쟁 때 압록강 인근에 매복했던 중국군은 쓰러뜨리고 쓰러뜨려도 끊임없이 밀고 내려왔다. 인해(人海) 전술에 당황한 국군과 유엔군은 한동안 후퇴를 거듭했다. 중국군은 전쟁 발발 약 4개월이 지나 참전했는데도 공식적으로 밝힌 전사자만 18만 명이다. 300만 명이나 참전했으니 실제 전사자는 더 많을 것이다. 미군 전사자 3만6000명과는 비교도 안 된다. ▷마오쩌둥이 ‘사람이 국력(人多力量大)’이라고 말한 나라가 인구절벽에 직면했다. 중국의 2021년 기준 인구는 전년보다 48만 명 증가한 14억1260만 명이다. 2020년만 해도 204만 명이 증가했는데 그보다 고작 4분의 1 수준으로 증가했다. 마오의 대약진운동 실패에 따른 대기근으로 사상 처음 인구가 감소했던 1961년을 제외하면 최저 수준의 증가다. 추이로 볼 때 올해는 감소가 확실시된다. 대기근 때와는 달리 회복이 어려워 인구가 정점을 지나 내리막길로 들어선 전환점으로 기록될 듯하다. ▷중국이 너무 많은 인구 때문에 산아제한을 실시한 것은 1973년부터다. 처음에는 완시사오(晩希少) 정책이라고 해서 남자는 25세, 여자는 23세 이후로 늦게(晩) 결혼해, 최소 4년 이상의 터울을 두고(希), 2명 이하로 적게(少) 낳도록 권장했다. 1980년 덩샤오핑은 더 강력한 ‘한 자녀 정책’을 추진했다. 이 정책은 권장이 아니라 강제였다. 그 결과 출산율은 급격히 떨어졌으나 인구 감소라는 새 재앙이 자라고 있었다.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중국은 2011년 두 자녀를 허용하기 시작해 최근에는 세 자녀까지 허용했으나 결국 실기했다. 가족과 사회가 하나만 낳아 아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며 키우는 쪽으로 적응해버려 사교육비 등이 크게 늘면서 이제 둘이나 셋을 낳으라고 해도 낳기 어려워졌다. 중국은 앞으로 일할 수 있는 젊은층은 감소하는 반면 고령 인구는 늘어나 성장률 저하를 피할 수 없다.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의 비율이 7%, 14%, 20%를 넘으면 고령화, 고령, 초고령 사회라고 한다. 중국은 2000년 고령화 사회가 됐고 올해 고령 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1970년 고령화, 1995년 고령, 2005년 초고령 사회가 됐다. 고령화로부터 고령 사회가 되기까지의 기간이 일본 25년, 중국 22년이다. 기간이 짧은 중국은 일본이 겪은 이상의 후유증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우리는 2000년 고령화, 2017년 고령 사회가 됐다. 그 기간이 17년으로 중국보다 더 짧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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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정용진 ‘좋아요’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용기 있는 기업인이다. 소셜미디어이니까 희화화해서 어린 시절에 흔히 듣고 쓰던 ‘멸공’이란 표현을 썼을 것이다.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자들이 아닌 한 그 말이 무엇에 대한 비판인지는 누구라도 즉각 알아차릴 수 있었다. ‘멸공’이란 말로 표현된 공산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철 지난 색깔론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외신을 주의 깊게 보지 않은 ‘우물 안 개구리’들이다. 냉전 이후 사라졌던 전쟁이 돌아오고 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은 유럽 쪽에서 우크라이나를 위협하고 있고 중국의 시진핑은 동아시아 쪽에서 대만을 위협하고 있다. 두 전쟁 위협 모두 집안 자체가 뼛속 깊이 공산주의자인 자들이 주도하고 있다. 푸틴의 할아버지는 레닌과 스탈린의 개인 요리사였다. 시진핑의 아버지는 부주석까지 지낸 마오쩌둥의 동지였다.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공산주의는 사라졌는지 몰라도 ‘자유롭고 민주적인 질서’를 위협하는 독재체제로서의 공산주의는 엄연히 살아 있다. 재조산하(再造山河)는 본래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에서 류성룡이 이순신에게 써준 글이다. 세계가 그 성공을 칭송하는 대한민국을 다시 만든다는 주제 넘는 문재인 판 재조산하는 이승만 격하 운동으로 시작됐다. 이승만이 공산화를 막은 것은 그의 모든 과(過)를 상쇄할 공(功)이다. 그러나 1919년을 시점으로 삼은 억지스러운 건국 100주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의 자리는 없었다. 이승만을 제외하고 공산화를 막는 데 기여한 또 한 사람을 꼽으라면 6·25전쟁과 그 전쟁을 전후해 활약한 백선엽 장군이지만 백 장군의 별세에 대통령의 조문은 없었다. 그 대신 자유시 참변에서 민족주의 성향의 독립군 학살을 방조한 공으로 레닌의 표창까지 받은 소련 공산당원 홍범도의 유해 앞에서는 몇 시간을 서서 경의를 표했다. 북한 김여정의 ‘삶은 소대가리의 앙천대소(仰天大笑)’ ‘겁먹은 개의 요란한 짖음’ 같은 조롱에 문 대통령이 대응하지 않은 건 제가 받은 욕 제가 참는 것이니까 알아서 할 일이다. 북한이 우리 돈 170억 원을 들여 지은 남북연락사무소를 파괴했을 때 ‘대포로 (폭파) 안 한 게 어디냐’고 한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발언은 인내의 한계를 시험했다. 김여정이 ‘대북전단 두고 볼 수 없다’고 하자 민주당은 불벼락을 맞은 듯 기민하게 움직여 대북전단살포금지법을 만들었다. 문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방해했다. 이후 사드 추가 배치를 하지 않겠다는 등의 굴욕적인 삼불(三不) 정책을 중국에 약속했다. ‘내로남불’을 주특기로 삼던 그가 중국의 미세먼지에 대해서는 남 탓 대신 제 탓만 했다. 중국 국빈방문에서 10끼 중 6끼나 ‘혼밥’을 하고도, 또 청와대 출입기자가 중국 측 경호원에게 폭행당했는데도 귀국해서는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할 때는 영락없는 조공(朝貢)국의 수장이었다. 지난해 12월 한중(韓中) 간 전략대화에 참석한 인사로부터 들은 얘기다. 중국군 상장 출신의 참석자가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면 본토의 미군이 오기 전까지 주한미군이나 주일미군이 대만으로 이동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이 공격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며 경고했다고 한다. 북한이 한국과 일본을 향해 단독으로 미사일을 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괜히 허구한 날 미사일 발사 시험을 하겠는가. 완전히 무력해지면 경각심도 사라진다. 세계는 우크라이나를 걱정하는데 정작 우크라이나인들은 평온하다고 한다. 애써봐야 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이 미사일을 쏴도 한국은 평온하다. 이스칸데르급 미사일을 쏴도 평온하고 극초음속 미사일을 쏴도 평온하다. 우리도 점점 더 무력감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미국은 다시 중국(China) 대신 중공(CCP·the Chinese Communist Party)이란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기업인이 나서 회사의 리스크를 감수하고 ‘멸공’을 말하겠는가. 정치인들이 비굴하게 입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멸치나 콩을 사서 은근히 지지를 보내는 것으론 부족하다. 멸공이란 표현이 과격하다면 승공(勝共)도 좋다. 정 부회장처럼 기죽지 않고 ‘노빠꾸(no back)’ 하면서 선명하게 말하는 것이 필요한 때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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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팬데믹 창업 러시

    팬데믹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재산을 잃지만 팬데믹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기회가 됐다. 14세기 유럽에서 흑사병이 발생해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죽자 노동력이 부족해졌다.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해서 자유농과 농노의 지위가 높아졌다. 상인들도 장기적으로는 파산한 다른 상인들의 재산을 흡수해 자본 축적을 이룰 수 있었다. ▷코로나 창궐이라는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도 새로운 경제적 기회가 자라고 있다. 미국에서 신규 사업을 위해 세금 관련 서류를 신고한 사람이 지난해 1∼11월 사이에만 497만 명이었다. 이는 팬데믹 이전인 2019년 같은 기간보다 55%나 늘어난 수치다. 지난해 1∼12월 미국 창업기업에는 사상 최대인 930억 달러의 투자 자금이 몰렸다. ▷미국 사례를 들자면 뉴욕 기반의 창업기업 ‘블랭크 스트리트’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커피 체인이다. 푸드트럭 형태로 좌석을 없애 비대면 상황에 적응하면서도 임차 비용을 줄였다. 그 결과 스타벅스 등 대형 체인점에 비해 값은 싸면서도 품질은 괜찮은 커피를 판매할 수 있었다. 20대 청년 2명이 2020년 여름 창업했는데 지난해 벤처 투자자들로부터 3차례나 투자를 유치했다. ▷코로나 시대 인류는 온라인 쇼핑 같은 비대면 산업을 성장시켜 코로나에 위축되지 않고 맞섰다. 우리나라의 온라인 거래액은 2019년 8월만 해도 11조2000억 원이었는데 지난해 8월에는 15조7000억 원이 됐다. 40%가량 증가했다. 온라인 쇼핑과 연결된 배달업에서도 많은 일자리의 기회가 생겼다. 한국은 이 분야에서 가장 앞서가는 나라가 됐다. ▷회사와 직원들은 코로나 기간 중 굳이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아도 업무가 무난히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사는 재택근무를 통해 근무 옵션을 다양화함에 따라 인재 구하기가 수월해졌고 사무실 임차료 등 비용도 줄일 수 있게 됐다. 직원들은 재택근무를 ‘투잡’의 기회로 활용하거나 출퇴근 시간을 아껴 재교육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그런 점은 창업 회사나 그 직원들에게도 똑같이 비용과 리스크를 줄이는 환경으로 작용한다. ▷코로나로 풀린 돈이 투자의 기회를 찾고 있다. 위기는 기회다. 코로나로 실직하거나 영업을 접게 된 경험은 쓰라리지만 기존의 관성적 태도를 버리고 새로운 도전을 모색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전파력이 강력한 오미크론은 병세는 오히려 미약해져 독감처럼 변하면서 팬데믹 종식의 시작이라는 말이 나온다. 동이 트기 전에 가장 어둡다. 어두울 때 밝은 날이 올 것을 믿는 긍정적인 사람들이 성공하는 법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2-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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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문과의 위기 그 자체인 이재명과 윤석열

    우리나라에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이 없을 때 많은 문과생들이 사법시험을 준비하느라 전공 공부를 등한시했다. 로스쿨이 생기자 그런 현상은 어느 정도 사라졌다. 인문사회계열 학생도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한 후 원하면 로스쿨에 갈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문과가 과거 법학 천하였다면 지금은 경영학 천하가 됐다. 요새 문과생의 상당수는 경영학을 부전공으로 택한다. 취업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그렇게 하지만 성격이 완전히 다른 두 가지를 함께 공부하다 보니 둘 다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고 졸업한다. 미국 대학의 특징은 순수학문과 직업 교육을 분리한다는 점이다. 낮은 단계의 직업 교육은 칼리지(college)에서, 높은 단계의 직업 교육은 전문대학원(professional school)에서 한다. 법학과 경영학은 전문대학원에서만 가르친다. 학부에서 순수학문을 한 후에야 계속해서 석·박사 과정을 하든, 아니면 로스쿨이나 MBA 과정에 들어갈 수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델라웨어대에서 역사와 정치학을 공부하고 시러큐스대 로스쿨을 나왔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과 영문학을 공부한 뒤 나중에 하버드대 로스쿨을 다녔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예일대 로스쿨을 다니기 전에 영국 옥스퍼드대로 유학해 철학 정치학 경제학을 공부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1982년 중위권 대학 법대에 학비에 더해 생활지원금까지 받는 장학생으로 들어가 그 대학의 사법시험 합격자 수를 늘려주기 위해 죽어라고 사법시험 공부만 한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악착같은 생존 본능에 법 지식만 갖춘 사람이 됐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다닌 서울대 법대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윤 후보는 9수를 했다고 하니 20대 청춘을 온전히 사법시험에 갖다 바쳤다는 얘기다. 9수가 가능했던 경제적 여유에서 오는 한량 특유의 다방면에 대한 관심은 보이지만 깊이는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문과의 위기는 단지 ‘문송합니다(문과여서 죄송합니다)’로 표현된 그 분야 교수와 학생만의 위기가 아니다. 젊은 시절 인문사회과학적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 정계 관계 재계로 진출해 지도층이 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 전반의 위기다. 우리나라 중산층은 그렇지 않아도 교육비로 허리가 휘고 있는데 고등교육을 4년이 아니라 6, 7년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 감당하겠느냐고 물을 수 있겠다. 물론 대학의 개혁은 공교육의 강화, 장학제도의 확대 등이 동반돼야 한다. 다만 미국만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사회 지도층의 평균 학력 수준이 우리의 석사 수준이라는 현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파리 10대학에서 철학으로 DEA(후에 master로 통합), 파리정치대(Sciences Po)에서 공공정책으로 마스터(master)를 받은 뒤 고위직 공무원이 되기 위한 직업학교(그랑제콜)인 국립행정학교(ENA)를 다녔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6년 과정의 함부르크대 법대를 나왔다. 프랑스 대학에서는 리상스(licence)에 3년, 마스터(master)에 2년이 소요된다. 독일 대학은 학위 구분도 없이 기초과정(Grundstudium)과 본과정(Hauptstudium)으로 나누고 합쳐서 평균 6년이 걸리는 본과정까지를 마쳐야 마기스터(Magister) 같은 최초의 학위를 준다. 중요한 점은 리상스나 기초과정에서 입학생의 절반 정도가 탈락한다는 사실이다. 리상스를 통과하면 대개 마스터 단계까지 간다. 프랑스나 독일에서 ‘대학을 다녔다’ 함은 마스터나 본과정을 마쳤음을 의미한다. 이 나라들에서 대졸은 우리의 석사 수준인 셈이다. 문(文)·사(史)·철(哲)은 단순히 지식을 배우는 학문이 아니다. 인간사의 다양한 측면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함께 진실 추구의 정신을 배우는 학문이다. 그 점이 직업 교육과 다르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어울리지 않은 우리 정치의 부박(浮薄)함은 그런 교육의 부재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누구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누구는 거짓 서류를 밥 먹듯이 꾸민 집안과 연을 맺는다. 문과의 위기는 취업난 정도로 봐서는 해결할 수 없으며 선진국 문턱에 올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대학 제도의 결함으로 봐야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1-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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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세기의 양심’ 투투 주교

    전기차 테슬라, 스페이스X를 만든 일론 머스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이다. 18세가 된 머스크가 인종차별이 만연한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외가 쪽 고향인 캐나다 국적을 취득해 떠난 다음 해인 1990년 넬슨 만델라가 백인인 빌렘 데클레르크 대통령에 의해 석방됐다. 만델라와 함께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철폐를 이끈 단짝이 남아공 성공회의 데즈먼드 투투 주교다. ▷만델라는 1994년 총선을 통해 집권한 뒤 투투 주교에게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 위원장을 맡겼다. 투투 주교는 응징적 정의(punitive justice)가 아니라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의 정신으로 TRC를 이끌었다. 그의 원칙은 첫째 인권침해를 저지른 가해자들의 자백, 둘째 그들의 기소를 면제하는 용서, 셋째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이었다. 자백-용서-배상의 프로세스는 이후 국가적 인권침해와 그 극복을 위한 가이드라인이 됐다. ▷TRC는 친(親)아파르트헤이트 측의 폭력만이 아니라 반(反)아파르트헤이트 측의 폭력도 조사했다. 만델라 지지 세력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행한 고문 등 각종 인권침해 사례도 드러나 ANC의 이미지에 흠이 갔다. ANC가 TRC 보고서에서 자신들의 가해 기록을 삭제하려 하자 투투 주교는 분노했다. 그는 ANC에 대해 ‘어제의 피압제자가 쉽게 오늘의 압제자가 될 수 있다’고 일갈했다. 실제 남아공 정치는 만델라 대통령 퇴임 이후 타보 음베키와 제이컵 주마 대통령을 거치면서 표류했다. 이들의 권력남용 행위가 비일비재했다. 투투 주교는 ANC의 비판자로 돌아섰다. 그는 ‘세기의 양심’으로 불렸다. ▷투투 주교 생애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TRC에서 가해자의 자백을 듣다가 책상 아래로 머리를 파묻고 흐느끼던 모습이다. 흥이 나면 어디서나 자연스럽게 춤을 추는 모습은 백인 성직자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백인 진보주의자들이 보기에는 너무 과격했고 흑인 진보주의자들이 보기에는 너무 온건했다. 공산주의에는 늘 반대했다. 위엄과 흥을 동시에 지닌 지혜로운 지도자가 있었기에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로부터의 전환기를 순조롭게 넘어설 수 있었다. ▷만델라는 2013년 세상을 떠났다. 지난달에는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 기여한 공로로 만델라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마지막 백인 대통령 데클레르크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달 26일 투투 주교가 선종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ANC의 장기 집권을 어떻게 종식시킬 것인가 하는 새로운 과제가 남아 있는 가운데 남아공의 한 시대가 마감됐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1-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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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지체된 과학 대통령의 시간

    얼마 전 노벨상 시상 시즌이 끝났다. 올해까지 일본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 대 한국 수상자는 25 대 0이다. 2015년 20 대 0, 2016년 22 대 0, 2018년 23 대 0, 2019년 24 대 0으로 일본은 한 해나 두 해에 한 번씩 수상자를 내는 데 반해 한국은 0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은 지난해 세계지식재산기구(WIPO) 특허출원 건수에서 독일을 제치고 중국 미국 일본 다음의 4위를 차지한 데 이어 올해도 같은 순위를 유지했다. 이런 순위만 놓고 보면 과학은 몰라도 기술에서는 한국의 성적이 괜찮아 보인다. 그러나 특허출원 건수로 국가의 기술력을 비교하는 건 맹점이 있다. 특허를 유지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한국은 특허출원을 많이 해도 그 유지에 드는 비용을 감수하면서 특허를 장기적으로 유지할 만한 기술은 적다. 핵심 기술은 그런 기술인데 그런 기술은 주로 미국 일본 독일이 갖고 있다. 코로나 사태에서 봤듯이 mRNA을 이용한 첨단 백신은 미국과 독일의 제약회사만 만들어냈다. 특허출원 1위인 중국은 노력했으나 효과적인 백신을 만들지 못했다. 한국의 기술도 원천 기술이라기보다 주로 파생 기술이다. 원천 기술은 과학이 뒷받침될 때 나온다. 한국은 문화에서는 많은 자랑거리를 갖게 됐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데 이어 배우 윤여정이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BTS’에 이어 블랙핑크 에스파 등이 빌보드 순위에 오르면서 비틀스 시대의 ‘영국 침공(British Invasion)’을 연상케 하는 ‘한국 침공(Korean Invasion)’이 이뤄지고 있다. OTT가 상영관을 대체하는 흐름 속에 ‘오징어게임’이 넷플릭스 1위를 차지하면서 세계적인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더니 ‘지옥’이 그 뒤를 잇고 있다. 문화가 발전하는 시기는 대개 과학·기술도 발전하는 시기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 재임 시기는 그렇지 않았다. 문화의 발전에 반해 과학·기술 분야는 뒤처지거나 오히려 후퇴했다. 빌 게이츠도 주장했듯이 탈(脫)원전 정책은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이산화탄소 감축 정책을 방해한다. 문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원전이냐 탈원전이냐는 이항(二項) 대립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연은 연속적이고 과학적 사고도 연속적이다. ‘A 아니면 B’라는 사고 속에는 소형 모듈 원자로(SMR) 같은 ‘보다 안전한 원전’을 위한 자리가 있을 수 없다. 수소차는 원(遠)미래의 차일지언정 근(近)미래의 차는 아니다. 이산화탄소 배출이 없는 ‘그린 수소’를 값싸게 얻으려면 아직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문 대통령은 수소차를 전기차와 비슷한 근미래의 차로 아는 체하다 결국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다. 대통령은 과학을 몰라도 참모가 과학을 알면 될 것 같지만 문 대통령의 사례는 대통령이 과학에 대한 감각이 없으면 과학에 대해 올바른 조언을 하는 참모를 두지도 못하고, 참모가 올바른 조언을 해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걸 보여준다. 1992년 문민정부가 들어섰을 때 우리나라는 이미 정치 이외에 경제를 아는 대통령이 필요했다. 경제를 알기는커녕 경제에 대한 감각도 없는 대통령을 뒀다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는 사태를 맞았다. 4차 산업혁명이란 용어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이란 말로 대체되고 있다. 산업화와 정보화를 결합시키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현상은 스마트폰이 대세가 된 2010년대에 들어와서부터 본격화됐다. 2012년과 2017년 대선은 과학까지 아는 대통령을 뽑았어야 하는 선거였으나 그러지 못했다. 물론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헨리 키신저는 앞으로의 전쟁은 핵무기가 아니라 인공지능(AI) 기술이 승패를 가를 것으로 봤다. 미중(美中) 대립의 시대에 한국이 고슴도치처럼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무기도 과학이다. 이미 두 번의 지체가 있었다. 더 늦기 전에 과학을 아는 대통령, 아니 과학은 잘 몰라도 과학에 대한 감각이 있는 대통령, 아니 과학을 잘 모르고 과학에 대한 감각도 없으면 최소한 괜히 아는 체하면서 간섭하는 것만큼은 삼갈 줄 아는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 문화가 뭘 해줘서 발전한 게 아니라 놔둬서 발전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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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부다페스트 메모랜덤

    1994년 12월 5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미국 러시아 영국 대표가 모였다. 이들은 옛 소련의 핵무기를 분산해 갖고 있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등 세 나라를 핵확산방지조약(NPT)에 가입시키기 위한 문서에 서명했다. NPT 가입의 대가로 이 나라들이 무력침공을 받을 경우 안보를 보장한다는 약속이 들어갔다. 서명 직후 유엔에 제출된 이 문서가 바로 부다페스트 메모랜덤(memorandum)이다. ▷당시만 해도 우크라이나는 미국 소련 다음으로 핵무기를 많이 보유한 나라였다. 물론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갖고만 있었을 뿐 핵무기 발사를 위한 코드 등은 러시아가 통제하고 있었으니 온전한 의미에서의 핵무기 보유국은 아니었다. 이런 이유도 있고 해서 우크라이나는 부다페스트 메모랜덤을 믿고 핵무기를 러시아에 넘겼다. ▷우크라이나가 자국의 안보를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할 움직임을 보이자 러시아가 10만 명에 가까운 군 병력을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에 집결시켰다. 러시아가 내년 초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은 러시아를 향해 강력한 경제제재를 경고했지만 우크라이나에 미군을 파병하는 데는 선을 그었다. 러시아가 2014년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병합했을 때에 이어 다시 한번 부다페스트 메모랜덤이 종잇조각에 불과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메모랜덤의 약자가 흔히 말하는 메모다. 물론 외교적 메모랜덤은 메모이긴 해도 개인이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쓰는 메모와는 다르다. 거기에는 서명한 국가들의 약속이 들어있다. 다만 메모랜덤은 의회의 비준을 필요로 하는 조약(treaty)이나 협정(agreement)과는 달리 법적 구속력을 피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형식이다. MOU(memorandum of understanding·양해각서)처럼 조약이나 협정으로 가기 위한 전(前) 단계로서 작성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와 관련된 주요 메모랜덤으로는 구한말의 가쓰라-태프트 메모랜덤이 있다. ▷국가 간의 조약이나 협정은 당사국의 의회가 비준했기 때문에 조약이나 협정의 불이행은 의회의 의사를 존중하는 국내 세력에 의한 반발에 직면할 수 있다. 그러나 메모랜덤은 그런 것도 기대하기 어렵다. 메모랜덤은 약속을 불이행하는 국가가 불이익을 받게 할 만한 지렛대가 있을 때는 실효성을 갖는다.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넘겨주는 순간 그 지렛대를 잃어버렸다. 따져보면 조약이나 협정조차도 그것을 강제할 기관이 없는 국제사회에서는 무시될 리스크를 안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처한 곤경은 국제 질서의 냉엄한 현실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1-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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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진주만 공습 80년

    7일은 일본의 미국 하와이 진주만 기습으로부터 80년째가 된다.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미군이 평화로운 일요일을 맞아 휴식을 취하는 사이 진주만을 공습했다. 미국 측 함정 16척과 항공기 177대가 파괴됐다. 당시 수장된 애리조나호를 그대로 놔둔 채 그 위에 설치한 기념관에서는 여전히 솟아오르는 기름을 볼 수 있다. 미국은 기습에서 살아남은 베테랑들을 모아 하와이에서 8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퍼레이드를 준비하고 있다. ▷일본이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시작한 후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세계열강의 하나로 인정받기까지 36년이 걸렸다. 다시 러일전쟁 이후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을 공격하기까지 37년이 걸렸다. 그 사이 1910년 한국, 1931년 만주를 차례로 점령하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과 인도차이나로 진출했다. 이에 미국이 일본을 향한 석유와 철강의 수출을 금지하자 일본은 1940년 독일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체결한 뒤 진주만 기습을 강행했다. ▷진주만 기습은 이후 4년간 이어진 태평양전쟁의 시작이다. 미국은 항공모함 3척이 바다에 나가 있어 피해를 면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고 일본은 미 해군 수리시설과 유류 저장소를 미처 파괴하지 않고 돌아간 것이 실수였다. 미국은 남은 전력을 바탕으로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항공모함 4척과 경항공모함 3척을 격침시켜 반격의 계기를 마련했다. 미국인은 진주만 기습을 미드웨이 해전과 연결시켜 시련을 극복한 승리의 역사로 기념한다. ▷태평양전쟁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됨으로써 끝난다. 일본의 항복은 한국의 광복으로 이어졌으니 진주만 기습은 우리에게도 의미가 없지 않다. 특히 진주만 기습 80년을 맞는 올해는 중국이 미국과 대결적 자세를 취하며 동아시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대동아공영권이란 일본몽(日本夢)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동풍이 서풍을 제압한다’는 마오쩌둥 이래의 중국몽(中國夢)이 대신 들어섰다. ▷중국이 1978년 덩샤오핑에 의해 개혁개방 정책으로 돌아서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며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하기까지 30년이 걸렸다. 시진핑은 미군을 중국 연안의 열도에서 몰아내는 군사몽(軍事夢)을 실현할 해로 올해로부터 29년 뒤인 2050년을 잡고 있다. 중국 연안의 열도에는 일본까지 포함된다. 시진핑은 지난해 홍콩을 사실상 본토로 편입하고 올해는 대만해협에서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항공모함에 탑재한 항공기의 기습을 대신해 둥펑(東風) 미사일이 하늘을 나는 일만은 막아야 할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1-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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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上王과 중2병에 걸린 당 대표

    윤석열 씨가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된 후 그의 정치력을 처음으로 평가받았다. 다행히 윤 후보는 김종인 씨에게 굴복하지 않았고 김 씨를 상왕(上王)으로 뒀다는 프레임에 휘말리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2012년 대선에서는 김 씨가 선대위의 원톱 같은 자리를 차지하지도 못했지만 그런 자리를 차지했다고 해도 강력한 파벌을 거느린 박근혜 때문에 전권을 휘두를 수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정치권 밖에서 온 신참자가 대선 후보가 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 씨가 선대위의 원톱을 맡을 경우 상왕처럼 될 수 있다는 우려는 누가 일부러 퍼뜨릴 필요도 없이 누구나 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래서 총괄선대위원장을 견제할 수 있는 상임선대위원장을 둔다는 발상이 나왔을 것이다. 상임선대위원장으로서의 최적임자가 김병준 씨인가 하는 의문은 남아 있다. 다만 그 자리에 누가 오든 김종인 씨와는 생각을 달리하고 그의 독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함은 분명하다. 김병준 씨 외에 누가 더 적임자인가 물으면 딱히 답하기도 쉽지 않다. 김종인 씨는 권력욕이 없는 노인이라서 상왕처럼 될 수 있다는 우려는 지나치다는 사람에겐 한 가지 사실만 상기시키고 싶다. 그는 박근혜 탄핵 후인 2017년 뜬금없이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가 다들 이상하게 여기자 12일 만에 접은 적이 있다. 김 씨를 상왕처럼 모시는 건 과거 쇄신파에서도 보지 못한 ‘김종인 키즈(kids)’의 특징이다. 김종인 키즈 중 현재 가장 큰 마이크를 갖고 있는 건 이준석 대표다. 상왕 프레임은 다른 누가 일부러 퍼뜨린 게 아니라 김종인 키즈가 스스로 만든 것이다. 당 밖에서는 진중권류가 국민의힘은 김 씨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정당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가 더불어민주당을 향해서는 이런 식의 훈수를 둔 적이 없다. 보수 정당과 그 지지자들을 미숙아(未熟兒) 취급하면서 은근히 독재적 리더십을 부추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김영삼 이후 정권을 잡은 보수 정당은 한 번은 친이(親李)계가, 한 번은 친박(親朴)계가 독주하면서 망가졌다. 국민의힘도 이제 어느 한 사람이나 어느 한 세력이 이끌어가는 정당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이 좋은 기회다. 윤 후보는 당내 세력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당의 체질을 협의체적으로, 민주적으로 바꿀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 윤 후보 주변에 벌써 권력의 냄새를 맡고 몰려온 파리 떼가 없지 않다. 탈당했다 돌아온 친이계가 중심이다. 이들은 윤 후보라는 태풍을 국민의힘이란 가두리에 가둔 후 소멸시켜 버리려 했던 이준석-홍준표-유승민 연합군에 맞서 윤 후보가 대선 후보가 되는 걸 도왔으니 전리품을 취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친이계에 대한 반감도 친박계에 대한 반감 못지않게 크다. 한번 믿은 사람은 끝까지 믿는다는 검찰총장 시절 윤 후보의 생활 태도는 훌륭한 것이긴 하지만 사도(私道)와 왕도(王道)는 다르다. 친이계와는 더 확실히 거리를 둬야 한다. 윤 후보는 총괄선대위원장 자리를 비워놓았다. 계속 비워놓는 것이 김 씨에 합당한 예우이자 당의 화합을 위해 노력한 흔적이 된다. 그 흔적은 동시에 김 씨가 끝까지 오지 않으면 몽니의 자국으로 남을 것이다. 김 씨에게 총괄선대위원장, 이 대표에게는 김병준 씨와 동급의 상임선대위원장 자리와 홍보미디어총괄본부장 자리를 줬는데도 이들은 만족하지 못한다. 이 대표는 ‘모든 권력을 김종인에게로’를 외치며 그만두겠다고 생떼를 부리고 있다. 중2병에 걸린 청소년 같다. 권력에 대한 강한 집착이나 당의 주인이 되고 나서도 만년 손님처럼 행세하는 게 김 씨와 비슷하다. 김 씨와 이 대표가 부린 최악의 몽니는 올 4월 재·보궐선거를 압도적 승리로 이끈 야권 연대를 산산조각 낸 것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단일화 없이 끝까지 완주할 뜻을 밝혔다. 안 후보의 지지율이 고작 5% 안팎이기는 하지만 국민의힘이 민주당과 박빙의 대결을 펼친다면 안 후보의 출마가 정권 교체의 성패를 좌우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질 수 있다. 그들의 스텝은 아마도 그때부터 꼬이지 않았을까. 누가 밀지도 않았는데 꼬인 스텝을 밟다가 저절로 넘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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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이재명의 아는 체하는 역사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얼마 전 방한한 존 오소프 미국 상원의원 앞에서 ‘가쓰라-태프트 협약’을 거론했다. 그러나 ‘가쓰라-태프트 협약’은 없다. 비망록 수준의 문서가 있을 뿐이다. 역사는 복잡다단해서 검정고시나 사법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공부하는 국사 정도로는 알아지지 않는다. 1905년 일본 가쓰라 다로 총리와 미국 윌리엄 태프트 육군장관이 서명한 문서는 협약(pact)이나 협정(agreement)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대화를 주고받았음을 ‘서로 확인한 비망록(agreed memorandum)’에 불과하다. 이 비망록은 서명 당시 공개되지 않았다. 1924년에 가서야 타일러 데닛이라는 학자가 우연히 발견해 ‘비밀협약(secret pact)’ ‘행정협정(executive agreement)’이라고 과장했다. 그러나 태프트 장관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전문(電文)의 제목 자체가 비망록일 뿐만 아니라 1959년 레이먼드 에스더스라는 학자가 데닛이 밀약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일부러 뺀 전문 내용들을 복원해 비망록임을 밝혀냈다. 이 비망록이 발견 당시 눈길을 끈 것은 일본은 필리핀에 관심이 없고 미국은 일본의 조선 보호령화에 이의가 없다는 대화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그 의미를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국은 필리핀을 이미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었던 반면 일본은 러일전쟁 후 곧 다시 전쟁을 일으킬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의 필리핀 불개입 보장과 미국의 조선 보호령화 인정 사이에 ‘대가(quid pro quo)’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 후보는 오소프 상원의원에게 일본에 의한 조선의 병합이 미국 탓이라고 말하기 위해 ‘가쓰라-태프트’ 얘기를 꺼냈다. 물론 학자들이 ‘가쓰라-태프트 비망록’의 의미를 축소했다고 해서 당시 미국이 일본 편을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바뀌지는 않는다. 다만 ‘가쓰라-태프트 비망록’은 현상(現狀)의 변경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없었어도 일본에 의한 조선 보호령화는 진행됐을 것이라고 봤기 때문에 그 의미를 축소한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가쓰라-태프트 비망록’ 2개월 뒤 러시아와 일본의 포츠머스 조약을 중재한다. 조선에서 일본의 특수 이익을 인정하는 것이 조약의 주된 내용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포츠머스 조약을 중재한 공로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조선으로서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일본 외의 특정한 나라를 탓하기는 어렵다. 당시는 약소국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강대국 사이의 전쟁을 방지하는 걸 세계 평화의 선결 과제로 보던 시대였다. 미국이 자유세계의 가치를 위해 자국의 희생을 감수하게 된 것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참전부터다. 미국은 1950년 한국에서도 3만7000명의 자국민을 희생하며 싸웠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미국은 고립주의를 바탕으로 철저히 자국 위주의 현실적인 정책을 폈다. 미국만이 아니라 모든 열강이 자국의 손해를 감수한다는 생각은 머릿속에 들어 있지도 않던 시대다. 가까운 시기에 미국이 한국을 위해 싸운 사실은 다 건너뛰고 돌연 다른 시대로 돌아가 자신도 국민 대부분도 잘 모르는 역사 문서를 들먹이며 미국 탓을 하는 대통령 후보가 우리가 보기에도 황당한데 미국 상원의원의 눈에는 얼마나 황당하게 비쳤을까. 오늘날 ‘가쓰라-태프트 비망록’과 포츠머스 조약에서 얻어야 할 교훈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가쓰라-태프트 비망록’과 포츠머스 조약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세계열강 중 하나로 급부상한 데 대한 미국의 대응이다. 지금은 중국이 미국에 맞먹는 강대국으로 등장해 당시와 비슷한 상황을 만들고 있다. 미중(美中) 간 투키디데스 함정을 경고한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교수가 2017년 펴낸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에 따르면 중국의 홍콩 편입과 대만 점령 다음은 한국의 예속화다. 지금 대만 점령 직전까지 와 있다. 반면 미국은 점점 더 자국 우선주의로 돌아서고 있다. 역사 앞에 겸손한 자세로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하고 아는 체나 하고 있다가는 주변 강국에 예속된 구한말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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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상속 유류분 개혁

    사망자가 배우자가 있고 자녀가 둘일 때 첫째 자녀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했다 하더라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 첫째 자녀, 배우자, 둘째 자녀는 2.25 대 0.75 대 0.5의 비율로 상속받는다. 유류분(遺留分) 때문이다. 배우자와 자녀의 유류분은 법정 상속분의 절반이다. 배우자와 자녀 2명이 있을 때 법정 상속분은 배우자 1.5, 첫째 자녀 1, 둘째 자녀 1이므로 유류분은 배우자 0.75, 둘째 자녀 0.5이고 나머지가 첫째 자녀의 차지가 된다. ▷유류분 제도는 농경사회의 잔재다. 농경사회에서는 자녀들이 부모의 생산 활동에 동참한다. 한 자녀에게 전 재산을 물려줄 경우 다른 자녀들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다른 자녀에게도 최소한의 보상을 하는 게 유류분이다. 우리나라는 1977년 유류분 제도를 도입했다. 산업화의 한가운데서 시대착오적으로 농경사회의 잔재를 도입한 측면이 있다. ▷유류분 제도는 유럽 대륙 국가를 중심으로 남아있다. 영미법 계통에는 없다. 유럽 대륙 국가들도 오늘날 사망자 형제자매의 유류분 권리까지는 인정하지 않는 나라가 많다. 법무부는 9일 형제자매의 유류분 권리를 없애는 민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유류분 제도를 개혁했다고 보기 어렵다. ▷산업사회에서는 가족이 함께 생산 활동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녀라고 해서 무조건 유류분을 줄 이유가 없다. 미성년자를 중심으로 평균적인 경제활동 시작 연령 미만의 자녀에게만 유류분을 줘도 취지를 충분히 살릴 수 있다. 그 연령 이상의 자녀는 배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장애가 있는 자녀 등을 예외적으로 포함시킬 수 있겠다. ▷우리나라에서 가업(家業)을 이어가기 어려운 이유가 가업 승계 목적의 상속에 대한 면세 혜택이 적어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자녀들이 유류분 권리를 행사해 지분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류분 제도는 근대적 상속의 제1원칙인 유언의 자유를 제한한다.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유언의 자유를 제약하는 요인은 가능한 한 줄이는 게 좋다. ▷상속은 법정 상속에서 개인 의사를 존중하는 유언에 의한 상속으로, 다시 신탁 등을 이용한 상속으로 발전하고 있다. 신탁 상속은 재산을 신탁회사에 맡겨 관리하면서 상속인에게 어떻게 배분할지 미리 정해 놓았다가 사망 후 배분된 재산의 비율대로 수익금을 취하게 하는 것이다. 엄격한 요식을 요구하는 유언에 비해 유연하고, 효력에 대한 분쟁이 잦은 유언에 비해 확실한 상속 방법이다. 다만 미국처럼 유류분 제도가 없어야 발전할 수 있다. 유류분 제도의 더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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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오·덩 반열 오른 시진핑[횡설수설/송평인]

    8일 시작돼 11일 끝나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가 주목을 받는 건 여기서 ‘역사(歷史) 결의’란 걸 채택하면 시진핑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장기 독재까지는 한 단계만 남기 때문이다. 남은 한 단계는 시진핑 집권 10년이 되는 내년에 열리는 새로운 회차의 공산당 대회다. 제20차가 되는 이 공산당 대회에서 시진핑이 세 번째 당 총서기로 선출되면 국가주석직에도 연임되면서 장쩌민 이래 중국 지도자의 ‘10년 집권’ 관행이 깨진다. ▷약 3000명의 대표가 참석하는 공산당 대회는 약 200명으로 구성된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가 좌우하고,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는 약 25명으로 구성된 중앙정치국이 좌우하고, 중앙정치국은 당 총서기를 포함한 7인 상무위원이 좌우한다. 당 총서기인 시진핑이 권력을 강화하면서 상무위원들의 집단지도체제도 유명무실해졌다. 상무위원들의 결정은 시진핑이 좌우한다. ▷시진핑의 권력 강화는 그의 집권으로부터 5년이 지난 2017년부터 가시화했다. 장쩌민 시대에는 덩샤오핑이 지정한 후진타오가 후계자로, 후진타오 시대에는 장쩌민이 지정한 시진핑이 후계자로 집권 5년이 지나 부상했다. 후진타오는 2017년 시진핑을 이을 후계자를 지정하지 못했다. 시진핑이 막았다고 볼 수 있다. 격대지정(隔代指定) 원칙이 깨진 것이다. 시진핑 집권 10년이 되는 내년에도 후계자가 부상하지 않으면 시진핑의 집권은 15년을 넘어 20년까지 이어질 수 있다. ▷시진핑을 마오쩌둥 덩샤오핑과 같은 반열에 올리는 공작은 여러 단계에 걸쳐 진행됐다. 2017년 제19차 공산당 대회의 결정에 따라 제19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가 소집돼 공산당 당장(黨章)에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을 삽입했다. 2018년 국가 입법 기구인 전국인민대표대회는 헌법(憲法)에서 ‘국가주석직 3연임 제한’ 조항을 삭제했다. 지금 열리고 있는 제19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에 앞서 공산당은 100년사를 펴냈다. 그 속에 시진핑 관련 내용을 마오쩌둥 덩샤오핑과 비슷한 분량으로 기록했다. ▷공산당 대회에서 역사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결의가 채택되는 건 이번이 세 번째다. 1945년 역사결의에는 마오쩌둥 사상을 중심으로 단결과 통일의 필요성을 담았다. 1981년 역사결의에는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노선을 확고히 하는 내용을 담았다. 2021년 역사결의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담길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미중(美中) 대결 시대에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의 역사적 당위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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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김종인과 이준석이 불러낸 안철수

    안철수의 대선 출마가 정권 교체의 길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안철수를 다시 불러낸 것은 김종인과 이준석이다. 김종인은 올 4월 재·보선이 끝난 후 안철수를 향해 ‘건방지다’고 말했다. 안철수가 ‘재·보선은 야권의 승리’라고 말한 데 대한 반응이다. 재·보선은 안철수가 마련한 야권의 승기를 국민의힘이 조직의 힘으로 가로챈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안철수도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피눈물을 삼키며’ 오세훈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김종인은 고마움을 표하기는커녕 막말로 응답했다. 정치인의 절제를 말하기 전에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준석은 ‘어쩌다 국민의힘 대표’가 돼서는 그 자리를 이용해 침묵하는 안철수를 계속 건드리면서 안철수와 선거에서 붙을 때마다 진 패배에 대한 뒤끝을 작렬시켰다. 최근에도 “안철수와 결별한 지도자는 대통령이 되고 통합하려 노력한 지도자는 고생한다”고 깐죽거렸다. 안철수를 자극하기만 할 뿐 누구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늙거나 젊거나 간에 제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자들이 연이어 국민의힘을 이끌고 있다. 재·보선에서 야권이 압도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정치권에서는 국민의힘과 안철수가 뜻을 모으고 바깥에서 윤석열이 지원하면서 전(全) 보수·중도 진영이 정권교체의 기치 아래 단합했기 때문이다. 그 단합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김종인이다. 김종인에게 재·보선은 야권이 권력을 되찾느냐 마느냐의 문제 이전에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끝나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그는 안철수의 서울시장 출마 선회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국민의힘이 서울시장을 차지하지 못할 경우 국민의힘을 이끄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끝날 수밖에 없었다. 오세훈의 승리는 김종인의 머릿속에서는 자신과 국민의힘의 승리일 뿐이지 야권의 승리가 아니다. 그것을 안철수가 야권의 승리라고 하니 저도 모르게 ‘건방지다’는 말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재·보선은 누가 봐도 단합된 야권의 승리였다. 반문(反文) 유권자들에게 오세훈과 안철수의 단일화에서 누가 되든 큰 차이가 없었다. 오세훈이 아니라 안철수가 더불어민주당의 박영선과 붙었더라도 승리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안철수가 서울시장이 됐다면 국민의힘과 중도파가 더 단합된 분위기 속에서 대선을 준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김종인의 막말에 이어 야권 단합의 분위기를 꺾은 것은 윤석열의 국민의힘 조기 입당이다. 정치 적응을 위한 절대적 시간이 부족했던 윤석열은 국민의힘 밖에서 안철수 등과 힘을 모았다가 단일화를 꾀했어야 했다. 정작 대선은 남 일처럼 보면서 자기 치적이 될 국민의힘 경선 흥행에만 몰두한 이준석에게 놀아나 조기 입당을 선택하는 바람에 주위에 권력의 냄새를 맡은 똥파리들이 잔뜩 몰려들어 정권교체의 대의(大義)는 후퇴하고 권력투쟁만 부각됐다. ‘구라’와 정치적 발언을 구별하지 못하는 윤석열을 보면서 중도적인 유권자들은 망설이게 됐다. 그것이 안철수가 움직일 여지를 열어줬다. 김종인의 정치적 승리는 이상하게도 늘 나라의 실패로 이어졌다. 그가 한번은 박근혜의 당선을 도와, 한번은 문재인의 재기를 도와 킹메이커로 불리게 됐지만 나라는 두 대통령의 임기를 거치면서 잃어버린 10년으로 빠져들었다. 오세훈의 서울시장 당선도 당장은 김종인의 정치적 승리로 보였다. 그러나 김종인이 승리를 독차지하기 위해 분열을 조장하고 윤석열이 국민의힘에 조기 입당하고 안철수가 대선 출마를 선언함으로써 재·보선을 승리로 이끌었던 야권 단합은 완전히 사라졌다. 인간사 흔히 성공한 그것으로 망하기도 하는 법이다. 이제 와 안철수에게만 수(手)를 물리라고 할 수 없다. 진보 진영은 민주당과 정의당이 같이 나온다. 정의당이 나온다고 문제 삼는 사람은 없다. 판이 바뀐 이상 중도·보수 진영도 국민의힘과 안철수가 같이 나오는 것이 정상적이다. 그걸 문제 삼는 쪽이 이상하다. 안철수에게 더 이상 스스로 당선될 힘은 남아 있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를 떨어뜨릴 힘은 있다. 안철수가 이번에는 독심을 품은 듯하다. 안철수를 그렇게 만든 건 김종인과 이준석이다. 안철수 정도는 극복할 수 있다고 자신(自信)했으니 그랬을 것이다. 자신인지 자해(自害)인지 두고 보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1-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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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고담시장’ 이재명

    성남은 특별한 시군 기초자치단체다. 서울 강남에 인접한 배후지역이라는 위치 덕분에 강남 다음으로 아파트 값이 비싼 판교와 분당이 있고 실리콘밸리 같은 판교 IT 단지도 있다. 지방세만으로도 세수가 넘쳐 국가나 경기도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다시피 하니 간섭도 거의 안 받는다. 그래서 시장의 권력이 막강한데도 지방이라서 언론의 감시도 소홀하다. 이재명 경기지사는 2010년 성남시장이 되자마자 ‘모라토리엄(지불유예) 선언’을 했다. 전임 시장이 호화 시청사를 짓느라 돈을 펑펑 쓰긴 했지만 재정자립도가 그보다 훨씬 못한 지자체도 모라토리엄을 선언해 본 적이 없다. 정작 돈을 받아야 할 국가 측은 한 해 수백억 원씩만 갚으면 된다는데 돈을 줄 쪽이 오히려 수천억 원 빚 타령을 하며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그리고 3년 뒤, 있지도 않던 모라토리엄 위기를 극복했다고 자찬하더니 이후로는 넘쳐나는 세수에다 경기도의 가난한 시군으로 가야 할 돈까지 움켜쥐고 ‘나 홀로 퍼주기 복지’를 하면서 경기지사와 대통령으로 가는 정치적 가도를 닦았다. 대장동 개발은 그의 2014년 재선 이후 본격 추진됐다. 그는 자신은 100% 공영개발을 고집했지만 국민의힘 시의원들이 반대해 못 했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그의 재선 이전에는 타당하지만 재선 이후에는 더불어민주당 시의원이 다수를 점했기 때문에 거짓말이다. ‘두 번 담그기(double dipping)’란 말이 있다. 한 번은 공영개발에 담가 저가에 토지 수용을 한 뒤 또 한 번은 민간개발에 담가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대장동 민간개발을 주도하다 이 지사에게 사업권을 뺏긴 업체에 따르면 민간개발만으로는 예상 수익이 3400억 원이었지만 관이 개입해 토지 수용에서만 6000억 원의 이득이 더 났다. 손해는 원주민 몫이었다. 이 지사는 100% 민간개발보다 더 탐욕적인 방식을 택하면서 자신의 임기 중 손에 쥘 확정 금액에만 정신이 팔려 민간업체 초과이익 환수 조항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나중에 막대한 민간업체 이익을 보고 그 일부를 빼돌리려 했는지는 다음 얘기다. 무능이냐 부패냐가 아니라 무능 기본에 부패 추가가 어느 정도인가의 문제일 뿐이다. 배트맨 시리즈에는 고담시라는 가상 도시가 나온다. 성남시는 이 지사 재임 이후 선량들 위에 약탈자들이 활개 치는 고담시를 닮아갔다. 이 지사, 정진상 캠프 부실장 다음의 ‘넘버3’였다는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사장 직무대리는 대장동 설계를 지휘하면서 실무를 담당한 변호사(남욱)와 회계사(정영학)의 뺨을 후려갈길 정도였다. 이 지사가 성남시장에 출마할 때 선대본부장을 한 김인섭은 백현동 개발 시행사 대표를 협박해 지분 25%를 받아가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 지사 측근들의 조폭 같은 짓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실제 조폭이 등장한다. 이 지사는 변호사 시절 조폭 사건을 수임했다. 성남시장 시절에는 그 조폭 출신이 운영하는 기업에 중소기업인 대상을 줬다. 후임인 은수미 현 성남시장은 바로 그 기업으로부터 1년간 운전기사와 차량을 제공받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으나 대법원이 항소심의 절차적 오류를 트집 삼아 벌금 90만 원만 선고하는 바람에 시장직을 유지했다. 그 조폭이 성남 국제마피아파이고, 출신 기업가가 이준석이고, 기업이 코마트레이드임은 검찰 공소장과 판결문에도 다 나온다. 국회 국감장 화면에 등장해 이 지사에게 뇌물을 전달했다고 주장한 박철민(수감 중)은 이준석 아래 조직원이었다고 한다. ‘돈 사진’의 진위 논란이 불거져 있지만 본인이 얼굴과 실명을 밝히고 ‘거짓이면 처벌받겠다’고 한 만큼 정식 고발 절차를 밟게 하고 검찰이 사실인지 무고인지 수사해 잘못을 가려내야 한다. ‘흐흐흐, 크크크’ 국감장에서 조커의 웃음이 흘러나왔다. 조커는 사실 힘은 세지 않다. 그럼에도 위협적인 것은 규칙을 무시하고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공격하기 때문이다. 배트맨까지 쩔쩔맬 정도다. 이 지사는 모라토리엄 선언 때부터 조커적 재능을 보여줬다. 민주당에서조차 ‘이재명은 한다면 한다. 거짓말까지도’라는 자조적인 말이 나왔다. 조폭의 말이 그대로 믿기 어려운 만큼 이 지사의 말도 그대로 믿기 어렵다. 어디 거짓말뿐이겠는가. 쌍욕에 표절에 범죄(전과 4범)까지. 이 불온한 기운을 멈춰 세워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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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김정은, 생뚱맞은 주적론

    한국은 노무현 정권 시절 국방백서에서 ‘주적’이란 표현을 삭제했다. 이후 보수 정권에서 되살리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주적(primary enemy) 대신 가장 주요한 위협(primary threat) 등의 표현을 썼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몰라도 군사적으로는 조삼모사(朝三暮四)다. 우리가 주적이란 말을 쓰든 가장 주요한 위협이란 말을 쓰든 실제 군사적 현실의 주적은 북한이다. 마찬가지로 북한이 주적이란 말을 쓰든 안 쓰든 실제 군사적 현실의 주적이 한국과 미국인 것은 변함없다. ▷10일은 북한 조선노동당 창건일이었다. 북한은 이날 주로 열병식을 개최해 왔다. 그러나 올해는 김정은이 열병식에 참가했다는 보도는 없고 국방발전전람회에 참가했다는 보도만 있어 열병식 대신 일종의 무기전람회를 개최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그 자리에서 지난달 시험발사한 극초음속미사일(화성-8형) 등 최신 무기를 망라해 보여준 뒤 국방력 강화를 핵심 국가정책으로 천명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주적은 전쟁 그 자체이지 남조선이나 미국 등 특정한 어느 국가나 세력이 아니다”라는 주적론을 펼쳤다. ▷김정은의 그날 주적론은 생뚱맞은 측면이 있다. 우선 그날의 무력 과시 기조와 맞지 않는다. 게다가 김정은은 올 1월 당 대회에서만 해도 “최대의 주적인 미국을 제압하고 굴복시키는 데 초점을 맞춰 지향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 집권 초기인 2017년에는 주민들을 상대로 ‘남조선은 우리의 주적’이라는 사상 강연회를 잇달아 열었다. 북한 정권의 생각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남북 대화, 북-미 대화 재개를 의식한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김정은의 주적론 립서비스가 최근 미국 정부의 대북 정보기관 코리아미션센터(KMC) 해체에 호응하는 태도 변화라는 분석도 있지만 영변 핵시설 원자로 재가동 의혹에 대한 국제사회의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목적이라는 상반된 분석도 있다. 다만 그 의도가 어떠하든 ‘주적은 전쟁 그 자체’라는 말은 무기를 녹여 쟁기를 만든 성인군자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다. 최소한 한반도 비핵화의 대의(大義)를 거슬러 핵무기를 개발하고 그 고도화를 꾀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주적이란 표현의 삭제가 평화를 가져오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주적은 전쟁 그 자체’라는 말이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하거나 한국이 핵무기 통제권을 얻어 남북이 서로에 대해 대등한 군사적 억제력을 확보한 위에서만 함께 뜻을 모아 전쟁 그 자체를 주적으로 삼는 한반도 평화의 추구가 의미를 가질 수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1-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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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이재명, 민주당의 황혼

    경기 성남 분당의 한 교회를 10년 넘게 다닌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성남시장 재선에 도전하던 2014년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목사가 예배 시간에 이 지사의 성남시장 재선 출마 소식을 광고했다. ‘이 지사가 이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한 번 놀랐고, ‘이 지사가 (어느 교회든)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또 한 번 놀랐다. 2016년 ‘혜경궁 김씨’의 댓글이 SNS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지사와 문재인 대통령이 더불어민주당의 잠재적 대권후보로 경쟁할 때다. ‘혜경궁 김씨’는 문 대통령을 향해 ‘한국말도 통역이 필요한 문어벙’ 등의 거친 말을 쏟아냈다. 이 지사 측은 ‘혜경궁 김씨’는 부인 김혜경 씨가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곧 댓글을 쓴 아이디와 똑같은 아이디가 우리 교회의 인터넷 게시판에서 발견됐는데 아이디의 주인이 김혜경 씨였다. 이 지사를 교회에서 본 적은 없다. 큰 교회니까 못 볼 수 있다. 그래서 다른 교인들에게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물어봤지만 봤다는 사람을 못 봤다. 목사는 몇 주 전 일요일에 이 지사가 우리 교회 교인이 아니라고 밝혔다. 과거 김혜경 씨가 남편의 선거운동에 이용하기 위해 등록만 해준 것이 아닐까 싶다. 목사가 7년이 지나 이 지사의 교인 여부를 확인해준 것은 형수 욕설 녹음파일이 영향을 미친 듯하다. 형수에게 악감정이 있더라도 처음에는 조곤조곤 얘기해 보려 시도하다가 참기 힘들면 목소리를 높이는 게 보통이다. 그의 말은 다짜고짜 옮기기도 거북한 쌍욕으로 시작한다. 같은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 아닌 사실에 교인들이 큰 자괴심을 느꼈을 것이다. 이 지사는 소년노동자로 시작해 검정고시로 대학에 들어가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성남시장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생계형 좌파라는 게 있다. 이들에게는 본래 좌파가 지닌 원대한 이념이 없다. 너무 원대해서 우파로부터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그런 이념 말이다. 생계형 좌파는 눈앞의 이익이 있으면 놓치지 않는다. 처음에는 먹고살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을지 몰라도 웬만큼 먹고살게 된 다음에도 관성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얻기를 추구한다. 이 지사와 그 주변 세력에서 언뜻언뜻 느껴지는 낯선 행태는 밑바닥으로부터 ‘오징어게임’식의 생존투쟁을 통해 단계를 밟고 올라온 사람들의 치열함과 무관치 않다. 그 치열함이 윤리적으로 가다듬어진다면 더없이 좋은 성품으로 승화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웹툰에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무자비하고 탐욕적인 캐릭터가 된다. 이 지사가 2016년 ‘정부가 매년 성남시 돈 1051억 원을 빼앗아 가려 한다’고 주장하며 단식농성을 벌인 적이 있다. 1051억 원의 교부금은 분당과 판교 덕분에 부자 도시가 된 성남시는 더 이상 받을 필요가 없고 대신 경기도내 가난한 시군으로 가야 할 돈이었다. 이 지사는 이마저도 빼앗기지 않겠다고 단식에 들어갔다. 난 그의 스크루지처럼 탐욕스러운 단식을 비판하는 칼럼을 썼다가 그로부터 ‘기레기’ 공격을 당했다. 당시 민주당 지도부가 나서 무모한 단식이라고 여기고 말렸으니 망정이지 그대로 뒀으면 아무도 동조하지 않는 단식을 중단하지도 못하고 큰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음대 성악과를 나와 건설현장에서 ‘힘’쓰는 친척 동생이 있다. 덩치가 커 성량은 좋았으나 성악으로 먹고살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민노총을 위해 경쟁업체를 밀어내는 역할을 했다고 들었는데 얼마 전 만나니 한국노총으로 옮겨 비슷한 일을 한다고 한다. ‘대장동 게이트’의 유동규를 보니 그도 음대 성악과 출신으로 덩치가 좋다. 건설업체 운전기사 명목으로 그 바닥에 들어간 모양이다. 2010년경 분당 리모델링 조합장을 할 때 성남시장 선거에 도전하는 변호사 이재명을 만난 이후 측근이 됐다고 한다. 이 지사 주변에는 경기동부연합의 떨거지들, 건설업체의 삐끼들에 조폭까지 맴돌고 있다. 이익이 될 만한 것의 냄새를 맡는 데는 귀신같고, 한번 냄새를 맡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취하려 하고, 취한 이익을 어떻게 숨겨놓아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지사가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를 이어가고 있다. 민주당이 생계형 좌파에 권력을 넘겨주려 한다. 저 정당도 수명이 다했다는 느낌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1-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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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두 얼굴의 권순일

    이재명 경기지사는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방송 토론회에서 ‘친형의 강제 입원을 지시한 적이 있느냐’는 상대 후보의 질문에 “그런 적이 없다”고 말했다. 강제 입원을 지시한 적이 있지만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라고만 했어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강제 입원을 지시한 적이 없다고 잡아떼다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기소돼 대법원까지 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김명수 대법원장과 최선임인 권순일 대법관을 제외한 나머지 재판관 10명은 유죄 5 대 무죄 5로 의견이 팽팽히 갈렸다. 그러나 대법원장을 빼고 가장 늦게 의견을 내는 최선임이 무죄 편을 들면서 추가 기울었다. 대법원장은 다수의견을 따른다는 관례에 따라 자동적으로 무죄 편에 섰다. 이 지사는 5 대 7로 무죄가 확정됐다. ▷당시 공표의 개념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다. 권 대법관은 공표는 활자화의 의미를 가진 ‘퍼블리시(publish)’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토론에서의 발언에는 제한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런 주장은 대법원의 기존 판례에 반한 것이어서 반대의견 대법관들은 반발했다. 그러나 결국 토론에서의 발언에는 사실이냐 허위냐의 일도양단(一刀兩斷)으로부터 자유로운 여지가 주어져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말은 글과 달리 현장에서 공방(攻防)을 통해 부정확성을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에 일도양단 사이에 여지가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늘 그렇듯이 어느 정도냐가 문제다. 정작 권 대법관 자신은 2015년 대법원 소부의 주심을 맡아 박경철 익산시장이 방송 선거토론회에서 상대편 후보가 한 건설사와 모종의 거래를 통해 쓰레기 소각장을 변경했다는 허위사실을 공표한 사실을 인정했다. 피의자가 누구냐에 따라 생각이 왔다 갔다 한다는 비판이 나올 만하다. ▷권 씨는 2014년 박근혜 정부에서 대법관에 임명됐다. 그의 판단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미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 덕분인지 2017년 12월 대법관이 겸임하는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됐다. 지난해 대법관 임기가 끝났는데도 관례를 무시하고 선관위원장을 계속 하려다가 빈축을 사고 결국 물러났다. ▷최근에는 대장동 개발 의혹을 받고 있는 화천대유의 고문으로 1억5000만 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이 지사 무죄에 결정적 기여를 한 덕분이 아니냐는 구설에 올라 있다. 이 지사가 허위사실 공표 혐의를 받은 사실 중에는 선거 공보물 등에 대장동 개발 이익을 과장했다는 등의 내용도 있다. 대장동과 이 지사의 관련성을 몰랐다는 권 씨의 해명은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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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억울한 민사고

    19년 전 강원도 횡성의 민족사관고를 찾아 학생들이 실제로 어떻게 공부하는지 본 적이 있다. 한 학생이 쓴 영어 에세이의 첫 문장이 취재수첩에 아직 남아 있다. 그 학생이 혼자 운동장 트랙을 돌며 지난 학교생활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밤이 두 팔로 지평선을 감싸면 가로등 빛은 더욱 밝아져 구석구석과 틈까지 비춘다(As the night wraps her arms around the horizon, the street lamps glow ever brighter, revealing every corner and cranny).’ ▷사재 1000억 원을 들여 민사고를 세우고 키운 최명재 파스퇴르 회장은 국내 대학교육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 대학에서 공부해 노벨상을 받을 사람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했다. 민사고에는 국내 진학반과 해외 유학반이 있다. 최 회장은 국내 진학반을 유지하는 이유에 대해 “당장 유학 갈 여건이 안 되는 영재를 모른다 할 수 없어서”라고 했다. 민사고는 학부 과정에서부터 유학할 학생을 길러내는 데 주력했다. ▷민사고는 1999년부터 올해까지 하버드대 13명, 예일대 20명 등 985명을 해외 유명 대학에 진학시켰다. 1970년대 중반 고교 평준화가 시작되면서부터 유학은 주로 국내에서 대학을 마치고 해외에서 석박사 과정을 하는 것이었다. 민사고를 시발로 외고 과학고 등에 해외유학반이 생기고 나서야 학부 과정부터 해외에 나가서 하는 글로벌 인재 육성 코스가 복원됐다. 이런 교육의 첫 수혜자인 30대 후반이 사회 곳곳에서 이미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민사고는 정부의 자립형사립고 폐지 정책에 따라 2025년까지 일반고로 전환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당장 내년 신입생 모집부터 영향을 받는다. 일반고로 전환하면 전국이 아닌 강원도 상대의 인재 선발에 한계가 있고 석박사급의 교사를 유지하기 힘들어 폐교할 수밖에 없다. 민사고는 ‘대안교육 특성화고’로라도 지정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해직교사 출신의 민병희 강원도교육감은 꿈쩍도 않는다. ▷민사고는 파스퇴르유업이 부도가 나 재정 지원을 중단한 후 학비가 비싼 학교가 됐다. 민사고는 정부로부터 한 푼도 지원받지 않는다. 정부가 학교를 지원해 비싼 학비를 못 낼 형편의 학생도 능력이 있으면 들어가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전형을 만들면 불평등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된다. 그렇게 하지도 않으면서 내버려두면 잘 굴러갈 학교에 어깃장을 놓고 있다. 양식이 있다면 보태주는 건 못해도 최소한 망하게 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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