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언론이 초갑(超甲)? 사설만 봤어도 이 지경까진 안 됐다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월 24일 14시 00분


논설위원을 하다 정부로 간 사람한테 들은 소리다. 매일 나라 걱정을 하며 해결책을 고민한다는 점에서 하는 일이 비슷하다는 거다. 물론 다른 점은 백가지도 넘겠지만 매일 무슨 사설을 쓸지 발제하고, 회의하고, 쓸 때마다 논설위원들은 직업병처럼 나라를 걱정한다.

‘윤석열 사태’를 겪으며 제일 억장 무너지는 일 중 하나가 윤 대통령(이하 경칭 생략)이 신문을 안 본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총선 전에도 여권 인사에게 “신문 보지 말고 민심(즉, 극우 유투브)을 들으라”고 했다더니 15일 공수처에 체포되기 직전에도 “요즘 레거시 미디어(전통적 신문·방송)는 너무 편향돼 있으니 유튜브에서 잘 정리된 정보를 보라”고 했단다. 그러고는 21일 헌법재판소에선 또 “국회와 언론이 대통령보다 훨씬 강한 ‘초갑’”이라고 했다. 앞뒤 안맞는 소리가 한두 번도 아니지만 참담하다. 이런 분이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21일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 출석한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와 언론이 대통령보다 ‘초갑’”이라고 말했다. 평소에도 그는 신문보지 말고 유튜브만 보라고 주변에 강조했다고 한다. 2025.1.21/뉴스1 ⓒ News1 사진공동취재단
요즘 신문 안 보는 이가 적지 않다는 것, 안다(그것도 자유지만 나는 안 보는 분만 손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통령은 달라야 한다. 당선인 시절인 2022년 4월엔 윤석열도 신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민심을 가장 정확하게 읽는 언론 가까이에서 제언도, 쓴 소리도 잘 경청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끊임없이 공부하면서도 신문 꼼꼼히 보기로 유명했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특히 사설에 관심이 많았다. 연설문을 쓰다 “몇 월 며칠자 OO일보 사설 좀 찾아달라”고 박지원 당시 비서실장에게 전화하곤 했을 정도다.

● 대통령의 총선 패인, 사설만 봐도 안다

그래서 2024년 1월 1일부터 12·3 사태 전까지 동아일보 사설을 찾아봤다. 제목만 훑어봐도 가슴이 무너진다. 대통령이 그때그때 사설을 보고 손톱만큼이라도 반응했다면, 이 지경까진 안 왔을 게 분명했다. 그 중에서도 4월 총선 직전까지 대통령 관련 사설을 보면 왜 대패했는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여당 참패 다음날 사설 제목은 ‘유례없는 여(與) 참패…국민은 윤대통령을 매섭게 질책했다’였다. 다시 봐도 너무나 옳은 내용이라 혼자 보기 아까워 소개한다.


민심은 무엇보다 윤 대통령의 일방적 국정 운영과 독선적인 ‘검사 리더십’을 준엄하게 꾸짖었다…(중략) 윤 대통령이 스스로 바뀐다면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들 수 있다…(중략) 전면적인 국정과 인사 쇄신, 열린 소통으로 신뢰부터 되찾아야 한다. 야당의 협조를 얻는 데 필요하다면 준거국 내각이라도 꾸려야 한다.”
윤 집권 2년 만에 이(李)에 전화해 첫 회동 제안…이게 정상이다’(4/20)라는 아름다운 사설도 있다. 그러나 그러나다. 대학생 때까지 부친에게 고무호스로 맞았다는 그가 어디 달라졌던가. 사흘 뒤 실린 사설 제목은 눈물이 난다. ‘2년 새 세 번째 비서실장…윤 안 바뀌면 누가 된들 다를까’.

● 계엄으로 막은 김건희-명태균 게이트

대통령 취임 전부터 우리 사설이 끊임없이 우려한 것이 ‘김건희 리스크’였다. 2021년 대선 과정부터 시작해(‘주가조작’ 권오수 구속…‘김건희 의혹’도 철저히 규명하라) 2022년과(취임 뒤에도 검경의 무딘 수사가 ‘김건희 특검’ 빌미 주는 것 아닌가) 2023년에도(김건희 특검법 통과…여당 “즉각 거부” 앞서 돌이켜봐야 할 것들) 경고했지만 윤석열은 영부인 보호에 쇠심줄이었다. 결국 2024년 곪아 터졌다.

명태균 씨가 채널 A에 공개한 2022년 9월 김건희 여사와 주고받은 텔레그램 문자 (채널 A 갈무리). 작년 11월 15일 구속된 그는 “내가 구속되면 한달 내 정권이 무너진다”고 했는데 12월 14일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말았다.  뉴스1
명태균 씨가 채널 A에 공개한 2022년 9월 김건희 여사와 주고받은 텔레그램 문자 (채널 A 갈무리). 작년 11월 15일 구속된 그는 “내가 구속되면 한달 내 정권이 무너진다”고 했는데 12월 14일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말았다. 뉴스1
곧이어 터져 나온 것이 명태균 게이트다. 시작은 ‘명태균 “윤 부부 만나 총리 추천”…이런 사람들 탓에 탈나는 것’(10/8) 사설이었다. ‘명태균 게이트, 명태균 리스트’(10/11) 사설은 지금 보면 예언적이다. “김건희 여사 ‘공천 개입 의혹’의 핵심 관련자인 명태균 씨 논란이 ‘게이트’ 수준으로 번지는 양상”이라며 “이러다 한낱 정치 브로커 파문에 나라가 뒤집어질 판”이라고 경고했다. ‘공천 개입, 인사 입김, 국책사업 관여…끝없는 명태균 아수라’(11/22)가 다 드러날까 겁났는지 윤석열은 마침내 비상계엄을 터뜨리고 말았다.

● ‘부정선거 계엄’은 지지층 결집용 핑계가 아닌가

계엄의 불가피성으로 대통령은 부정선거를 역설한다. 그러나 우리 사설에서 부정선거가 언급된 건 2012년 ‘이정희의 여론조사 경선조작은 부정선거다’(3/21) ‘비례대표 부정선거가 드러낸 통진당 DNA’(5/3) 정도가 고작이다.

문재인 정권 시절 ‘소쿠리 투표’ 같은 선관위의 허술한 관리와 친여 편향성, 특혜 문제는 사설에서 수차 지적했다. 하지만 윤석열이 말하는 그런 부정선거는 음모론으로 떠돌았을 뿐이다. 2023년 ‘디지털시대 다시 手개표 검토하는 선관위…불신의 비용’(11/16) 사설에서도 “2020년 총선 당시 11개 지역구에서 경쟁 후보끼리 사전투표의 관내·관외 득표 비율이 유사한 현상이 있긴 했지만 수사와 소송을 통해 조직적인 개표 부정이 확인된 것은 없다”고 똑 부러지게 정리했다. “과도하게 의혹을 부추긴 쪽은 자제하고 논란의 빌미를 제공한 선관위는 신뢰 회복에 차질 없어야 한다”고 못을 박기도 했다. 실제로 2024년 총선은 이렇게 진행됐다. 그래도 음모론자들은 절대 안 믿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지난해 12월 3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투입된 계엄군이 시스템 서버를 촬영하는 모습이 담긴 CCTV 화면. 윤 대통령은 체포되기 전까지 수 차례 발표한 입장문에서 계속해서 부정선거를 주장했다. 동아일보DB
그리하여 더럭 의심이 드는 것이다. ‘부정선거 계엄’이란 핑계가 아닌가? ‘김건희 특검’ 막으려 계엄했다고 알려지면 얼마나 X팔리겠느냐 말이다. 부정선거를 들먹인 덕분에 직전까지 떠들썩했던 김건희 국정개입-명태균 게이트까지 쏙 들어가고 말았다. 여기에 부정선거 음모론으로 돈 벌던 극우 유튜버는 물론, 그동안 긴가민가하던 자칭 반공-반중 애국보수마저 지지자로 끌어들이게 됐다. 거의 신의 한수가 아닐 수 없다.

● 민주당 지지율 추락 이유를 모른다고?

우리 신문 사설이 대통령만 비판한 건 아니다.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재명에 대해서도 따박따박 썼다. 조기 대선이 가시화한 지금은 대통령 다 된 모습이다. 문득 정신을 차렸는지 그가 당 지도부에 대고 “여론조사에서 당 지지율이 이렇게 나오는 정확한 이유를 분석해 달라”고 했다는 기사가 동아일보 22일자에 났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지율 추락의 이유를 분석해달라고 당 지도부에 요구했다. 동아 사설에 답이 나와 있는데 신문도 안 보는 모양이다. /뉴스1
참내. 이재명 역시 신문도 안 보는 게 분명하다. 18일자 우리 사설엔 정답이 친절하게 적혀 있었다.

제목: 39% 대 36%…홀로 과속하다 지지율 역전당한 야(野)


“(중략)보수층이 결집하는 사이 대통령의 망동을 막아낸 국회 권력으로서 압도적 지지를 얻었던 민주당은 불과 한 달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지난달 말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킨 이래 여당 지지율은 상승세로, 야당은 내림세로 나타났다. 그 추락을 가속화한 것은 일방적 독주와 독선적 오만이었다…(중략) 거기에 이재명 대표의 2심 재판을 늦추려던 모습은 국민의 눈에 어떻게 비쳤겠는가.”
● 이재명도 제발 사설을 보시라

작년 총선 승리 뒤 이재명은 제왕적 대통령 뺨치는 제왕적 총재체제로 당을 사유화했다. 우리 사설은 총선 다음날 ‘야, 절제된 입법권 행사로 수권 능력 보여줘야’(4/11) 촉구했지만 헛수고였다.

참다못해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때렸다고 쓰고 싶진 않다. 어떤 이유로도 무장군인을 동원한 걸 용납할 순 없다. 그러나 만에 하나,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고 야당이 지금의 민주당처럼 사사건건 발목잡기로 나선다면 어쩔 건지 묻고 싶다(어쩌면 그는 계엄 없이도 계엄 같은 공포정치를 할 수 있을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든다).

● 충신도 하기 힘든 소리, 사설에 있다

어떤 측근도, 심지어 충신도 대통령에게 “NO” 하긴 어렵다고 한다. 격노와 버럭이 일상인 윤석열 앞에선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걸 두려움 없이 업(業)으로 하는 이들이 논설위원이고 그 결과가 신문 사설이다. 그날그날의 역사 중 가장 의미 있는 두세 가지 이슈에 대한 신문사 입장을 담은 역사물이기도 하다(바쁠 때는 사설만 봐도 흐름을 파악하고 사리판단하는 데 도움이 된답니다^^).

대통령이 임기 절반을 맞았을 때 우리 사설은 ‘임기 후반 시작한 윤, 쓴소리에 귀 열고 인적 쇄신 서둘라’(11/11)고 충정을 다해 호소했다. 그러나 ‘명태균 김영선 구속…곳곳에서 불거진 윤-김 공천 개입 의혹’(11/16)이 터졌고 ‘윤 남은 2년5개월에 근본적 의문 던진 굴욕적 셀프 쿠데타’(12/5)로 파국을 맞았다. 이재명도 괜히 당 지도부나 괴롭힐 게 아니라 이제라도 사설을 읽기 바란다. 그가 물었던 지지율 추락에 대해 우리 사설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남의 실책으로 얻는 공짜 이익만 좇는 정당에 국민을 안심시키는 정치를 기대할 수는 없다(중략)…민주당이 강성 지지층만 바라보는 분열의 정치를 버리지 않고선 역사에 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윤대통령#비상계엄#대통령 탄핵#윤석열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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