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서울에서 개최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세계 주요국은 ‘환율전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여러 나라가 수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앞다퉈 자국 통화가치를 끌어내렸다. 미중 간 위안화 절상 갈등, 미국의 2차 양적완화를 둘러싼 주요국 반발 등이 터져 나왔다.
이때 의장국이었던 한국이 제시한 해법이 경상수지 목표 관리제였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 비율을 일정 수준 안에서 관리하며 ‘시장이 결정하는(market determined)’ 환율 제도를 이행하자는 구상이었다. 구체적인 수치를 정하진 못했지만, 경쟁적 통화 절하를 자제하자는 합의는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 논의를 설계한 주역 중 한 명이 당시 대통령실 국제경제보좌관이자 이번에 한국은행 신임 총재로 취임할 신현송이다. 경상수지 흑자에도 고환율 ‘뉴노멀’
어려운 시기였지만, 그래도 그때는 전통적 분석을 놓고 논쟁했다. 지금은 경제 상황 전체가 교과서로 설명이 안 되는 뉴노멀이 됐다. 한국부터 그렇다. 경상수지는 사상 최대 흑자를 이어가는데 원-달러 환율은 오히려 상승 압력을 받고 있다. 경상수지 흑자로 달러가 들어오면 환율이 내려간다는 기존 공식은 어긋난 지 오래다. 원-달러 환율은 1500원을 위협하고 있고, 당국은 어떻게든 환율을 낮추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과거라면 미국이 환율 조작이라고 한국을 거세게 압박했을 상황이다. 1985년 미국이 플라자합의로 엔-달러 환율을 끌어내린 것도 일본 경상수지 흑자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다. 지금은 다르다. 시장 개입 없어도 환율이 오르는, 이른바 ‘흑자 속 고환율’이 굳어졌다. 글로벌 자금이 금리 차이에 따라 이동하고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달러로 쏠린다. 미국의 통화 긴축이 더해지며 달러 강세가 이어지고 있다.
문제는 환율 상승효과마저 K자형 양극화가 고착됐다는 점이다. 인공지능(AI) 붐의 한복판에서 세계적 반도체 경쟁력을 갖춘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고환율은 날개다. 하지만 한국 경제 전체에는 그늘이 더 짙다. 에너지와 원자재를 해외에 의존하는 구조에서 고환율은 수입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비용 증가는 결국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정부가 기업에 가격 인상 자제를 유도하면서 소비자 물가 인상세가 주춤해졌지만, 뒤집어 보면 그만큼 기업 부담이 커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책 대응 여지도 크지 않다. 공공요금 관리 등으로 정부가 물가 상승을 일부 완화할 순 있겠지만, 역대 최대 수준으로 오른 수입 물가 상승을 완벽히 통제하긴 어렵다. 통화정책도 선택이 쉽지 않다. 기준금리를 올리면 환율 안정에는 도움이 되지만 경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반대로 금리를 낮추면 돈이 풀려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환율 불안을 잠재우고 경제 체력을 다지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국적-위장전입 논란은 차라리 쉬운 문제
경상수지, 자본수지, 환율, 물가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환경에서 정책 균형점을 찾는 건 고차원 방정식이다. 경상수지 흑자 규모를 관리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자본 이동의 가속화, 공급망 재편,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뒤엉키며 경상수지와 환율의 상관관계 자체가 구조적으로 달라졌다. 한은 스스로도 경상수지 흑자가 곧 환율 하락이라는 과거의 공식이 깨졌다고 지적했다.
한은 총재로 지명된 뒤 국회 인사청문회에선 가족 국적, 위장전입 등에 대한 야당 지적이 거셌다. 가볍게 넘길 논란은 아니지만, 취임 이후 마주할 과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일 수 있다. 16년 전 경상수지 관리제는 당시로선 신선하고 의미 있는 시도였다. 지금 필요한 것도 그때의 문제의식과 과감함이다. 달라진 환경에 맞는 새로운 기준과 정책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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