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홍콩의 31층 아파트 단지에서 불이 나 현재까지 55명이 숨지고 279명이 실종되는 최악의 인명 피해가 났다. 외벽 보수 공사 중이던 이 아파트 8개 동 중 7개 동이 화마에 휩싸였는데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 사이로 불이 순식간에 번졌다. 건물마다 설치된 고층 작업용 가설물인 대나무 비계가 불길이 번지게 하는 고속도로 역할을 했다. 생존자들은 “대나무가 딱딱 소리를 내며 터지고, 불붙은 대나무들이 20∼30층 높이에서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고 전했다.
▷공사 중인 건물은 비계라고 불리는 임시 구조물에 둘러싸여 있다. 인부들이 딛고 서는 발판이자 자재를 옮기는 통로여서 공사 현장의 뼈대라고도 불린다. 철제 비계가 주로 쓰이지만 홍콩에선 대나무 비계가 많다. 비좁은 땅에 고층 건물이 빽빽하게 밀집한 지리적 특징이 낳은 산물이다. 대나무는 유연하고 자르기 쉬워 좁은 건물 틈 사이로 비계를 설치하기 쉽다. 워낙 싸고 효율이 좋아 화재에 취약하다는 치명적 단점은 과소평가돼 왔다. 하지만 잠재된 위험은 이번 화재처럼 언젠가 현실이 된다.
▷홍콩 당국이 이런 참사에 대비할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1996년 홍콩 갈레이 빌딩 화재 때도 대나무 비계가 불쏘시개 역할을 해 41명이 희생된 적이 있다. 고층 건물은 사다리차가 닿지 않아 속수무책이란 것도 그때 다 경험했다. 하지만 건설사들은 압도적 가성비에 숙련된 대나무 비계공들이 풍부해 오랜 관행을 포기하지 못했다. 정부도 이를 계속 방관하다 올 3월에야 단계적으로 사용을 금하기로 했지만 때늦은 조치였다.
▷화재가 난 공사 현장에는 담배를 피우는 인부들도 많았다. 아파트 주민들은 이들이 아무 데다 꽁초 버리는 걸 목격하고 여러 번 항의했지만 시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화재는 담뱃불에서 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홍콩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다. 최근엔 강풍까지 자주 불어 안전 그물망이 떨어져 나가는 일도 많았다. 각층의 창문은 깨지지 말라고 스티로폼으로 도배돼 있었다. 이처럼 불에 잘 타는 자재와 버려지는 꽁초들, 게다가 강풍까지 불이 날 징조들은 차곡차곡 쌓여 왔다.
▷한국은 홍콩 못지않은 ‘초고층 아파트 공화국’이다. 우리는 대나무 비계를 쓰진 않지만 가연성 외장재나 필로티 주차장 같은 우리만의 ‘불쏘시개’를 안고 있다. 부산 해운대 우신골든스위트 화재(2010년), 경기 의정부 대봉그린아파트 화재(2015년) 등이 그런 사례다. 요즘 초고층 아파트엔 중간에 피난 구역이 있다고 하지만 유사시 대피 매뉴얼을 숙지하고 있는 주민들은 많지 않다. 오래된 고층 건물엔 이런 피난처마저 없다. 재난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갑자기 뚝 떨어지지 않는다. 위험한 줄 알면서 “설마…”할 뿐이다. 홍콩에서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듯, 우리라고 예외일 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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