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팩트시트 합의로 한국 외교 새 단계로
해외선 경제적 양보 대신 핵잠 획득 시각도
‘거래’ 오해 풀려면 군사협력 비전 제시해야
상시협상 대비할 선진 외교 설계도 필요해
전재성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한미가 14일 발표한 관세·안보 ‘조인트 팩트시트(joint factsheet·공동 설명자료)’는 우리 외교의 향방을 가늠할 중요한 좌표이다. 한국이 세계에서 7번째 혹은 8번째 핵추진 잠수함(핵잠) 보유국으로 진입할 가능성은 단순한 전력 증강을 넘어선 신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를 실질적으로 좌우해 온 5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은 핵심 전략무기 체계, 특히 핵잠을 통해 기득권을 공고히 해왔다. 한국이 그 뒤를 잇는다는 것은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고 국제질서 형성의 일부를 책임지는 단계로 올라선다는 뜻이다. 군사력과 소프트파워, 인공지능(AI) 경쟁력 등에서 한국이 세계 5위권 안팎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흐름은 이러한 구조적 변화를 더욱 분명하게 한다.
이번 팩트시트는 두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다. 하나는 관세·투자·기술·안보를 둘러싼 실용적 국익외교다. 다른 하나는 향후 국제질서의 구조를 함께 설계하는 질서외교, 즉 정부가 표방하는 글로벌 책임강국 외교다. 문제는 국제사회가 한국의 실용외교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이다. 해외 전문가들 사이에선 한국이 미국에 경제적 양보를 제공한 대가로 원자력 부문의 농축·재처리 기술의 평화적 활용 권한과 핵잠 건조 승인을 받아낸 것 아니냐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러한 해석은 한국 외교가 원칙과 전략에 기반한 선택이 아니라 미국과의 거래에 기댄 ‘한국판 거래외교’로 기울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거래외교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호 이익이 보장될 수 있다면 안정의 토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핵잠이 단순한 경제적 양보의 대가로 얻은 전략자산으로 비치지 않으려면, 한국의 군사안보 전략과 한미 군사협력의 중장기 청사진이 분명히 제시돼야 한다. 핵잠이 어떤 군사억제 구조 속에서 활용되고, 어떤 지역 전략과 연결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면 한국 외교는 거래적 접근에 머물러 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또 하나 놓쳐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는 수많은 양자·다자 협상이 층층이 쌓여 형성된 거대한 구조물이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동맹, 무역, 기술, 안보 규범 모두 수십 년에 걸쳐 쌓인 협상과 조정의 결과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한미 협상은 그저 관세 조정이나 잠수함 논의가 아니라 세계 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그 기초가 되는 청사진의 일부다. 한국의 이번 대미 협상은 앞으로 다른 국가들이 참고할 만한 모범이 돼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선진국 한국이 수행해야 할 질서외교이자, 정부가 내세우는 글로벌 책임강국 외교의 실질적 내용이다.
이번 협상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오히려 실용외교의 1막이 마무리됐을 뿐이며,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곧 대중 외교, 대러 관계, 대유럽연합(EU) 협력, 대북 전략 등이 연속해서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시 협상과 지속적 조정의 시대로 진입했다. 하나의 팩트시트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시대는 끝났다. 새로운 질서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는 기술·안보·에너지·경제를 아우르는 수많은 협상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기적 대응이 아니라 장기적·구조적 대비 체계다. 앞으로 맞이할 협상들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범정부 차원의 전략 플랫폼과 외교·안보·산업·기술 전문가들을 결집한 체계적 협상 준비 체제가 필요하다. 이는 한국 전체의 국가전략과 직결된 문제다.
그 핵심은 한국 외교의 원칙과 방향을 명확히 제시할 한국형 대전략 문서의 마련이다. 실용외교와 글로벌 책임강국 외교가 어떤 원칙 아래 모순 없이 연결되는지, 대미·대중·대북·대러·대EU 전략을 어떤 구조 속에서 조율할 것인지, 기술·군사·에너지·무역 등이 어떻게 하나의 전략으로 통합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국가적 설계도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한국의 선택이 단순히 거래의 산물이 아니라 축적된 전략의 결과임을 국제사회에 설득할 수 있다.
한국은 이제 실용 이상의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원칙을 지키며 책임을 다하고 새로운 질서를 설계하는 국가로서의 평판, 즉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견줄 수 있는 선진국 외교가 필요하다. 한미 팩트시트는 그 첫 장일 뿐이다. 앞으로 이어질 수많은 협상에서 한국이 어떤 비전과 철학을 내세우느냐가 동아시아는 물론 국제질서의 형성 방향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한국은 지금, 새로운 질서의 문을 여는 출발선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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