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영]하루에 책 12권 쓰는 ‘괴물 작가’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1월 13일 23시 19분


다작(多作)하는 작가들이 있다. 프랑스의 발자크는 26년간 125편의 소설과 희곡을 완성했다. 하루 15시간씩 커피를 50잔 마셔가며 썼다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76)는 46년간 107편의 소설과 에세이집을 냈다. 달리기와 수영으로 다져진 몸으로 매일 새벽 5시부터 7시간 동안 4000자씩 쓴다. 다산 정약용은 전남 강진 유배 시절 19년간 500편의 저작을 남겼다. 연평균 26.3권으로 제자 18명과 협업한 덕분이다. 세계적인 다작의 명수들이 울고 갈 괴물 작가가 나타났다.

▷요즘 출판계에선 1년 새 9000권 넘는 책을 낸 무명의 출판사가 화제다. 하루 평균 20여 권씩 찍어낸 셈인데 ‘작가 회원’에게 ‘AI 툴’을 제공한다는 홍보 문구로 보아 인공지능(AI)을 적극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 작가는 이곳에서 4개월간 137권을 냈다. 철학 예술 공학 경제 입시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많이 쓴 날엔 하루 12권도 냈다고 하니 AI가 다 쓴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AI의 등장으로 급변하는 분야 중 하나가 출판이다. 편집, 교열, 디자인을 맡기는 수준을 넘어 목차 구성부터 본문 집필까지 전 과정을 AI로 하는 경우도 많다. 글쓰기 진입 장벽이 낮아지면서 전자책 시장엔 AI ‘유령작가’들 책이 쏟아진다. 한 작가는 AI를 ‘글쓰기 파트너’로 받아들인 후 2년 걸리던 책을 2개월 만에 완성했다고 했다. AI가 초안을 쓰면 이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낸다는 것이다. 이 작가는 ‘챗GPT’를 공저자로 표기하지만, 관련 표기 기준이 없어 양심 없는 저자들이 AI로 써놓고 아닌 척해도 확인할 길은 없다.

▷AI의 기여도를 판별하는 ‘문해력’ 기술도 진화 중이다. 무엇을 썼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썼느냐를 본다. 구문 패턴과 어휘의 다양성 등 AI가 남긴 ‘문체적 지문’을 분석하거나, 문자 입력 속도가 규칙적이고 수정 없이 입력됐다면 AI가 쓴 것으로 판별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를 39번 고쳐 썼는데, AI라면 한 번에 좌르륵 썼을 것이다. 문자를 입력하는 동안 심박수와 뇌파를 측정하는 기술도 있다. 슬프거나 분노가 느껴지는 대목을 타이핑하면서 생리 신호에 변화가 없다면 AI가 쓴 것으로 본다. 앞으론 집필 과정의 이런 정보를 보관했다가 ‘AI로 썼느냐’는 의심을 받을 때 반박 근거로 사용하게 될지 모르겠다.

▷AI 덕분인지 지난해 발간된 신간 종이책만 6만4300종으로 10년 전보다 42% 늘었다. 하지만 1030 청년들의 독서량은 14년 새 반 토막이 났다. 책보다 재밌는 게 많아진 데다 “끔찍하고 기진맥진한 투쟁”(조지 오웰) 같다는 글쓰기가 하루에 12권을 너끈히 쓸 정도로 가벼워진 탓이다. 출판의 풍요 속 지적 빈곤을 느끼는 AI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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