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정국 속 정부 협상력 발휘 못해
체코 원전 최종 계약도 미뤄질 듯
방산도 고전…정책대출 승인 미뤄지기도
탄핵 국면이 장기화하면서 ‘팀 코리아’로 해외 시장을 개척해 왔던 원전·방산 등 주요 산업마저 리더십 공백으로 흔들리고 있다. 탈원전 폐기 이후 연달아 수주 낭보를 올렸던 원전은 미국 등 외국 경쟁 기업들에 밀리면서 유럽 시장에서 주도권을 내주고 있다. 원전만큼이나 정부의 역할이 중요한 방산 수출도 독일, 프랑스 등 전통의 방산 강국과의 외교전에서 뒤처지는 형국이다.
● 협상력 밀린 K원전, 유럽 시장 사실상 포기
韓-체코 투자 콘퍼런스
루카시 블체크 체코 산업통상장관(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이 17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한-체코 투자 및 비즈니스 콘퍼런스’에 참석해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오른쪽)과 함께 박수를 치고 있다. 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17일 정부 및 원전 업계에 따르면 신규 원전 수요가 높은 유럽 시장에서 한국 업체들이 미국, 프랑스 업체에 밀려 발을 빼는 상황이다. 최근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스웨덴, 슬로베니아 원전 수주 입찰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렸다. 한수원은 소형모듈원전(SMR) 사업에 집중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 유망한 유럽 시장을 미국 웨스팅하우스 등에 스스로 내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평가가 나온다. 원전 업계에선 최근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가 맺은 협상에서 유럽은 웨스팅하우스가, 나머지 지역은 한수원이 담당하는 조건으로 합의가 이뤄지며 결국 협상력에서 밀린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2022년 협력의향서(LOI)를 체결한 20조 원 규모의 폴란드 원전 수주도 무산 위기에 놓였다. LOI 체결 이후 교체된 폴란드 정권이 최근 원전 건설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나서서 원전 사업의 당위성을 적극 설파해야 하지만 폴란드는 물론 국내 정세 역시 불확실한 탓에 외교력을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24조 원 규모의 체코 두코바니 원전 2기에 대한 최종 계약 시점도 기존에 계획했던 3월에서 더 미뤄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체코 유력 일간지 리도베 노비니는 13일(현지 시간) “한국의 탄핵 정국으로 최종 계약이 연기될 수 있다”며 “한국의 조기 대선 문제 등이 원전 계약 진행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정부 리더십 공백은 방산 수출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자국 우선주의’로 인해 유럽 국가들의 방위비 압박이 커지면서 방산 시장이 대목을 맞았지만 ‘팀 코리아’로서 정부의 공격적인 외교전을 기대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달 10일 업계 요청으로 열린 ‘K-방산수출 지원을 위한 당정협의회’에 참석한 한 방산업체 대표는 “세계 각국에서 무기 도입 수요가 적지 않은데, K방산만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의 외교전이 없다면 K방산이 신기루처럼 꺼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실제로 지난해 말 완료했어야 할 폴란드와의 K2 전차 2차 계약이 기술 이전 및 현지 생산 조건 등에서 이견을 보이며 지연되고 있다. 폴란드 정부가 요구하는 수출금융(대출)도 부처 간 의견 조정이 되지 않아 승인이 나지 않고 있다. 지난해 12월엔 수리온 도입을 검토 중이던 사디르 자파로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이 방한했지만 계엄 사태로 인해 시승 행사 등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하기도 했다.
● 대미 통상 외교 등 국내 정책도 지지부진
정부가 나서야 할 대미(對美) 통상 협상마저 민간이 주도하고 있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 재계 인사들은 이번 주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정·재계 인사와 접촉할 계획이다. 이어 한국무역협회, 한국경제인협회도 연달아 4월 2일 시행될 미국 관세 조치에 대한 한국 기업의 입장을 전달한다.
기업들이 정부 리더십 공백에 ‘울며 겨자 먹기’로 미국으로 향하고 있지만, 민간 중심 대미 협상으로는 미국 정부의 정책 변화를 끌어내는 데 한계가 있다고 우려한다. 현대자동차그룹은 7조 원을 들인 미국 조지아주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 공장 준공식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초청할 계획이지만 정상 외교가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이라 성사될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재계 관계자는 “에너지, 산업 단위 공조 체계 등 정부 차원의 당근책을 미국에 제시하지 않는 이상 한국에 유리한 정책 변화를 끌어내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정부 주도의 정책 동력이 약화되면서 국내 제조업 기반도 약화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국내 제조업 부흥을 위해 올해 초 발표하려던 ‘산업단지 활성화 대책’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한국판 러스트벨트’로 전락하는 산단이 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의 수출 역량도 약화될 위기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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