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ML 지켜라” 총리 직접 나서 ‘베토벤 작전’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3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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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칩 워]
‘글로벌 칩 워’ 네덜란드 총력전
ASML, 규제 피해 외국이전 시사에… 네덜란드 범정부TF 꾸려 지원 나서
“베토벤처럼 아름다운 것 만들어내”
韓, 투자공제 특례법마저 일몰 앞둬

세계 유일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제조기업인 ASML이 정부 정책에 반발하며 본사를 외국으로 옮기거나, 외국 투자를 더 늘릴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에 네덜란드 정부는 일명 ‘베토벤’ 태스크포스(TF)를 긴급히 꾸리고 종합 지원 방안 마련에 돌입하는 등 ASML 본사 이전을 막을 대책 마련에 나섰다.

6일(현지 시간) 네덜란드 유력 언론인 더텔레흐라프 등에 따르면 네덜란드 정부는 최근 미키 아드리안선스 경제기후정책부 장관 등이 참여한 베토벤 TF를 가동해 상반기(1∼6월) 중 ASML 잔류를 위한 종합 대책을 내놓을 계획이다. 네덜란드의 한 장관은 현지 언론 RTL뉴스에 “베토벤과 ASML은 아름다운 것을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TF명을 설명했다. 베토벤은 네덜란드계 독일인이기도 하다. 마르크 뤼터 총리는 직접 페터르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와 만나 본사 이전 가능성 진화에 나서기로 했다.

ASML의 시가 총액은 6일 종가 기준 약 3706억 유로(약 537조 원)로 노보노디스크, LVMH에 이은 유럽 시총 3위다. 인공지능(AI) 산업이 본격 개화하며 AI 반도체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ASML이 네덜란드를 떠나면 경제에 상당한 타격이 예상된다.

ASML이 외국 이전을 고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이민 제한을 공약으로 내건 극우정당이 승리한 이후 고급 인력 유치가 어려워진 탓이다. 올 1월 베닝크 CEO는 “노동 이주 제한의 결과는 크다”며 “혁신을 위한 사람들을 데려올 수 없다면 우리는 성장할 수 있는 곳으로 갈 것”이라고 밝혔다. ASML 네덜란드 직원 2만3000명 중 약 40%가 외국인이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네덜란드와 함께 현재 세계 각국 정부는 각종 보조금, 규제 완화를 통해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에 유치하려 하고 있다. ‘칩스법’을 통해 해외 첨단 반도체 공장을 자국에 유치한 미국은 ‘칩스법 시즌2’를 예고했다. 일본은 최대 50%의 공장 건설 비용을 지원하며 반도체 강국 부활을 노리고 있다. 대만 TSMC는 정부의 세액공제 확대에 화답하며 올해 대만에 10개의 반도체 공장을 새로 짓겠다고 7일 발표했다. 반면 한국은 설비투자에 대한 세액공제를 대기업 기준 8%에서 15%로 확대한 조세특례제한법 외에 직접적인 지원책이 없다. 이마저도 올해 말 일몰을 앞두고 있다.

ASML
네덜란드 펠트호번에 본사를 둔 반도체 장비 기업. 7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이하 미세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생산하는 세계 유일 기업이다. 반도체 업계의 ‘슈퍼 을(乙)’로 불린다. 지난해 매출은 약 276억 유로(약 40조575억 원)다.


“각국서 ASML 유치 레드카펫” 반도체 슈퍼을 모시기 경쟁


네덜란드 “ASML 수호” 베토벤 작전
反이민에 인력난… 외국 이전 고려
“환경 규제-높은 세금도 경영 발목”

네덜란드 ASML의 페터르 베닝크 최고경영자(CEO). ASML 제공
네덜란드 ASML의 페터르 베닝크 최고경영자(CEO). ASML 제공
“전 세계에서 우리를 위한 레드카펫을 깔고 있습니다.”

반도체 업계의 ‘슈퍼 을(乙)’ ASML의 페터르 베닝크 최고경영자(CEO)는 1월 ASML 본사의 외국 이전 가능성을 시사하며 이같이 밝혔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열풍이 거세지며 첨단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ASML의 몸값이 오르고 있는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앞서 네덜란드에서는 셸, 유니레버 등 다국적 기업이 본사를 외국으로 이전했다. 이에 더해 ASML까지 본사 이전 및 외국 확장 가능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밝히자 마르크 뤼터 총리가 ASML의 이전을 막기 위해 직접 나섰다.

최근 네덜란드 유력 언론인 더텔레흐라프는 “네덜란드 기업 환경이 자유낙하하고 있다”며 그 원인으로 △무책임한 정부 △부족한 전력 공급 △인력 부족 △환경 규제 △과잉 규제 △엄격한 은행 △복잡한 세제 등 ‘일곱 가지 재앙’을 꼽았다.

실제로 ASML의 외국 이전설이 나온 배경에는 강력한 반(反)이민 정책으로 인한 인력 확보의 어려움, 강력한 환경 규제, 높은 세금 등이 거론된다. 지난해 10월 네덜란드 의회는 외국인 급여의 30%를 소득세에서 면세하는 기간을 기존 5년에서 20개월로 줄이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직원의 40%가 외국인인 ASML은 현행 수준을 유지할 것을 정부에 요청했다.

환경 규제도 부담이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합작 다국적 에너지기업 셸(당시 로열더치셸)은 2021년 네덜란드 법원으로부터 203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2019년 대비 45% 감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불복한 셸은 이듬해 네덜란드 법원에 항소했다.

배당세 15%도 기업들을 옥죈다는 지적이 나온다. 셸은 2021년 사명을 바꾸고 본사를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했는데 네덜란드 배당세를 피한 조치란 분석이 나왔다. 뤼터 총리는 배당세를 탓하면서 “셸과 유니레버가 모두 배당세 때문에 네덜란드를 떠났다”며 “이런 일(기업들의 이전)이 대규모로 발생하도록 놔둔다면 네덜란드는 더 축소된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뤼터 총리까지 직접 나선 네덜란드 정부의 ‘베토벤 작전’은 기업 하기 어려운 환경을 개선해 ASML의 투자를 네덜란드에 집중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더텔레흐라프에 따르면 네덜란드 정부는 외국인 소득세 면세 기간을 과거 수준인 5년으로 되돌리고, 자사주 매입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방안 등을 검토 중이다. 또 기업들의 ‘혁신 활동’으로 인한 이익에 대해 세금 공제를 확대하고 법인세를 대폭 인하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홍석호 기자 will@donga.com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이청아 기자 clearlee@donga.com
#asml#베토벤 작전#글로벌 칩 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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