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비명’ 없는 민주당의 비명 [김지현의 정치언락]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15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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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더불어민주당에선 탈당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이재명, ‘너’ 밑에선 아무것도 할 생각 없다”던 ‘원칙과 상식’ 소속 김종민 조응천 이원욱 의원이 10일 결국 탈당을 선언했고, 다음날엔 이낙연 전 대표도 “민주당은 1인 정당, 방탄 정당으로 변질됐다”고 비판하며 24년 만에 민주당을 떠났습니다.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월 11일 오후 국회에서 민주당 탈당 선언을 위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 전 대표는 이 자리에서 “민주당은 저를 포함한 오랜 당원들에게 이미 ‘낯선 집’이 됐다”고 비판했다. 뉴시스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월 11일 오후 국회에서 민주당 탈당 선언을 위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 전 대표는 이 자리에서 “민주당은 저를 포함한 오랜 당원들에게 이미 ‘낯선 집’이 됐다”고 비판했다. 뉴시스
‘원칙과 상식’ 소속 이원욱 김종민 조응천 의원(왼쪽부터)이 1월 10일 오전 국회에서 탈당 기자회견을 마친 뒤 어두운 표정으로 회견장을 나서고 있다. 뉴스1
‘원칙과 상식’ 소속 이원욱 김종민 조응천 의원(왼쪽부터)이 1월 10일 오전 국회에서 탈당 기자회견을 마친 뒤 어두운 표정으로 회견장을 나서고 있다. 뉴스1
이 대표 입장에선 앓던 이가 한꺼번에 빠져 속이 시원할 것 같습니다. 줄곧 자신의 리더십을 비판하는 비명(비이재명)계가 그동안 얼마나 꼴 보기 싫었겠습니까.

한 야권 원로는 탈당을 고민하는 원칙과 상식 소속 의원 A에게 “어차피 이재명이 당신에게 공천을 줄 리가 없다. 그냥 당에 남아 불출마를 선언하거나, 나가서 신당을 차려라. 다만 불출마는 비겁해 보인다”고 조언했다고 합니다. 이 대표는 결코 자신을 거스르는 사람에게 보여주기용으로라도 공천을 줄 리 없다는 거죠.

“민주당, 광신적으로 변할 것”
그럼 이제 ‘비명’계가 없는 민주당엔 마침내 평화가 찾아올까요? 꼭 그럴 거 같진 않습니다.

진중권 광운대 특임교수는 10일 CBS라디오에서 “지금 (민주당은) 당의 미래 같은 것들을 잘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이분(원칙과 상식)들이 빠지면서 그나마 이견도 없어지고 집단이 순수해질 것이다. 광신적으로 변한다는 얘기”라고 했습니다. “(당이) 나아지려면 다른 의견을 내야 되는데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들을 가만 놔두지 않고 공격해서 잘라버리는 정치”라는 거죠.

실제 당내에선 다른 의견은 쉽게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1월 2일 김철민 도종환 박용진 송갑석 오영환 이용우 전해철 홍기원 홍영표 의원은 “분열의 불안함을 차단하고 혁신의 몸부림을 시작할 책임은 이재명 대표와 당 지도부에게 있다. 당내 변화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시간 가기만 기다리는 것으로 통합과 혁신을 만들 수 없다”고 촉구했습니다. 민주당 의원 전체 대화방에도 성명을 올렸지만 민망할 만큼 아무 반응도 없었다죠.

성명을 주도했던 한 의원은 “정말 어렵게 뜻을 모아 낸 성명인데, 그 직후 이 대표가 습격당해 묻혔다”고 아쉬움을 토로하더군요. 또 다른 의원은 “초선부터 중진까지 나름 의기투합해서 용기 내어 올린 글이었을 텐데 아무도 대답을 안 하더라”며 “아무도 굳이 말을 안 하려 하는 것, 그게 공포정치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공천을 앞두고 누가 굳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 하겠냐는 거죠.

‘개혁신당’(가칭) 창당을 이끄는 이준석 국민의힘 전 대표도 민주당의 ‘침묵’ 분위기를 비판했습니다. 그는 12일 KBS라디오에서 “이 전 총리(이낙연)도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자’는 것부터 많은 주장을 했지만, 어느 것 하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것을 상대하는 태도 속에서 이 전 총리에 대한 무시, 때로는 멸시까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민주당에 중진 의원들이 많지 않냐”며 “누구라도 이 전 총리가 하는 주장 중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받아들이자고 (말하는) 용기를 냈어야 했는데 그런 말을 못 하는 분위기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집단린치’도 불사하는 전체주의
그런데 솔직히 저 같아도 굳이 말하기 싫을 거 같습니다. 이 대표의 뜻을 조금만 거슬러도 강성 지지층(한때 스스로 ‘개딸’이라더니 이제는 ‘개딸’이라 부르면 안 된다는 그분들)은 물론이고 오매불망 공천만 기다리는 당내외 친명 인사들이 득달 같이 달려들어 집단린치에 나서니 말입니다.

그 시작은 일단 탈당자들을 향한 거친 공격일 겁니다. 정청래 최고위원은 이 전 대표를 향해 “생존형 탈당” “이낙연은 2021년 1월 박근혜 사면론으로 정치적 폭망의 길로 들어섰고, 2024년 1월 탈당으로 정치적 죽음의 길로 들어섰다”고 했습니다. 이외에도“제2의 안철수의 길”(윤준병 의원) “선택받지 못했을 때 정치인의 진정한 바닥을 볼 수 있다”(우원식 의원) 등 비난이 쏟아졌죠.

원칙과 상식을 향해서도 “이원욱, 김종민, 조응천 의원은 민주당 당원들이 좋아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의힘이 좋아하는 정치인”(양이원영 의원) “원칙과상식? 공천과 탈당!”(김용민 의원) 등 비아냥이 이어졌고요.

이재명 대표는 침묵으로 이들의 공격을 암묵적으로 방치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비명계의 사퇴 요구에 ‘단합’ ‘통합’ 등 원론적 입장만 되풀이하던 그는 이들이 실제 탈당했는데도 한 마디 입장도 내지 않았죠.

참고로 국민의힘만 해도 지난달 27일 이준석 전 대표가 탈당을 선언하자 “감사했고, 앞으로 뜻하는 바 이루길 바란다”는 공식 입장을 냈습니다. 윤재옥 원내대표는 당일 방송 인터뷰에서 “당 대표를 지내신 분이 탈당하게 된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면서도 “어쨌든 새로운 출발이 잘 됐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박정하 수석대변인도 구두 논평을 통해 “이 전 대표는 우리 당에서 오랫동안 당원으로 활동했다. 그동안의 활동에 감사하게 생각한다”“앞으로도 뜻하는 바 이루시길 바란다”고 했고요.

물론 그 속뜻은 ‘그 동안 더러웠고 다신 보지 말자’였더라도, 최소한 이런 공식 입장이라도 내는 게 한 때 동료였던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요. 일반 회사에서도 퇴직하거나 이직하는 사람에게 그 동안 좋았든 싫었든 인사는 하는데 말이죠. 민주당엔 그런 최소한의 동료 의식조차 남아있지 않은 듯합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10일 서울대병원에서 퇴원하며 입장문을 읽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 대표는 이날 직접 마이크를 잡고 “증오의 정치를 끝내야 한다”고 했다. 뉴스1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10일 서울대병원에서 퇴원하며 입장문을 읽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 대표는 이날 직접 마이크를 잡고 “증오의 정치를 끝내야 한다”고 했다. 뉴스1
혹시 이 대표가 피습 후 컨디션이 아직 회복되지 않아 그런 것 아니냐고요? 그러기엔 10일 서울대병원에서 퇴원하면서 육성으로 “증오 정치를 멈추자”고 한참을 이야기했고, 11일 이 전 대표의 탈당 선언 직후엔 보라는 듯 페이스북에 “고 조연우 위원장님의 영면을 기원한다”는 글을 올렸더군요. 탈당 관련 입장을 충분히 낼 수 있지만, 안 내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걸로 해석됩니다. ‘친명’ 현근택 민주연구원 부원장의 성희롱성 발언이 논란이 되자 병상에서도 “현근택은 어느 정도로 할까요? (컷오프는) 너무 심한 거 아닐까요”라고 걱정하던 것과 상반되는 모습입니다.

강선우 대변인은 12일 최고위원회의 후 백브리핑에서 “이낙연 전 대표가 민주당을 저격하면서 탈당했지만 그래도 전임 당 대표였는데 고생했다는 예우 인사도 없고 비판만 있다. 이게 노무현 정신에 맞느냐”는 한 질문에 “그건 언론인 여러분들이 해석하시면 될 듯”이라고도 하더군요.

‘친명’ 좌장인 더불어민주당 정성호 의원이 1월 9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이재명 대표와 텔레그램 메시지를 주고받는 모습. 두 사람이 친명계 현근택 민주연구원 부원장의 ‘성희롱 의혹’에 대한 징계 수위를 논의하는 모습에 ‘사당화’ 논란이 일었다. 이데일리 제공
‘친명’ 좌장인 더불어민주당 정성호 의원이 1월 9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이재명 대표와 텔레그램 메시지를 주고받는 모습. 두 사람이 친명계 현근택 민주연구원 부원장의 ‘성희롱 의혹’에 대한 징계 수위를 논의하는 모습에 ‘사당화’ 논란이 일었다. 이데일리 제공
그나마 쓴소리하던 이낙연 전 대표와 원칙과 상식 멤버들, 이상민 의원까지 모조리 빠졌으니 이제 진짜 민주당이 원했던 ‘원보이스’가 될 수 있겠네요. 방향성에 대해 아무도 쉽게 지적하진 못할 거고요. 쓴 소리를 내는 자가 곧장 다음 타깃이 될 테니 말입니다. 극단적 전체주의 속에 ‘일단 공천까지는 입 다물고 있겠다’는 사람들이 다수가 될 테고, 도저히 못 버티는 사람들은 추가로 당 밖으로 튕겨져 나가겠죠.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서 주인공인 권력자 돼지 ‘나폴레옹’은 자신이 기른 사나운 개 아홉 마리를 호위병으로 앞세워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열리던 동물들 간 회합도 일방적으로 중단하죠. “앞으로 회합은 중지한다. 토론은 일체 없다”는 그의 말에 일부 돼지들이 반발하지만, 으르렁거리는 개들 앞에 다들 결국 침묵합니다.

몇몇 돼지들은 그래도 좀 더 똑똑했다. 앞줄에 앉은 네 마리 젊은 돼지가 못마땅한 듯 째지게 소리를 내더니 벌떡 일어나 동시에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자기 나폴레옹 주위에 앉아있던 개들이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깊숙이 뱉어내자 돼지들은 아무 소리 못 하고 다시 앉았다.
그 뒤로 권력을 쥔 돼지들은 자신들만의 ‘특별위원회’에서 주요 결정을 내리고 다른 동물들에게 일방 통보하죠. 동물농장 내 철칙이었던 ‘7계명’도 필요할 땐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수정하고요. 어디서 많이 본 장면들 같습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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