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거리엔 아직도 탄 냄새 진동… 주민들 “러 악마들 다시 올 것”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6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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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軍 학살에 죽음의 도시로

러 미사일에 무너져 내린 아파트 11일 우크라이나 보로댠카에서 만난 주민 페트로 씨는 아파트 앞에 파인 구멍을 
가리키며 “러시아군의 미사일이 여기 있던 지하벙커를 타격해 숨어있던 주민 18명이 숨졌다”고 했다. 보로댠카=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러 미사일에 무너져 내린 아파트 11일 우크라이나 보로댠카에서 만난 주민 페트로 씨는 아파트 앞에 파인 구멍을 가리키며 “러시아군의 미사일이 여기 있던 지하벙커를 타격해 숨어있던 주민 18명이 숨졌다”고 했다. 보로댠카=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보로댠카·이르핀=김윤종 특파원
보로댠카·이르핀=김윤종 특파원
“여기가 우리 아파트 지하 벙커가 있던 자리예요. 러시아 미사일이 여기를 정통으로 맞혀 벙커 안에 숨어 있던 18명이 죽었습니다.”

11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보로댠카에서 만난 주민 페트로 씨(65)는 무너진 아파트 앞에 둥그렇게 팬 곳을 가리키며 기자에게 말했다. 수도 키이우에서 54km 떨어진 보로댠카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인 3월 최대 격전지였다. 러시아군은 키이우로 가는 첫 관문인 이곳에 대대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1만2000명이 살던 소도시는 ‘죽음의 도시’로 변했다.

이날 보로댠카 시내의 한 대형 상가는 과자가 부스러진 듯 무너져 내려 건물 가운데가 뻥 뚫려 있었다. 주민들은 3월 2일 도시 곳곳에 러시아군의 집속탄이 떨어졌다고 전했다. 집속탄은 탄두가 폭발할 때 내부의 작은 폭탄 수백 개가 흩뿌려지는 대량살상무기다. 국제법으로 사용이 금지됐다. 페트로 씨는 “조만간 다시 러시아군이 우리 마을을 공격할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러시아 대통령)이 키이우를 재공격하려면 다른 선택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키이우 인근 이르핀도 러시아군이 3월 점령한 뒤 최소 290명의 민간인이 집단학살을 당했다. 수많은 건물이 불에 타 3개월이 지난 이날까지도 거리에 탄 냄새가 진동했다. 주택가 한 산부인과 정문에는 총알 세례 자국이 선명했다. 인형과 장난감이 길가에 널브러져 있었다. 주민 세니아 씨는 기자에게 “우리 집 마당뿐 아니라 일대에 러시아군 지뢰가 묻혀 있으니 조심해서 이동하라”고 일러줬다.

수도권 일대 국도에 러시아군이 4월 퇴각하면서 버리고 간 탱크와 장갑차들이 곳곳에 보였다. 주민들은 “7월에 ‘러시아 악마’들이 수도권을 다시 공격해 올 수 있다”며 불안해했다.

서방 장거리포 내달 우크라에… 시민들 “러軍 또 와도 결사항전”


우크라 보로댠카-이르핀 르포



‘전쟁의 화마’ 또 덮칠까 불안감 속
러軍 몰아낸 자신감에 전의 다져 “마을 안떠나고 러軍에 맞서 싸울것”
서방 지원 장거리 무기 내달 배치, CNN “이번 전쟁의 변곡점 될것”

“조심하세요! 취재하다가 죽고 싶습니까. 정말 긴장해야 합니다.”

11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인근 도시인 이르핀 주민 세니아 씨(41)는 집 마당으로 들어서는 기자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기자가 집 앞에 동그랗게 파인 땅 옆을 무심코 지나치던 순간이었다. 세니아 씨는 “지난주에도 우크라이나군 공병들이 와서 지뢰 검사를 했다. 이번 주에 지뢰를 추가로 제거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러시아군은 3월 2일 이르핀을 점령했을 당시 그의 집 주변 등 마을 일대에 지뢰를 설치했다.
○ 민간인 주거지 곳곳에 남은 러 지뢰
세니아 씨 집에 들어서자 포격으로 무너진 집 한쪽을 비닐로 막아놓은 방이 보였다. 그 안에서 어린 자녀들이 러시아군 AK소총 총알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세니아 씨 남편은 3월 포격 당시 러시아군과 맞서 싸우다 다리에 총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세니아 씨는 아이들 손에서 총알을 빼앗으며 말했다. “무섭긴 하지만 다시 러시아군이 쳐들어와도 마을을 떠나지 않고 맞서 싸울 겁니다.”

기자가 10, 11일 수도권 거점 도시인 보로댠카와 이르핀을 오가며 만난 주민들은 삶의 터전이 또다시 전쟁으로 짓밟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동시에 “러시아군이 다시 와도 물리칠 수 있다”며 전의를 다졌다. 보로댠카 주민 막심 씨는 “우리 도시에서 러시아군이 고문과 집단학살을 자행해 이번 전쟁의 큰 피해 지역으로 알려졌지만 한편으론 3월 말 러시아군을 몰아내면서 반격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보로댠카, 이르핀 주변 국도에는 러시아군이 퇴각하면서 버리고 간 탱크, 장갑차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 같은 군 장비들을 일부러 치우지 않고 있다. 주민들은 “버려진 러시아군 전차는 우리에겐 승리와 항전의 상징”이라며 “부서진 러시아군 탱크를 보면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고 했다.

키이우 도심 광장에는 러시아군이 버리고 간 탱크와 장갑차, 미사일 등 각종 무기들이 설치미술 작품처럼 상세한 설명 문구와 함께 전시돼 있었다. 주변에는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대학생 드미트로 씨는 “지금은 러시아와 평화협상을 할 때가 아니다. 우리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러시아와 싸우고 버텨야 할 때”라고 말했다.
○ 곳곳에 러軍 버린 탱크·장갑차들
러軍 퇴각때 버려진 탱크들 보로댠카 지역 국도에 방치된 러시아군 탱크.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군이 4월 초 퇴각하면서 버리고 간 군 장비를 항전의 상징물로 보고 치우지 않고 있다. 보로댠카=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러軍 퇴각때 버려진 탱크들 보로댠카 지역 국도에 방치된 러시아군 탱크.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군이 4월 초 퇴각하면서 버리고 간 군 장비를 항전의 상징물로 보고 치우지 않고 있다. 보로댠카=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수도권 주민들 사이에선 ‘곧 러시아군이 다시 공격해올 것’이라는 두려움과 ‘맞서 싸우겠다’는 전의가 교차하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군이 다음 달 러시아군의 보급로를 끊는 대규모 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긴장감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동부 돈바스 지역에 전력을 집중시켜온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동북부 도시 하르키우 북쪽의 러시아 국경을 통해 군수품을 보급받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이 보급로를 집중 포격하기 위해 서방에 장거리용 무기를 지속적으로 요청해 왔다. 우크라이나 국방정보국 바딤 스키비츠키 부국장은 10일 “러시아의 포 10∼15문에 대항하는 우리의 대포는 1문뿐”이라며 “서방의 무기 지원에 모든 게 달려 있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일 최대 사거리 80km인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HIMARS), 중거리유도다연장로켓시스템(GMLRS) 등 장거리 미사일 시스템을 포함해 7억 달러(약 8800억 원) 규모의 군사 원조를 약속한 상태다.

이 무기들이 전선에 배치돼 러시아군에 타격을 입히면 수도권은 러시아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 키이우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5일 “우크라이나에 장거리 무기를 지원하면 새로운 목표물로 공격을 확장하겠다”고 경고한 직후 미사일 공습이 재개됐다. 미 CNN은 “서방 장거리포가 지원되는 7월이 이번 전쟁의 또 다른 변곡점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보로댠카·이르핀=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우크라이나#보로댠카#죽음의 도시#러시아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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