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진화의 비밀 푸는 슈퍼컴퓨터… 주요국, 자존심 걸고 성능경쟁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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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부터 코로나 치료제까지… AI 접목 통한 각종 연구활동 활발
‘엑사플롭스급’ 시대 개막 초읽기, 현존 최강은 513PF 일본 ‘후가쿠’
미국, 1위 탈환 노리고 심기일전… 중국도 성능 500위 내 다수 포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의 슈퍼컴퓨터 5호기 ‘누리온’. 아래쪽은 전 세계 슈퍼컴퓨터 성능 1위에 올라 있는 일본의 슈퍼컴퓨터 ‘후가쿠’. KISTI·일본이화학연구소 제공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의 슈퍼컴퓨터 5호기 ‘누리온’. 아래쪽은 전 세계 슈퍼컴퓨터 성능 1위에 올라 있는 일본의 슈퍼컴퓨터 ‘후가쿠’. KISTI·일본이화학연구소 제공
고정환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 연구팀은 스위스 제네바 인근에 설치된 세계 최대 과학실험장치인 거대강입자가속기(LHC)를 이용해 새로운 물리 현상을 탐색하고 있다. LHC에 설치한 4개 검출기 중 하나인 뮤온압축솔레노이드(CMS)에서 얻은 입자 간 충돌실험 데이터를 분석해 아직 관찰된 적이 없는 초대칭 입자의 흔적을 찾고 있다. 학자들은 보통 입자(표준모형 입자)가 초대칭 입자와 ‘보이지 않는 짝’을 이루고 있어야만 여러 자연의 난제들도 설명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막대한 양의 실험데이터를 분석하는 데는 인공지능(AI)인 딥러닝 기법과 함께 슈퍼컴퓨터 5호기 ‘누리온’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고 교수는 지난달 25, 26일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주관으로 열린 ‘2021 한국슈퍼컴퓨팅 콘퍼런스(KSC2021)’에서 “입자 간 충돌 데이터 안에는 과학자들이 보고 싶은 것 외에 불필요한 데이터(노이즈)가 많이 섞여 있다”며 “딥러닝과 결합한 슈퍼컴퓨터가 없다면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기 어렵다”고 말했다.

○ AI와 결합해 활발해진 슈퍼컴 활용 연구
‘누리온’은 도입 당시부터 세계 최대 규모의 우주 진화 시뮬레이션을 예고했다. LHC에서 얻을 수 있는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빅뱅 직후 생성된 우주를 시간에 따라 진화시키는 방식을 알아내는 게 목표다. 고 교수는 “이미지 분석에 많이 활용되는 딥러닝 기법인 합성곱신경망(CNN)에 CMS데이터를 누리온에 입력하고 학습시키면 일반 컴퓨터보다 20배 빠른 속도로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성능이 우수한 슈퍼컴은 일본의 ‘후가쿠’다. 일본 이화학연구소와 후지쓰가 2020년 6월 구축한 후가쿠는 연산성능이 513페타플롭스(PF·1PF는 1초에 1000조 번 연산)로 전 세계 슈퍼컴 중에서 가장 빠르다.

국가 간 경쟁도 치열하다. 미국이 1위 재탈환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고 중국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이번 행사에 참여한 이세용 미국 오크리지 국립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과거에는 성능 순위 500위 안에 드는 슈퍼컴퓨터는 대부분 미국 보유였는데 중국이 2010년 슈퍼컴퓨터 ‘톈허-1A호’를 개발하며 1위에 등극한 이후 500위 내 슈퍼컴퓨터의 대다수가 중국의 슈퍼컴퓨터”라고 했다.

○ 슈퍼컴 시장 둘러싼 반도체 기업 각축
슈퍼컴 시장을 둘러싼 기업들의 기술 경쟁도 첨예화하고 있다. ‘엑사플롭스(EF·1EF는 초당 100경 회 연산) 시대’로 나아가는 슈퍼컴퓨터의 속도에 발맞춰 중앙처리장치(CPU)와 그래픽처리장치(GPU)도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번 콘퍼런스에서도 AMD, 인텔, 엔비디아 등 주요 기업들이 참여해 자사의 최신 기술들을 소개했다.

대표적 선두 주자로 꼽히는 미국 반도체 회사 AMD는 미국 오크리지 국립연구소에서 구축하고 있는 ‘프런티어’ 구축에 참여했다. 프런티어는 AMD의 초고성능 CPU와 GPU를 탑재해 1.5엑사플롭스 이상의 연산 처리능력을 가진 것으로 공개됐다.

인텔도 올해 6월 국제 슈퍼컴퓨팅 콘퍼런스에서 차세대 제온 스케일러블 프로세서인 ‘사파이어 래피즈’와 ‘폰테베키오 그래픽 처리장치’를 공개하며 차세대 슈퍼컴 시장에 도전장을 내놨다. 나승주 인텔 코리아 상무는 “사파이어 래피즈는 내년 상반기, 폰테베키오는 이르면 내년 하반기쯤 슈퍼컴 시장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엔비디아도 암페어 아키텍처라는 기술로 고성능 저전력 슈퍼컴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정소영 엔비디아코리아 상무는 “엔비디아의 장치들이 소비전력이 높은 것으로만 알려졌지만, 소비전력 대비 슈퍼컴퓨터 성능을 순위로 매겼을 때 상위 10개 중 9개가 엔비디아 장치를 사용한 것일 정도로 그린테크놀로지를 선호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수석연구원은 “현재 가장 높은 성능을 내는 슈퍼컴퓨터들을 보면 대부분 CPU와 GPU를 혼합해 사용하거나, CPU만 사용하더라도 기존의 CPU가 아닌 자체 개발한 CPU를 사용하는 이기종 체제를 선호하고 있다”며 “이런 특징을 뒷받침할 시스템을 개발하는 게 슈퍼컴 경쟁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엑사플롭스급 경쟁 본격화
미국과 중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주요국은 엑사플롭스급 기술을 선점하기 위해 매년 조 단위의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미국은 올해 한 해에만 18억 달러(약 2조 원)를 투자해 2023년까지 엑사플롭스급 슈퍼컴퓨터 3기를 개발할 계획이다.

막대한 데이터 처리와 계산 필요성이 더욱 높아지면서 슈퍼컴은 기초과학 연구 외에도 기후변화와 암 치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연구 등 분야로 점차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누리온 역시 138억 년 전 빅뱅(대폭발) 이후 새로운 물리 현상 법칙뿐만 아니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치료제 후보를 찾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기후연구자들은 올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기후모델 연구는 슈퍼컴퓨터가 없다면 사실상 진행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김도영 AMD코리아 이사는 “슈퍼컴이 테라(1조) 시대, 페타(1000조) 시대를 넘어 엑사의 시대로 진입했다”며 “당분간 엑사플롭스 슈퍼컴 기술을 둘러싼 경쟁이 치열할 것으로 본다”고 했다.


서동준 동아사이언스 기자 bios@donga.com
#슈퍼컴퓨터#ai#엑사플롭스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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