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이정은]권력자의 성추행이 들통났을 때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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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인신공격, 정치적 음모론까지
2차 피해 키우는 악질 대응 멈춰야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불쾌한 신체접촉과 성희롱을 하는 행위. 최소 11명의 여성에게 가한 앤드루 쿠오모 뉴욕 주지사의 성추행은 조사 보고서 속의 묘사를 읽는 것만으로 역겹다. 하지만 그것만큼이나 경악할 상황들은 성추행 이후에도 벌어졌다.

165쪽에 달하는 보고서는 최초 폭로가 나온 지난해 12월 이후 쿠오모 주지사가 사건을 어떻게 무마하려 했는지를 낱낱이 들춰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성추행을 고발한 여성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신뢰도 흔들기. 쿠오모 측은 최초 폭로자인 린지 보일런 전 보좌관의 업무수행 능력에 문제가 있었고 부하 직원을 가혹하게 다뤘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보일런이 “주지사님이 잘생겼다”고 했다거나 “그가 너무 좋아”라고 말한 적이 있다는 주변인들의 증언을 흘리기도 했다. 성추행을 상호 교감하의 호감 표시로 둔갑시키려는 전형적인 술수다.

힘없는 피해 여성만 타깃이 된 게 아니었다. 쿠오모 측은 수사를 지휘한 준 김 전 뉴욕남부지검장 대행을 포함한 수사관들의 뒤를 캐려 했다. 김 전 대행이 중립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식의 공격도 지속했다. 이 사실은 쿠오모의 전직 측근이 관련 지시를 받은 문자메시지를 통해 드러났다. 성범죄 고발을 정치적 음모로 포장하려는 시도도 빠지지 않는다. 쿠오모 측은 “보일런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열성 지지자였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앞세워 ‘민주당 대선주자 공격’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우려 했다.

대응 전략을 짜기 위한 대책회의에는 성소수자들을 위해 싸워온 인권단체 대표는 물론이고 성폭력 피해 여성 지원센터의 대표 같은 인사들까지 포함돼 있었다. 이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쌓아온 오랜 가치관과 신념보다 권력자와의 친분, 그리고 그가 나눠줄 한 줌의 권력이 앞섰음을 보여주는 명단이다.

이런 일련의 대응을 놓고 뉴욕타임스는 ‘광란적(frantic)’이라고 표현했다. 여성 인권, 그리고 이를 보호할 법률 시스템이 세계 최고 수준인 미국에서조차 이런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은밀히 행해지는 직장 내 각종 성폭력을 법의 이름으로 막기에는 권력의 힘이 여전히 너무 세고 우악스럽다.

쿠오모 주지사는 조사 결과를 부인하며 사임을 거부하고 있다. 6일 기자회견에서는 “검찰이 정치적 이유로 매복 공격을 했다”고 주장했고, 피해 여성들의 증언은 ‘허구’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치욕스러운 탄핵에 직면한 것은 물론이고 형사처벌을 앞두고 체포될 수도 있는 처지에 놓였다. 물밑에서 자신을 도우려던 방송국 앵커 동생마저 퇴출 위기로 밀어 넣었다. 우군들은 속속 등을 돌리면서 떨어져 나가는 형국이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지만 특히나 공직자의 잘못은 그 자체만큼이나 사후 대응과 수습이 중요하다. 공(功)을 보존하고 싶다면 과(過)에 대해서는 깨끗이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면 된다. 신속하고 깔끔하게. 범죄의 경우 2차 피해의 상처가 더 깊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래야 한다.

‘쿠오모 성추행 보고서’ 내용은 한국에서 유사한 사건을 놓고 벌어졌던 요란한 공방들과 어딘가 닮아 있다.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비슷한 사건들도 대부분 쿠오모식 대응의 일부이거나 조합이다. 책임에서 눈감아 버리는 가해자와 이들이 되풀이하는 ‘나쁜 각본’, 주변의 얄팍한 충성심이 지금도 상황을 계속 악화시키고 있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ee@donga.com
#권력자 성추행#2차 피해#악질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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