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황인찬]北 금기어 ‘오빠’

황인찬 논설위원 입력 2021-07-10 03:00수정 2021-07-1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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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경제가 장기간 침체하면서 남편은 실업자가 되고, 아내가 장마당에 나가 장사를 해서 가계를 꾸려나가는 가정이 늘고 있다. 이런 세태를 반영해 ‘낮 전등’ ‘풍경화’ ‘자물쇠’ 등 집에 있는 남편을 가리키는 은어가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다. 낮에 아무 쓸모도 없는 전등, 하는 일 없이 벽에 걸려만 있는 그림, 집만 지키고 있는 자물쇠와 같다는 의미다. 집에서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남편을 뜻하는, 남한의 ‘삼식이’와 같은 표현이다.

▷연애에서도 북한은 남한을 닮아가고 있다. 북한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노동당의 허락을 받아야 결혼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중매결혼이 대세가 됐고, 지금은 연애결혼이 보편화됐다. 북한 여성들은 지금까지는 애인을 동지나 동무, 남편을 여보라고 불러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애인이나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남한의 드라마와 영화에 익숙해지면서 나타난 변화다. 북한 당국은 이런 변화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애인이나 남편에 대한 오빠 호칭을 금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단속에 걸리면 처벌까지 한다.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이후 속속 들어선 장마당 등을 통해 남한의 드라마, 영화, 가요가 북한 주민에게 퍼진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카세트, 비디오테이프에 담겼던 한류 콘텐츠는 이제 CD, DVD를 넘어 USB에 담겨 퍼져 나간다. 밤새 영상을 보는 바람에 퀭해진 눈을 일컫는 은어, ‘너구리 눈’이 생겨났을 정도다. 북한 당국은 그동안 “남조선이 공화국을 모략하려 경제발전상을 꾸며낸 조작 영상을 만든다”는 식으로 한류 콘텐츠 확산을 통제해 왔지만 MZ세대에게 통할 리가 없다.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한류에 개방적인 모습을 노출한 적이 있다. 2018년 걸그룹 레드벨벳의 ‘빨간 맛’의 평양 공연을 보고 박수까지 쳤다. 부인 리설주는 그해 평양에 간 한국 특사단 앞에서 김정은을 ‘원수님’이 아닌 ‘남편’이라고 불렀다. 부부 관계가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리설주가 김정은의 팔짱을 끼고 공개 석상에 나선 이후 북한 거리에서는 팔짱을 낀 연인들의 모습이 늘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오빠와 같은 친숙한 호칭의 사용이 늘어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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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사람들이 평소 갖고 있는 생각을 반영한다. 북한에서 남한식 표현이 널리 퍼진 것은 남한의 언어와 문화를 의심하거나 신기해하는 것을 넘어 의식 깊숙이 스며들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북한 당국이 겉으로 드러나는 주민들의 남한식 말투는 통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까지 바꾸는 것은 무리로 보인다.

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북한#금기어#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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