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자에게 빚 떠넘기는 가혹한 상속법 개정해야[동아시론/배인구]

배인구 법무법인 로고스 변호사·전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 입력 2021-06-05 03:00수정 2021-06-05 03:00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부모 무지로 채무 떠안는 미성년자의 운명
상속포기제도 몰랐다고 대신 빚 갚는 신세
본인 의사나 귀책사유 없는 채무 부담은 불합리
최소한 미성년 상속인은 채무에서 보호해야
배인구 법무법인 로고스 변호사·전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
2011년 서울가정법원에서 판사로 재직하면서 처음 알았다. 상속 포기와 한정승인 신고를 수리해 달라는 사건이 너무너무 많다는 것을. 그해 사법연감에 따르면 상속 포기와 한정승인을 포함한 상속 관련 비송(非訟) 사건이 3만 건을 넘는다. 2020년 사법연감에는 그 수가 4만3000건을 상회한다고 적혀 있다.

피상속인 사망 후 직계비속이 상속을 포기한다고 상속인들이 피상속인의 채무에서 해방되지 않는다. 상속인들이 피상속인의 채무 부담에서 벗어나려면 피상속인의 사촌 이내 친족이 모두 상속을 포기해야 한다. 상속 포기를 구하는 사건이 많은 이유다. 또 그런 이유로 상속을 포기하려는 청구인이 여러 장에 걸쳐 적혀 있고, 그들의 관계가 그림으로 표시된 가계도가 한 장 가득한 심판청구서도 제법 많이 보았다. 이렇게 한꺼번에 상속을 포기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1인 가구가 급증하고 복잡해진 현대사회에서 상속 포기 신청을 해야 한다고 알려 주려고 해도 연락할 수 없는 사람이 결국 채무자가 된다.

연락 두절된 친척만 문제가 아니다. 이혼 가정이 늘면서 같이 살지 않는 부모가 상속 포기를 하거나 그 부모가 피상속인이 되는 경우는 더 문제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가 할아버지 사망 후 상속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다른 형제들 역시 상속을 포기하면 ‘나’가 상속인이 된다. 아버지가 ‘나’가 상속인이 된다는 점을 몰라 소식을 끊고 지낸 어머니에게 상속포기 사실을 알려주지 않으면 어느 날 ‘나’에게 채권자가 보낸 채권 추심 서류가 배달될 수 있다. 이런 경우 ‘나’는 이제 비로소 상속인이 된 사실을 알았으니 가정법원에 3월 내에 상속 포기의 수리를 구하는 심판청구를 하여 피상속인의 채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나’가 미성년자인데 법정대리인인 어머니가 상속 포기나 한정승인을 구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면, 성년이 되어 할아버지의 채권자로부터 추심을 받게 되고 아무런 재산이 없는 ‘나’는 개인파산을 신청할 수밖에 없다. 미성년자는 법정대리인이 언제 알았는지를 기준으로 기간을 산정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런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고 하겠지만 바쁘고 고달픈 일상을 보내면서 상속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부모가 여전히 존재한다. 지난해 선고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대법원 2020. 11. 19. 선고 2019다232918 판결)의 사안도 안타깝지만 미성년 상속인이 부모의 무지로 인해 채무를 가득 안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알려주었다. 아버지의 빚이 본인의 책임인가, 과연 채권자는 어린 아들이 자라서 빚을 갚을 것을 전제로 그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준 것인가. 상속포기제도를 몰라 피상속인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도 그리 유쾌하지 않은데, 부모가 상속 포기를 해주지 않아 자녀 본인은 상속 포기 여부를 선택할 여지도 없이 채무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주요기사
채권자는 채무자의 책임재산에서만 변제를 받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채무자의 상속인이라는 이유로 피상속인의 재산을 넘는 범위의 채무를 모두 부담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헌법재판소는 “상속채권자는 일반적으로 피상속인을 신뢰하여 그의 일반재산을 담보로 보고서 거래한 것이지, 그의 사망 후 상속인이 채무를 승계할 것까지를 기대하고서 거래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고 판시한 바 있다(헌재 1998. 8. 27.선고 96헌가22 등 결정). 이 헌법재판 사건에서 서울지방법원이 밝힌 의견은 25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보아도 명쾌하다. “상속채권자의 보호는 피상속인이 남긴 재산의 범위 안에서 채권 회수를 보장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나아가 상속인의 고유재산으로 상속채권자에 대한 피상속인의 채무를 갚도록 하는 것은 부당한 희생의 대가로 명분 없는 이익을 보장하는 것이다. 채무자 본인의 의사나 그의 귀책사유 없이는 그에게 채무를 부담시킬 수 없다는 근대사법의 원칙에 비추어 보면 불합리하고 부당하다.”

그렇다. 특히 상속인이 미성년자라면 더욱 그러하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부모(법정대리인)의 대리권 행사로 자녀에게 제한 없이 채무를 발생시키는 것은 미성년자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제 우리 상속법도 근본적으로 개정할 필요가 있다. 특히 최소한 미성년 상속인은 피상속인의 채무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있다. 미성년 상속인이 성년이 되는 출발점에 채무자로 서게 만드는 것은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하다.

배인구 법무법인 로고스 변호사·전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
#미성년자#빚#상속법#개정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