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의 영원한 조수” 한국 산의 아름다움 남기다

이호재 기자 입력 2021-06-04 03:00수정 2021-06-04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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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산악사진가 김근원의 아들
21년만에 사진집 ‘산의 기억’ 펴내
“아버지의 흑백사진 보다 보면
한국 산에 드러눕고 싶어진다”
고 김근원 산악사진가가 1958년 10월 찍은 설악산 십이선녀탕. 그의 아들 김상훈 씨는 “부푼 찐빵처럼 생긴 암반에서 미끄러질까 조심스레 걷는 산악인의 걸음걸이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열화당 제공
오래된 흑백 사진 속에 경남 함양군과 하동군의 경계에 있는 지리산 벽소령(碧宵嶺) 부근의 모습이 담겨 있다. 사진이 찍힌 건 1959년 8월. 한여름인데도 나무들이 발가벗은 채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다. 원래는 사람의 손길이나 자연 재해를 겪지 않은 원시림인데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6·25전쟁 후 월북하지 못하고 남한에 남아있던 지리산 지역 공비를 토벌하기 위해 남측 군경이 1950∼1956년 실시한 지리산공비토벌작전 중 의도적으로 낸 산불 때문이다. 이 사진엔 한국 산의 슬픔이 녹아 있다.

지난달 20일 고(故) 김근원(1922∼2000)의 사진집 ‘산의 기억’(열화당)이 출간됐다. 김근원은 1950∼1980년대 한국 산의 모습을 찍은 1세대 산악사진가다. 책엔 김근원이 필름으로 찍었고 디지털로 복원된 흑백 사진 수백 장이 담겨 있다. 김근원의 아들 김상훈 씨(68)가 아버지와 연이 있는 산악인들과 대화한 뒤 아버지의 시각에서 사진을 찍은 상황에 대해 쓴 글도 담겨 있다. 78세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목소리를 21년 만에 아들이 되살린 셈이다.

김 씨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아버지의 사진집을 뒤늦게라도 펴낸 건 한국 산의 아름다움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했다. 김 씨의 말대로 김근원이 찍은 사진엔 사람의 손이 별로 닿지 않은 시기 한국 산 본연의 모습이 담겨 있다. 1958년 설악산 십이선녀탕을 찍은 사진엔 인공구조물이 전혀 없다. 둥글고 미끄러운 계곡을 산악인들이 조심조심 걸어가는 모습이 아찔하다. 김 씨는 “해외 유명 산들과 달리 한국의 산은 세월이 만든 살결이 살아 있다”며 “아버지의 사진을 보다 보면 한국 산에 드러눕고, 만지고 싶어진다”고 했다.

당시 산과 어울려 살던 사람들의 모습도 사진에 담겨 있다. 김근원은 1958년 설악산 울산바위 부근에서 한 스님이 흔들바위를 밀고 있는 모습을 찍었다. 스님이 자신보다 10배는 큰 흔들바위를 미는 부질없는 행위를 통해 수련을 하는 것만 같다. 스키장이 흔치 않던 1950, 60년대 설악산 대관령 부근에서 스키를 타는 이들이 즐거워하는 사진도 있다. 1969년 설악산 눈사태로 등반대원 10명이 세상을 뜬 십동지 조난 사고의 현장을 담은 아픈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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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씨는 “아버지의 사진을 되살린 건 내가 아버지의 영원한 조수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 씨는 어린 시절 산에 빠져 집안 형편을 신경 쓰지 않았던 아버지를 미워했지만 한편으론 산에 푹 빠진 아버지를 동경해 같은 사진가의 길을 걸었다는 것. 그는 “한 집안에서 아버지와 경쟁하듯 각자 사진을 공부했다”며 “아버지를 자주 따라다니지 않았지만 서로를 의식한 라이벌 관계였다”고 했다. 김 씨는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이 사진을 찍었을까 생각하고, 아버지의 생각을 대필한 과정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왜 그리 산을 사랑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산악사진가#김근원#김상훈#산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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