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쓸어내기… 사연, 종이에 적어 휴지통에 던져버리세요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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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립미술관 김승영 개인전
“마음 비우고 담담히 돌아볼 때”

영상설치작품 ‘Beyond’. 검은 물 앞에 놓인 너비 11m, 높이 2.7m의 대형 스크린 속에서 불꽃에 휩싸인 도기 물레가 회전한다. 작가는 “죽음을 머금은 삶에 대해 관조할 계기를 마련하고 싶었다”고 했다. 성북구립미술관 제공
영상설치작품 ‘Beyond’. 검은 물 앞에 놓인 너비 11m, 높이 2.7m의 대형 스크린 속에서 불꽃에 휩싸인 도기 물레가 회전한다. 작가는 “죽음을 머금은 삶에 대해 관조할 계기를 마련하고 싶었다”고 했다. 성북구립미술관 제공
“자식의 미래, 성공, 행복. 그리고 분리.”

6월 27일까지 서울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열리는 김승영 작가(58)의 개인전 ‘땅의 소리’ 전시실에 한 관람객이 남긴 글이다.

3층 설치작품 ‘쓸다’는 방문객에게 새벽 어름 고요한 골방 책상에서의 글쓰기 시간을 제공한다. 모바일로 예약해 5명씩 입장한 관람객들이 간격을 멀찍이 띄워 놓인 책걸상에 앉으면, 천창을 넘어온 자연광과 섞인 은은한 푸른색 조명 아래로 ‘스윽, 스윽, 스윽’ 싸리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단출하게 구성된 공간이지만 각자의 책상 위에 놓인 종이에 풀어놓는 이야기는 단조롭지 않다. 옛 연인이 새기고 간 상처, 떠나온 직장에서 겪은 서러움, 앞날에 대한 불안감, 집값과 생활비 고민이 빼곡히 적혔다. 말로 전하지 못한 연심의 고백, 오래전 성북동을 거닐었던 아련한 추억 이야기도 각양각색 손 글씨에 담겼다.

‘뇌_쇠사슬’(2016∼2021년)은 쇳덩이처럼 얽혀 있지만 정작 무게가 없는 ‘생각’을 형상화했다.  성북구립미술관 제공
‘뇌_쇠사슬’(2016∼2021년)은 쇳덩이처럼 얽혀 있지만 정작 무게가 없는 ‘생각’을 형상화했다. 성북구립미술관 제공
김 작가는 “쓸어내고 정리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늘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자유를 위해 무언가를 과감히 내버리는 용기를 내지 못한 채 평생 속박되어 살아간다. 저마다의 까닭과 사연을 잠시 돌아보고, 스마트폰이 아닌 종이에 펜으로 적어 휴지통에 던져버리는 장소를 마련하고 싶었다. 그냥 멍하니 앉아있어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작가가 1995년 자신의 첫 전시부터 빈번히 사용해온 소재인 ‘검은 잉크로 물들인 물’은 2층 영상 설치작품 ‘Beyond’에 쓰였다. 도기 빚는 물레의 회전과 너울거리는 화염을 겹쳐 담은 영상 아래에 커다란 철문 하나가 눕혀져 있다. 천장에서 한 방울씩 똑똑 듣도록 장치한 검은 물이 가장자리를 살짝 높여 가공한 철문을 그릇 삼아 찰랑찰랑 채워진다. 얕지만 심연을 닮은 물을 채운 철문이다.

전시실 한편에 놓인 의자에 앉은 관람객들의 귀에는 화염 끝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불똥 소리가 들린다. 마스크 때문에 또렷하지는 않아도 나무 타는 냄새를 모방한 향기도 채워놓았다. 촉각을 자극하는 열기는 없어 실제 모닥불만큼은 아니지만, 고요한 물 너머로 타오르는 커다란 불의 모습이 머릿속 어지러운 생각을 잠시 내려놓게 만든다.

김 작가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지난해 10월이었던 전시 일정이 연기된 후 작품 구상도 자연히 바뀌었다. 마음을 비우고 생사에 대해 담담히 생각해볼 계기가 무엇보다 필요한 시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기억과 소통의 키워드를 말과 글 없이 감각으로만 표현해 온 그의 작품은 미술관 밖 거리갤러리에서 12월까지 선보이는 공공미술 프로젝트 ‘바람의 소리’에서 모처럼 수다스러워졌다. 붉은색 벽돌과 철물을 활용해 소박하게 마련한 야외 설치작품 곳곳에 소박한 상념과 질문을 적어놓았다. 동네 분위기를 거스르지 않고 원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자리하려 한 기색이 역력하다.

‘당신은 당신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

작가의 꾸밈새 없는 음성을 닮은, 상냥하고 자그마한 글씨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성북구립미술관#김승영#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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