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과 깻단, 그리고 월동준비[포도나무 아래서/신이현]〈66〉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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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
신이현 작가·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
올겨울은 무척 추울 거라고 한다. 옛날에 그런 소리는 귓등까지 오지도 않았는데 요즘엔 덜컥 겁이 난다. 봄에 심은 어린 묘목들이 얼어 죽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내년 봄에 나무 다 얼어 죽었다고 울어도 소용없으니 단속 잘해 두라고!” 레돔에게 단단히 일러둔다. 우리는 완전무장으로 겨울을 나기 위해 왕겨 5t을 구입하고 볏짚도 모은다. 무엇보다 가로수 낙엽을 모두 모으기로 했다. 아저씨들이 담아 놓으면 우리는 보따리째 들고 오면 되니까 진짜 ‘득템’인 것이다.

그런데 올해는 그것도 쉽지 않다. 경쟁자들이 생겼는지 금세 사라져 버린다. 나무 밑에 보초를 서서 보니까 낙엽 보따리를 노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당신도 빨리 움직여야지. 이러다 다 뺏기겠어! ‘빨리빨리’는 한국 사람을 못 당해. 포도나무 다 얼어 죽어도 난 몰라!” 나는 틈만 나면 레돔을 닦달한다. 어디선가 ‘위잉∼’ 하는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까 아저씨 두 분이 기계로 낙엽을 날려서 모아 담고 있다. 후다닥 달려 나가니 꼬부랑 할머니 한 분이 끙끙거리며 유모차에 낙엽 자루를 올리고 있다. 질 수 없다! 나는 청소하는 아저씨의 리어카를 빌려 빛의 속도로 낙엽 자루를 마구 실어서 날아가듯이 다 가져와 버렸다. 겨우 한 자루 싣고 갔다 오니 하나도 남아 있지 않자 할머니는 “아니, 쓸어 담을 때 내가 다 가지려고 눈도장 찍어 놓은 건데…” 하신다.

“눈도장은 무슨, 여긴 우리 동네라고요! 전 이파리 싹 올라올 때 이미 눈도장 찍었거든요. 충주시내 가로수 전부다 우리가 눈도장 찍었어요!” 물론 이런 대꾸를 할 사이도 없이 눈썹을 날리며 리어카를 끌고 다른 쪽 골목길로 달려간다. 할머니는 망연자실하여 “젊은 피 앞에서는 못 이기겠다. 몇 포대라도 남겨주지…”라고 중얼중얼하며 반대쪽으로 걸어가신다.

“여기 이 깻단 주인이 누구예요? 우리가 가져가도 돼요?” 포도밭이 있는 수회리 동네 입구에 들깨를 털고 난 깻단이 있어 여쭤보니 다 가져가란다. 낙엽과 깻단 두 트럭을 밭에 부려 놓고 집에 오니 일이 태산이다. 청소는 물론 처리해야 할 서류도 한 가득이다. 그런데 자꾸 전화가 걸려온다. 수회리 어르신들이 자기 밭에도 깻단이 많으니 당장 가져가라는 것이다.

“아니, 가져가라고 할 때 가져가야지!” 그리 말씀하신다. 바빠 죽겠는데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몰라 무작정 달려가 본다.

그런데 트럭도 들어갈 수 없는 꼬불꼬불한 밭에 집채보다 큰 깻단이 쌓여 있다. “어머나, 이건 어떻게 가져가죠?” 내가 망연자실하니 아저씨가 이미 깻단 묶을 줄까지 곱게 준비해두셨다. “잘 보시게. 이렇게 줄을 놓고 그 위에 깻단을 가지런히 놓아. 그리고 깻단 위에 두 다리를 벌리고 앉아 팍팍 눌러야 해. 그래야 깻단이 슬슬 빠지지 않거든. 단으로 잘 묶어서 저쪽으로 굴려 가면 금방 끝나.” 나는 바닥에 줄을 놓은 다음 깻단을 쌓아 놓고 그 위에 앉아 엉덩이로 마구 짓누르며 두 발로 모아 묶는다. 다섯 개쯤 하니까 허벅지에 쥐가 나고 입에서 끙끙 소리가 흘러나온다. 저쪽에서 차분하게 무와 배추를 뽑던 아저씨가 와본다. “예전에는 다 태워 버렸는데 이제는 그것도 못하니까 사람 몸이 고생이지.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길 거야.” 한마디 하신다.

먼 산에 새가 울고 해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금방 추워진다. 이마에 맺힌 땀이 서늘해지면서 오한이 나려고 한다. “이제 그만하고 가야지. 내일 또 하면 돼.” 배추 뽑던 아저씨가 밭을 떠나면서 무와 배추를 한 보따리 주신다. 우리는 트럭 가득 깻단을 싣고 포도밭에 부려 놓는다.

“이런 거 끌어모으는 건 정말 끝이다!” 이렇게 결심하지만 시내 입구에 낙엽 보따리가 보이면 자동적으로 소리친다. “스톱! 스톱!” 누가 먼저 가져갈까 봐 후다닥 자루를 실어 올린다. 트럭 한가득 낙엽 자루를 싣고 가는 길이 이렇게 뿌듯하다니, 솔직히 이런 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신이현 작가


#월동준비#농사#깻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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