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들[오늘과 내일/김종석]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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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 의존 않은 가르시아, 이충희처럼
본질에 오롯이 집중하는 지혜도 필요

김종석 스포츠부장
김종석 스포츠부장
설레는 마음으로 나선 주말 새벽 골프였는데 난감했다고 한다. 자욱한 안개로 5m 앞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공도 덜 잃어버리며 기대 이상의 타수로 전반 9홀을 마쳤다. 파3홀에선 티샷을 2m에 붙여 버디를 낚았다. “티박스에서 캐디가 앞이 안 보이니 그린 방향이라며 플라스틱 화살표(←)를 놓아주더군요. 거리는 150m만 보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허허.”

후반 들어 청명한 가을 하늘이 드러났지만 스코어는 나빠졌다. 티샷은 붓으로 난초를 치듯 좌우로 날아갔다. 전반엔 어차피 잘 안 보이니 시선을 공에 고정한 채 힘 빼고 가볍게 쳐 의외로 좋은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날이 개면서 날아가는 타구가 궁금해 자주 헤드업을 하게 됐다. 안 보이던 해저드, 벙커 등이 아른거리면서 클럽 선택과 코스 공략에 머리가 복잡해진 것도 되레 실수를 불렀다. 며칠 전 만난 주말 골퍼 A 씨의 라운드 복기였다.

그의 얘기에 최근 미국프로골프(PGA)투어 정상에 오른 세르히오 가르시아가 떠올랐다. 눈을 감은 채 친 퍼트를 앞세운 42개월 만의 우승이었다. 그는 “눈을 감으면 눈을 뜨고 할 때보다 자유로운 느낌으로 일관성을 높일 수 있다”고 한다. 골프 신동이던 가르시아는 프로 데뷔 18년 만인 2017년 마스터스에서 그린재킷을 입으며 메이저 징크스에서 벗어났다. 이후 전성기를 맞나 싶었으나 슬럼프에 허덕였다. 올 2월 이후 12개 대회에서 25위 이내 성적은 한 번뿐. 9년 만에 처음 세계 50위 밖으로 밀려났다. 부진의 주된 이유로 약점이던 퍼팅이 꼽혔다. 지나친 긴장에 몸이 기계처럼 경직되면서 퍼팅이 짧아졌다.

가르시아의 부활은 눈을 감으며 평정심을 유지한 게 비로소 효과를 봤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시즌 1.5m 이내 퍼팅 성공률이 76.6%(151위)에 그쳤으나 이번 대회 나흘 동안 같은 거리에서 한 56개의 퍼팅 중 55개를 성공시켰다. 퍼팅에서도 헤드업은 금물. 공이 홀 바닥에 떨어졌는지는 눈이 아니라 귀(소리)로 확인하라고 한다. 퍼팅 입스가 있는 골퍼는 눈의 움직임이 빨라져 뇌와 근육 컨트롤을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 눈을 감으면 퍼터 헤드 무게를 느끼며 올바른 스트로크 동작을 유도하게 된다. 그린에서 진땀 흘리는 주말 골퍼에게도 유용한 연습 팁이 될 만하다.

아시아 최고의 슈터였던 이충희는 한때 인사성이 없다는 오해를 샀다. 시력이 좌우 0.2 정도여서 5m가 넘으면 상대방을 또렷하게 식별하지 못했다. 그러나 경기에선 렌즈가 없어도 백발백중. “슛은 눈이 아니라 느낌으로 쏜다. 림이 뿌옇게 보여도 상관없다.”

그는 중고교 시절 밤이면 조명도 없이 달빛에 의지해 슈팅을 했다. 깜깜해도 하루 1000개의 슛을 성공시킨 뒤에야 코트를 떠났다. 전기요금을 아끼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긍정적으로 여겼다. 골프 실력도 핸디캡 3의 고수인 이충희는 “야간 훈련으로 거리와 손끝 감각을 확실하게 길렀다”고 말했다. 눈 감고 하는 슈팅이 흐트러진 신체 균형과 모션을 바로잡아주고 자신감을 키워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눈을 감거나, 눈이 나빠도 최고수가 되려면 평소 부단한 노력이 기본 전제다. 이충희의 지론은 ‘땀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이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계절이다. 골프에서도 ‘천고마비’가 중요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지 말고 마음을 비우라’는 의미. 숙일 줄 알고, 눈도 감아야 ‘굿샷’ 소리를 듣는 게 스포츠뿐일까. 시신경과 청각세포에 쓰나미처럼 몰려드는 정보가 혼란을 주거나 독이 되기도 한다. 차마 눈 뜨고 못 볼 일도 쏟아지고 있다. 가끔은 눈과 귀를 닫고 오롯이 본질에 집중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눈을 감아야 비로소 보이고, 귀를 감싸야 온전히 들리는 것들이 있을 테니까.
 
김종석 스포츠부장 kjs0123@donga.com
#이충희#가르시아#골프#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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