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자 0명의 기적[횡설수설/이진영]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10일 03시 00분


코멘트
155명을 태우고 뉴욕을 이륙한 비행기가 새떼와 충돌해 엔진을 잃고 추락한다. 기장은 강 착륙을 시도한다. 사망자는 0명. 2009년 1월 발생한 이 사건은 ‘허드슨강의 기적’이라 불리지만 42년간 2만 시간을 비행한 기장의 노련함, 착륙 후 얼음물에 빠진 승객들을 24분 만에 전원 구조한 듬직한 구조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2010년 9월 규모 7.1의 강진이 뉴질랜드 제2의 도시 크라이스트처치를 강타했지만 단 2명의 부상자만 나왔다. 다들 “기적”이라고 했지만 피해를 막은 건 엄격한 건축 기준이었다. 뉴질랜드는 1931년 강진으로 256명이 숨지자 강력한 내진 설계를 법제화했다.

▷8일 밤 발생한 울산 남구 주상복합아파트 화재는 하마터면 대형 참사가 될 뻔했다. 강풍주의보가 발효됐고, 오후 11시가 넘어 다수가 잠든 시간이었으며, 33층 고층건물인데 울산엔 고가 사다리차가 없었다. 중간층에서 시작된 불길은 강풍을 타고 순식간에 건물 전면을 휘감았다. 하지만 500명이 넘는 주민 가운데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 화재경보기가 제때 울렸고, 스프링클러가 작동했으며, ‘타는 냄새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5분 만에 출동한 소방관들이 불길에 대처할 수 있었다. 주민들은 “하늘이 도왔다”고 했지만 서로서로 도왔다. 대피하는 와중에도 이웃집 벨을 눌러 깨우고, 빠져나온 주민들은 혹시 남아 있을 이웃들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

▷화재 대비 시스템과 더불어 피해 규모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은 외장재다. 2017년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의 86층 토치타워 화재 때 사망자는 0명이었다. 화재 경보가 울렸고 방화벽과 불에 강한 외장재가 불길 확산을 막았다. 같은 해 영국 런던의 24층 그렌펠 타워에선 싸구려 가연성 외장재가 불쏘시개 역할을 했고 80여 명이 숨졌다. 국내 주요 화재 참사도 주로 콘크리트 벽에 스티로폼 단열재를 붙이는 드라이비트 마감재가 피해를 키웠다. 이번 울산 아파트의 외장재는 이보다 비싼 알루미늄 복합 패널로 주상복합 건물에 많이 쓰인다. 드라이비트 마감재보다는 화재에 강하지만 패널 사이에 소음 진동 등의 완충재로 들어간 수지가 불에 잘 타는 성질이 있어 외벽을 타고 불길이 번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에 30층 이상 건물은 4792개다. 고가 사다리차는 23층 높이까지만 진압이 가능하며 도심에선 진입 공간을 확보하기도 어렵다. 불연성 건축자재와 함께 경보 시스템, 스프링클러 및 방화벽 같은 건물 내 화재 대비 시스템이 화재 시 기적을 만든다. 연간 가장 많은 화재 사망자가 발생하는 겨울이 오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울산 남구 주상복합아파트 화재#고층건물 화재#사망자 0명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