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인권 침해 조사, 통일부는 손떼라[오늘과 내일/신석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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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역할 제한해 이념 정쟁 피한 옛 서독 관료들의 지혜 되돌아보라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최근 동아일보의 잇단 단독 보도로 드러난 통일부의 북한 인권 조사 업무 난맥상은 서독에서 성공한 것으로 알려진 이 제도가 과연 한국에 잘 정착될 수 있을지 의문을 품게 한다. 두 나라는 민족 분단과 이념 대립이라는 역사적 맥락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같은 제도의 다른 행보는 훌륭한 비교연구의 주제가 된다.

서독 연방정부는 1961년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쌓고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려는 주민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리자 법무부 산하에 ‘잘츠기터 중앙기록보존소’를 세웠다. 보존소는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29년 동안 4만1390건의 인권 침해 사례를 수집해 보존했다. 동독 지도부엔 ‘당신들의 만행이 기록으로 쌓이고 있다’는 경고를 보냈고 주민들에겐 ‘우리가 당신들의 억울함을 문서로 보존하고 있다’는 희망을 발신했다. 기록들은 통일 후 가해자의 처벌과 인사 등에 활용됐다.

동독은 거세게 반발했다. 1966년 동서독 관계 정상화의 조건으로 기관의 폐지를 요구했다. 동독과 대화하려는 서독 사회민주당(SPD)과 일부 지방정부들도 동독 편을 들었다. 하지만 연방 법무부 관료들은 흔들리지 않고 보존소를 지켜냈고 서독 지도자들은 1990년 10월 통일을 이루기까지 이를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했다.

잘츠기터의 성공은 국가의 권한을 합리적으로 제한한 서독 관료들의 신중함에서 나왔다. 동독과 국내 좌파 진영이 반발할 게 뻔했기 때문에 잘츠기터의 역할을 그야말로 기록의 보존에 한정했다. 국방부와 학계, 민간단체 등이 생산한 기록들을 모아서 보관할 뿐이었기에 안팎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처음 발의된 한국의 북한인권법은 오랜 정쟁을 거쳐 박근혜 정부 4년 차인 2016년 발효됐다. 돌이켜 보면 당시 정부는 너무 욕심을 부렸다. 법무부에 기록 보존 업무를 준 것은 서독과 같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적극적인 조사 업무를 통일부에 맡긴 것은 서독보다 더 나간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전인 2008년 1월 서독식 제도 도입에 논의가 활성화되었을 때 전문가들은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정부 민간 협업 방안을 권장했다. 국가가 조사까지 맡을 경우 북한은 물론 진보 진영의 정치적 반발을 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기 후반 대북 강경 모드로 돌아선 박근혜 정부는 조사와 보존이라는 권한을 모두 거머쥐었고 1년도 채 안 돼 탄핵으로 자멸하며 진보 정부의 손에 바친 꼴이 됐다.

통일부가 민간 북한인권정보센터(NKDB)와의 조사업무 위탁 계약을 중단하면서 터진 민관 갈등은 남북 대화에 목을 매고 있는 문재인 정부가 보수 대북단체들을 옥죄고 있는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NKDB는 2007년부터 북한인권백서를 내고 북한 주민들의 정치적 자유권을 억압하는 김씨 독재를 비판해 왔다. NKDB의 자리를 차지한 국무총리실 산하 통일연구원은 대북 지원의 근거가 되는 경제·사회권 조사에 집중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통일부 관료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이은 현 정부의 대북 인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북한 인권 문제의 핵심은 김씨 독재가 낳는 정치적 자유권보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경제 봉쇄가 낳은 경제·사회권의 결핍이다. 북한이 먹고살 만해야 문제가 풀린다. 그래서 퍼주어야 하고 그러려면 대화해야 하고 인권 문제 따위로 김정은을 화나게 하면 안 된다.’

이래서야 통일부 북한인권기록센터가 연평도 바다에서 북한군의 총에 맞고 불태워진 어업지도원 사건을 어찌할지 청와대의 눈치를 보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랬다가 정권이 바뀌면 또 난리가 날 텐데. 지금이라도 서독 관료들의 지혜를 핑계로 조사 업무를 국가의 손에서 떼어 민간에 맡기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kyle@donga.com
#통일부#북한 인권#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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