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서자 건달’이 동학 입도해 쌍두마차 타며 꾸민 일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22일 11시 40분


코멘트

1922년 5월 19일



플래시백
태양을 품에 안는 꿈이었다니 태몽은 아주 상서로웠습니다. 하지만 1861년 나고 보니 아버지는 청주 아전이었고 어머니는 첩이었죠. 지방 말단관리의 서자였습니다. 태몽 덕인지 아이는 의지가 남달랐죠.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서자는 일곱 살 때부터 스스로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하지 않았답니다. 아버지의 회초리가 날아왔지만 끝내 버텼죠. 갈수록 의협심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17세 때 괴산에서 어사(御使)가 말꼬리에 상투를 묶어 끌고 오는 피투성이 역졸을 목격했죠. 소년은 낫으로 말꼬리를 잘라 역졸을 구하고 마부를 쫓아버렸죠. 어사요? 목숨보다 귀하게 여긴다는 유서통(諭書筒)을 소년이 빼앗아 연못에 던져 버리니까 줄행랑을 놓았다죠. 유서(諭書)는 임금이 내린 군사 동원 명령서죠.

소년은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입니다. 서자 신세에 체념해 글을 멀리한 채 건달패 우두머리로 이름이 높았다죠. 여기에 마침표를 찍어준 것이 동학(東學). 패거리와 술, 노름을 단번에 끊었죠. 21세 때였습니다. 매일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 영세불망만사지(永世不忘萬事知)’ 주문을 3만 번 외우고 짚신을 두 켤레씩 만들며 도를 닦았답니다. 3년간이나요. 2세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은 손병희를 만나보고선 참을성을 시험했다죠. 초겨울 함께 기도드리러 가서는 솥을 거는 틀을 뜯어 고치라고 했습니다. 기껏 해놓으면 “너무 깊다” “비뚤어졌다”라며 번번이 퇴짜였다죠. 무려 일곱 번을요. 그래도 군소리 없이 “됐다!”라고 할 때까지 손을 불어가며 일했답니다. 합격이었죠.

⓵은 의암 손병희 초상화이고 ⓶와 ⓷은 손병희가 운명하기 직전 사진이다. ⓶에서 왼쪽에서 두번 째는 주치의, 그 오른쪽은 천도교 대도주 박인호, 그 오른쪽은 손병희의 부인이다. 가장 왼쪽은 손병희의 옥바라지와 간병을 도맡았다는 애인 주취미로 보인다. ⓶는 천도교 중앙총부 제공.
⓵은 의암 손병희 초상화이고 ⓶와 ⓷은 손병희가 운명하기 직전 사진이다. ⓶에서 왼쪽에서 두번 째는 주치의, 그 오른쪽은 천도교 대도주 박인호, 그 오른쪽은 손병희의 부인이다. 가장 왼쪽은 손병희의 옥바라지와 간병을 도맡았다는 애인 주취미로 보인다. ⓶는 천도교 중앙총부 제공.


1894년 남접의 봉기로 갑오농민혁명이 일어납니다. 지켜보던 최시형이 마침내 함께 하라고 지시하자 손병희는 통령으로 북접을 지휘했죠. 남접은 녹두장군 전봉준이 이끌었고요.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청군과 일군에 학살당하다시피 했고 손병희는 최시형을 모시며 피 말리는 도피생활을 했죠. 최시형은 1897년 손병희를 3세 교주로 임명한 뒤 이듬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동학 최고책임자가 된 손병희는 관군의 추격을 피할 겸 세계의 대세도 살필 겸 일본으로 갔죠. 거기서 권동진 오세창 박영효 등과 교분을 쌓고 조선을 개화시킬 방안을 찾습니다. 그 결과가 1904년 ‘갑진혁신운동’이었죠. 수십만 동학교도들이 한꺼번에 머리 깎고 검은 옷 입으며 민회를 구성해 개혁을 요구했습니다. 이마저도 관의 탄압으로 많은 교도들이 희생됐죠. 이용구가 배신해 일진회가 친일단체로 돌아선 뼈아픈 일도 이 무렵이었죠.

을사늑약으로 추격하던 관이 사라지자 손병희는 귀국해 동학을 천도교로 선포했습니다. 이용구 등 62명을 출교시키고 교도를 100만 명 넘게 늘려 위축된 교세도 되찾았죠. 교육으로 눈을 돌려 실력양성에도 나섰습니다. 1910년대 일이죠. 보성전문학교와 보성중·소학교 동덕여학교를 인수하고 다른 학교들도 지원했습니다. 교도들의 성미(誠米)가 자금원이었죠.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을 기회도 엿보다 1919년 3·1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그가 비폭력을 내세운 것은 동학농민혁명과 갑진혁신운동의 희생을 두 번 다시 겪지 않으려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⓵과 ⓶는 1922년 6월 5일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엄수된 위령식. ⓷은 천도교당 밖을 가득 메운 조문객들. ⓸는 우이동 장지로 가는 운구행렬을 따르는 여학생들이 창경궁 앞을 지나는 모습이다. ⓶와 ⓸는 천도교 중앙총부 제공
⓵과 ⓶는 1922년 6월 5일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엄수된 위령식. ⓷은 천도교당 밖을 가득 메운 조문객들. ⓸는 우이동 장지로 가는 운구행렬을 따르는 여학생들이 창경궁 앞을 지나는 모습이다. ⓶와 ⓸는 천도교 중앙총부 제공

3·1운동 전에 손병희가 화려한 쌍두마차를 타고 경성을 누볐다는 얘기는 유명합니다. 마치 옛날 서양의 왕이나 귀족 같았겠죠. 요정 출입도 해 많은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도 했답니다. 사치, 방탕한 생활에 젖었다기보다 일제의 눈을 피하려는 위장술이었다고 하죠. 손병희는 3·1운동 주모자로 옥에 갇혔을 때 중풍을 맞았습니다.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발병 2년 만인 1922년 5월 19일 운명했죠. 동아일보는 이 파란만장한 거인의 타계 소식을 최초의 호외로 전했습니다. 지금 보시는 1922년 5월 19일자죠. 보통의 절반 크기로 운명 순간부터 일대기, 장례절차, 천도교의 미래까지 2개 면에 담았습니다. 숨진 지 2시간 만에 만들어 배포했다고 합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