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소라 껍데기[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151〉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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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제게 돌아오셔도 발진이 나고 아버지가 돌아오셔도 마마에 걸릴까요?” 네 살짜리 아이가 천연두에 걸렸을 때 어머니에게 했다는 말이다. 그의 아버지는 머나먼 곳에서 유배 중이었다. 아버지가 옆에 있다고 병이 나을 리는 없겠지만, 아이의 마음에는 자신의 병이 아버지의 부재와 모종의 관련이 있는 것으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다산 정약용이 아이의 아버지였다.

다산이 막내아들 농장(農?)을 잃은 것은 1802년 12월의 일이었다. 정조가 죽은 이듬해인 1801년부터 1818년까지 유배생활을 했으니 두 번째 맞는 겨울이었다.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그는 아들이 죽었어도 유배지인 강진에 묶여 있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슬펐지만, 아들을 ‘품속에서 꺼내어 흙구덩이 속에 집어넣고’ 비통하게 울었을 아내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슬프기로 말하면 자기 몸으로 낳은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아내가 훨씬 더할 게 분명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들의 무덤에 묻어줄 글 ‘농아광지(農兒壙志)’를 쓰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아들이 언제 태어나고 죽었으며 생김새와 특징은 어떠했는지 기록함으로써 아들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세상에 머문 시간이 짧았기에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 없었던 아들을 위한 애도의 방식이었다.

다산은 그 글에서 자신이 보낸 두 개의 소라 껍데기를 보고 아버지를 그리워했다는 아들을 생각하며, 죽었어야 하는 것은 자신인데 아들이 죽었다며 한탄했다. ‘나는 죽음이 삶보다 현명한 일인데도 살아 있고 너는 삶이 죽음보다 현명한 일인데도 죽었구나.’ 기막혀도 너무 기막힌 운명이었다. 아홉 명의 자식 중 다섯이 죽고 이제는 막내까지 죽다니, 자신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러는가 싶었다. 그의 고통스러운 마음과 아들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밴 ‘농아광지’는 자식을 잃은 아비의 고통과 상처를 지금도 생생하게 전한다. 다산에게 고통과 상처의 유일한 출구는 글이었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아버지#소라#껍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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