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세상에서 우아하게 말하기[동아 시론/박연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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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선’ 외칠수록 깊어지는 갈등… 고민과 사유 없는 실시간 댓글 넘쳐
격조 있는 논쟁만이 화해의 문 열어… 사회 희망의 척도는 결국 ‘말의 품격’

박연준 시인
박연준 시인
2020년의 반이 지났다. 전염력이 강한 바이러스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학교에선 저학년 아이들에게 ‘친구와 물건을 나눠 쓰지 말라’고 가르친단다. 감염 확진을 받은 자의 이마엔 투명한 낙인이 찍히고 그들의 사생활이 아무렇게나 파헤쳐지며 지탄을 받는다. 마스크 한 장에 하루를 맡기고 걷는 이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다. 일각에선 고용인이 피고용인을 괴롭히고, 욕망에 코가 꿰인 남자들이 끔찍한 방법으로 여성을 착취하며 돈을 벌고 돈을 쓴다. 피해 여성이 끝도 없이 나오는데 성범죄자들의 형량은 실소가 나올 정도로 적다. ‘한남은 무조건 싫다’는 여성들과 ‘페미니스트는 무조건 싫다’는 남성들이 실시간으로 서로를 비방한다. 정치인들은 자신이 절대 선인 듯 거만하게 굴거나 별 대안도 없이 상대 진영의 의견에 반대만 하고 있다. 그 와중에 한 나라의 수도를 책임지던 수장은 산적한 문제들을 등지고 떠나버렸다. 문제는 많고, 책임질 사람은 없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와 억울할 일이 진짜 있느냐고 따지는 이가 남아 ‘또’ 싸우고 있다.

갈등은 어느 한쪽이 ‘절대 선(善)’, ‘절대 정의’라고 생각하는 순간 더 깊어진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수시로 논리의 오류를 겪는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도 전복될 수 있다. 불완전한 이들이 모여 싸우고 지지고 볶으며 사는 곳이 ‘사회’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있을까? 희망이 있다면 어떤 크기인지, 어떤 모양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희망은 늘 어딘가에 ‘끼어’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눈과 눈 사이, 귀와 귀 사이, 손과 손 사이, 발과 발 사이에. 책과 책 사이, 집과 집 사이, 도시와 도시 사이, 대륙과 대륙 사이에 끼어 있는 것. 누구도 희망을 ‘들고’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끼어 있으므로 잘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희망이 사회 구성원이 사용하는 언어 수준, 논쟁을 주고받는 태도, 소통의 정도에 따라 존재하거나 부재한다고 생각한다. SNS나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손쉽게 의견을 낼 수 있지만 소통은 요원해 보인다. 누군가는 연대, 의사표현, 자유로운 비평이라 하지만 진정한 소통을 이룬다고 볼 수 있을까? 인터넷이나 SNS에는 시간이 없다. 실시간만 있다. 침묵과 망설임, 고민과 사유가 깃든 의견은 드물다. 넘쳐나는 말들의 나부낌과 가벼운 비방 속 갈등의 양상만 드러날 뿐이다. 한 포털 사이트에서 ‘연예 기사’에 한해 인터넷 댓글 창을 닫았을 때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욕설과 비방하는 댓글을 보지 않아도 되어서가 아니다. 천천히 생각하고, 손쉽게 의견을 주고받아 감정을 소비하지 않고, 잠시 내 사유만으로 그득해질 수 있어서다.

누군가를 말로 비난하는 일은 쉽다. 잘못을 따져보고, 죄를 물은 후 기다리고, 성의 있는 언어로 생각을 주고받는 과정이 어렵다. 훌륭한 인간? 그런 게 있을까? 각자 이해와 입장, 처지가 있을 뿐이다. 덜 나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약자와 소수자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이고,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자가 있을 뿐. 희망은 늘 사이에 끼어 있으니까, 싸워야 할 일이 있다면 거리를 지키며 격조 있게 싸워야 한다. 쉽게 내뱉은 말로 문제의 머리채를 휘어잡지 않는 것. 혁명이나 독재 타도 같은 문제라면 피 흘림도 각오해야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우선 언어에게 격조 있는 칼을 쥐여주어야 한다. 문제 상황을 두고 화를 낼 뿐인 사람이 되는 건 의미가 없다. 모두 자기 말과 자기 분노에 책임을 지고 발언해야 한다. 비방과 비난이 난무하는 곳에 그저 숟가락 하나를 얹은 후 정의를 실현한 척, 알량한 면죄부 한 장을 얻은 듯 행동하는 건 지양해야 한다. 문제의 문을 찾아내 두드리는 건 중요한 일이지만, 부서질 때까지 문을 두드리기만 하는 일은 옳지 않다.

“희망은 문이 아니라 어느 지점엔가 문이 있으리라는 감각, 길을 발견하거나 그 길을 따라가 보기 전이지만 지금 이 순간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길이 어딘가 있으리라는 감각이다. 때로 급진주의자들은 문을 찾지는 않고 벽이 너무 거대하고 견고하고 막막하고 경첩도 손잡이도 열쇠구멍도 없다고 벽을 비난하는 데 안주하거나, 문을 통과해 터벅터벅 나아가면서도 새로운 벽을 찾아댄다.”(리베카 솔닛, ‘어둠 속의 희망’)

산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자가 목소리를 내야 하지만, 목소리에는 반드시 품위와 인격이 담겨야 한다. 그 다음에야 희망을 감각할 수 있을 것이다.

박연준 시인
#말의 품격#사회갈등#절대 선#절대 정의#분노#비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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