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중동 국부펀드, 저유가에도 공격투자… IT-헬스 등 미래산업 공략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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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침체 속 주목받는 산유국 국부펀드


원유와 천연가스 판매로 얻은 ‘오일머니’에 기반한 산유국 국부펀드가 크게 주목받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글로벌 경기 침체로 국제 유가가 급락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적 투자에 나섰기 때문이다. 반면 일부 산유국들은 국부펀드를 통해 보유 중인 자산을 팔아 현금화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저유가로 인한 재정수입 감소에 대비하는 것이지만, 이런 움직임이 세계 금융 및 원자재 시장에 2차 충격파를 불러올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최희남 한국투자공사(KIC) 사장은 “산유국 국부펀드들에서 공격적인 투자와 자산 현금화 모습이 동시에 나타난 적은 드물다”며 “코로나19 사태 뒤 본격적인 경기 침체 및 조정 현상이 나타나면 산유국 국부펀드들의 행보에 더 관심이 집중될 것”이라고 말했다.


○ 19세기 중반부터 설립

국부펀드(SWF·Sovereign Wealth Fund)는 보유 외환 등 국가 자산을 각종 금융상품 및 원자재에 투자하는 국영 투자기관이다. 1854년 미국 텍사스주가 공교육 확대를 목적으로 설립한 상설학교기금(PSF·Permanent School Fund)이 효시로 꼽힌다. 국가 단위로는 1952년 설립한 사우디아라비아가 선구자 격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주아이마에 있는 국영 석유사 아람코의 대형 플랜트 모습. 사우디는 약 3200억 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국부펀드 
PIF를 통해 선진국 유명 기업에 대한 공격적 투자에 나섰다. 저유가로 주가가 떨어진 선진국 에너지업체의 지분을 대량 매수할 뿐 
아니라 정보기술(IT), 문화콘텐츠, 관광업 투자도 확대하고 있다. 사우디가 국부펀드를 탈(脫)석유 전략의 핵심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람코 홈페이지
사우디아라비아 주아이마에 있는 국영 석유사 아람코의 대형 플랜트 모습. 사우디는 약 3200억 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국부펀드 PIF를 통해 선진국 유명 기업에 대한 공격적 투자에 나섰다. 저유가로 주가가 떨어진 선진국 에너지업체의 지분을 대량 매수할 뿐 아니라 정보기술(IT), 문화콘텐츠, 관광업 투자도 확대하고 있다. 사우디가 국부펀드를 탈(脫)석유 전략의 핵심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람코 홈페이지
미국 국부펀드연구소(SWFI)에 따르면 4월 기준 100개가 넘는 국가가 국부펀드를 보유하고 있다. 그중엔 남태평양 키리바시, 아프리카 적도기니 등도 있다. 미국처럼 상당수 주(州)가 국부펀드를 보유한 나라도 있다. 한국은 비교적 늦은 2005년에 KIC를 설립했다.

SWFI에 따르면 전 세계 국부펀드의 자산 총액은 약 8조1602억 달러(약 9947조2840억 원)에 달한다. 이 중 독보적 1위가 북유럽 산유국 노르웨이가 1990년 설립한 노르웨이 국부펀드(GPFG)다. 자산이 무려 1조1867억 달러(약 1446조5870억 원)에 달한다. 2018년 세계은행 기준으로 약 4342억 달러(약 529조2900억 원)인 노르웨이 국가총생산(GDP)의 약 2.7배다. 이어 중국투자공사,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의 아부다비투자청(ADIA), 쿠웨이트 국부펀드,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PIF) 등이 뒤를 잇고 있다.

각국이 국부펀드를 두는 이유는 단순히 높은 투자 수익률 때문만은 아니다. 국제무대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키우려는 의도가 작지 않다. 미국, 호주 등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전략 산업에 대한 타국 국부펀드의 투자를 제한한다. 정부 소유 돈이므로 상장기업과 달리 운용 현황과 실적 등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다.


○ 저유가로 알짜기업 매수 기회

코로나19 시대에 가장 주목받는 국부펀드는 사우디의 PIF다. 올해 1월 기준 3200억 달러(약 390조4000억 원)의 자산을 보유한 PIF는 최근 한 달 사이 로열더치셸(네덜란드), 토탈(프랑스), ENI(이탈리아), 에퀴노르(노르웨이) 같은 유럽 메이저 석유 회사에 약 10억 달러(약 1조2200억 원)를 투자했다.


업계에서는 메이저 석유회사 주가가 저유가로 급락하자 PIF가 저가 매수 기회로 보고 대규모 선제 투자를 단행했다고 본다. 사우디가 국영 석유사 아람코에 만족하지 않고 유럽 석유 기업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 세계 시장을 좌지우지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냈다는 평가가 많다.

비(非)에너지 분야 투자도 활발하다. 특히 사우디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추진하는 중장기 경제발전 전략 ‘비전 2030’에서 중요성을 강조한 문화콘텐츠와 관광 산업에 대한 투자가 돋보인다. 최근 PIF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지분 80%를 3억 파운드(약 4532억4900만 원)에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세계 최대 크루즈 기업인 미국 카니발의 지분 8.2%, 미국 엔터테인먼트 기업 라이브네이션의 지분 5.7%도 사들였다. 카니발과 라이브네이션 주가는 올해 초 대비 각각 80%, 40% 가까이 떨어졌다. PIF는 미 차량 공유 업체 ‘우버’, 미 전기차 업체 테슬라, 미 증강현실(AR)용 헤드셋 업체 매직리프 등 실리콘밸리를 좌지우지하는 대표 정보기술(IT) 기업에도 투자했다.

UAE 아부다비는 양대 국부펀드인 ‘ADIA’와 ‘무바달라’를 활용해 안정과 고수익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약 5800억 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ADIA는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투자를, 2300억 달러의 무바달라는 IT, 헬스케어 분야에 주로 투자한다. 로이터통신은 무바달라가 코로나19 사태로 생명과학 및 디지털헬스 분야 투자를 더 확대할 것으로 점쳤다.

영국 런던의 명물 더샤드 빌딩과 최고급 해러즈 백화점, 프랑스 프로축구(리그1)의 파리 생제르맹 등을 소유한 카타르투자청(QIA)은 지난해부터 북미와 아시아 투자를 확대했다. 최근에는 신흥국 팀을 조직해 중남미, 아프리카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


○ 금융위기 때 쏠쏠한 재미

중동 국부펀드의 공격적 투자는 과거의 성공 사례에 기초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 쏠쏠한 재미를 봤다. 한때 부동의 세계 최대 은행이었던 미국 씨티그룹이 금융위기 여파로 큰 위기에 몰렸지만 쿠웨이트 국부펀드 및 ADIA의 투자로 회생했다. 카타르 국부펀드 역시 당시 영국 바클리은행, 스위스 은행 크레디트스위스, 독일 폭스바겐과 포르셰 등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다. 많은 투자자들이 금융주를 꺼릴 때 역발상 전략을 구사한 셈이다.

금융위기 후 세계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자 이런 선제적 투자가 빛을 발했다. 2009년 이후 카타르 국부펀드는 한때 17%의 수익률을 올렸다. 이들이 ‘너무 위험한 것 아니냐’는 일각의 우려에도 공격적 행보를 고수하는 이유다. 사우디 왕실 관계자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저평가된 자산에 투자해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 물류, IT, 원격의료 등에 투자할 것”이라고 밝혔다. 알리 샤리프 알 에마디 카타르 재무장관도 “해외 투자의 적기로 보고 있다. 헬스 및 IT 부문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가세했다.

이권형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산유국이 산업 다각화와 첨단기술 등 탈(脫)석유에 집중하면서 국부펀드 운용 전략도 바뀌었다”며 “특히 금융, 제조업 투자가 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후에도 이런 추세가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 사우디 소식통은 “한국에선 아람코 서울지사가 투자 유망 기업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 자산 현금화 과정서 시장 출렁일 수도

일부 산유국 국부펀드는 투자 대신 자산 현금화에 치중하고 있다. 이를 통해 얻은 돈을 저유가와 코로나19란 이중고로 부족해진 국가 재정을 메울 수단으로 쓰겠다는 속내다.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올해 1분기(1∼3월)에 670억 크로네(약 7조8700억 원)를 현금화했다. 코로나19 대책을 세우려면 긴급 재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조만간 국부펀드가 보유한 채권을 매각해 추가로 돈을 확보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중동에서 코로나19 피해가 가장 심각한 이란도 4월 초 국부펀드에서 10억 유로(약 1조3205억 원)를 인출하기로 결정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재정 부족을 메우기 위해서다. JP모건은 올 상반기(1∼6월)에만 세계 국부펀드의 자산 현금화 규모를 약 2250억 달러(약 274조3875억 원)로 추산했다.

이는 국제 유가가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대부분의 산유국은 유가가 배럴당 60∼70달러일 때 균형 재정을 맞출 수 있다. 10달러대까지 떨어진 지금은 원유를 생산해도, 팔아도 손실이 불가피하다. 게다가 코로나19 사태로 보건의료를 포함한 각종 복지 지출이 눈덩이처럼 증가하다 보니 보유 자산 매각이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산유국의 이런 상황은 국제 금융시장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산유국은 미국 국채의 외국인 보유액(6조7000억 달러) 중 13%를 차지하고 있다. 김희진 국제금융센터 책임연구원은 “이들이 선진국 채권을 매각하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들의 국채조차 위험하다’는 인식이 확산돼 각국 투자자들의 매도 심리를 자극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주가 하락으로 인한 국부펀드 보유 자산 감소는 또 다른 우려를 낳고 있다. 3월 말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분기에만 노르웨이 국부펀드의 자산이 약 1조3300억 크로네(약 154조 원) 감소했다고 보도했다. 전체 자산의 70%를 주식에 투자해 코로나19로 인한 주가 급락 충격을 피하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싱가포르 국부펀드인 테마섹홀딩스 역시 올 들어 약 235억 달러(약 30조 원)의 평가 손실을 입었다.


○ 불투명성·정치적 이용 등 개선점 산적

일각에서는 향후 산유국 국부펀드의 질적 도약을 위해 지배구조 개선이 필수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주요 산유국 중 정부, 의회, 중앙은행 등이 국부펀드를 다양한 각도에서 관리 감독하는 나라는 사실상 노르웨이뿐이다. 노르웨이를 제외하곤 글로벌 스탠더드에 걸맞은 국부펀드 관리 감독 체계를 갖추고 있는 산유국은 없다. 중동 국부펀드들을 두고 ‘언제든 왕실의 사(私)금고로 전락할 수 있다’는 회의론이 제기되는 이유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주요 의사 결정을 직접 내리는 PIF가 대표적 예다. 2018년 10월 사우디 반(反)정부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터키 이스탄불의 사우디총영사관에서 처참하게 살해됐다. 당시 배후 인물로 지목받은 무함마드 왕세자는 국제적 지탄을 받았고, 사우디 국가 이미지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우디는 이 돌파구로 PIF를 이용했다. 지난해 인도를 찾은 무함마드 왕세자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와 경제 협력 방안을 논의하며 PIF를 통한 투자 의사를 밝혔다.

카타르도 마찬가지다. 2017년 6월 사우디, UAE, 바레인 등 걸프지역 수니파 왕정국가들은 카타르의 친(親)이란 및 친터키 행보 등에 반발해 단교했다. 이들은 시아파 맹주 이란과 아라비아반도로의 영향력 확장에 관심이 많은 터키를 눈엣가시로 여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단교 사태 뒤 타밈 빈 하마드 알 사니 카타르 국왕은 “국부펀드를 이용해 터키에 대한 투자를 늘리겠다”고 밝혔다. 국부펀드를 단교 국가에 맞서는 도구로 쓸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카타르 국부펀드는 2019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맏사위인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보좌관을 간접 지원해 화제를 모았다. 쿠슈너 소유 부동산 회사가 투자했다가 큰 손해를 입은 뉴욕의 빌딩을 인수했기 때문이다. 당시 외교가에선 ‘카타르가 백악관의 중동정책을 총괄하는 쿠슈너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공을 들인다’는 반응이 나왔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은 “중동 산유국의 국부펀드는 왕실 고위층의 입김에 따라 정치적인 악용이 가능한 구조다. 현재로선 이를 개선하려는 시도 역시 안 보인다”고 지적했다.

카이로=이세형 특파원 turtle@donga.com / 이윤태 기자
#산유국 국부펀드#중동#저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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