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위논란 휩싸인 백제 ‘왕궁 부엌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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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정밀 학술자문 안 거치고 덜컥 발표… 잇단 의문 제기

문화재청 관계자들과 취재진이 20일 전북 익산시 왕궁리 발굴 현장에서 철제 솥 등이 출토된 유구를 살펴보고 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이곳을 삼국시대 첫 왕궁 소주방 터라고 밝혔지만, 현장을 찾은 자문단 교수들은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위 사진). 항아리 등 토기들과 철제 솥이 함께 묻혀 있는 전북 익산시 왕궁리 발굴 현장(아래 사진).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 관계자들과 취재진이 20일 전북 익산시 왕궁리 발굴 현장에서 철제 솥 등이 출토된 유구를 살펴보고 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이곳을 삼국시대 첫 왕궁 소주방 터라고 밝혔지만, 현장을 찾은 자문단 교수들은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위 사진). 항아리 등 토기들과 철제 솥이 함께 묻혀 있는 전북 익산시 왕궁리 발굴 현장(아래 사진). 문화재청 제공
과연 삼국시대 첫 소주방(燒廚房·궁에서 음식을 만드는 공간)이 발견된 것인가.

20일 문화재청 산하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언론에 공개한 전북 익산시 왕궁리 유적 발굴 현장에서는 이례적으로 ‘진실게임’이 벌어졌다. 학술자문을 위해 현장을 찾은 교수진이 문화재청의 발표 내용에 잇달아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문화재청은 발굴 현장 공개에 앞서 언론에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지난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익산 왕궁리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조선시대 왕궁 수라간(水刺間)에 비유되는 백제 사비기 왕궁의 부엌(廚) 터가 확인됐다”고 밝혔다. 지금껏 백제를 비롯해 신라와 고구려 유적에서 왕궁 내 부엌 터가 발견된 적은 없다. 보도자료가 사실이라면 지난해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이어 삼국시대 왕궁 소주방이 처음 확인된 역사적 발견인 셈이다.

부여문화재연구소 측은 이날 오전 익산 왕궁리 현장 언론 공개회에서 백제시대 소주방이라는 증거로 건물터 안의 타원형 구덩이에서 발견된 철제 솥 2점과 항아리 등 토기 5점, 숫돌 3점을 내세웠다. 솥, 항아리, 숫돌 모두 양식이나 제조방식에서 백제시대 주방도구로 조사됐다는 것이다. 이어 기와를 두른 구덩이 옆에서 발견된 불탄 흙과 벽체(壁體), 바닥에 깔린 숯은 불을 때 음식을 조리하던 아궁이 흔적이라고 연구소 측은 추정했다.

하지만 현장을 찾은 자문단 교수 4명 중 3명은 이 유적이 부엌 터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봤고 1명만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철제 솥 등 조리도구와 함께 출토된 철제 가랫날(왼쪽)과 철 도끼. 가랫날은 논밭을 일구는 농기구로 부엌과 무관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화재청 제공
철제 솥 등 조리도구와 함께 출토된 철제 가랫날(왼쪽)과 철 도끼. 가랫날은 논밭을 일구는 농기구로 부엌과 무관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화재청 제공

부엌 터가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는 우선 구덩이 안에서 솥, 항아리 등과 더불어 농기구인 철제 가랫날과 도끼가 함께 나왔다는 점이다. 주방도구와 무관한 농기구를 왜 땅에 함께 묻었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또 연구소 측이 아궁이로 추정하는 유구(遺構·옛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에 돌이나 흙으로 부뚜막을 다져 올린 흔적이 없고 구멍만 뚫려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박순발 충남대 교수(고고학)는 “유구와 유물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마치 폐기물을 처리하듯 다 쓴 조리도구와 농기구를 한데 모아 구덩이에 몰아넣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박 교수는 “이곳은 애초부터 건물이 아닌 노천 상태의 유구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부엌으로 추정된다는 문화재청 발표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또 부엌 터라고 밝힌 유구가 이번에 함께 발견된 길쭉한 형태의 장랑형(長廊形) 건물터 바로 옆에 위치한 것도 의문스럽다. 길이 29.6m, 너비 4.5m의 장랑형 건물터는 왕이 정사를 보던 정전(正殿)과 가까운 데다 안에서 벼루 등이 출토돼 신하들이 왕을 기다리며 업무를 수행한 장소로 추정된다. 업무 공간 바로 옆에 이처럼 주방을 만든 전례가 드물다는 분석이다.

자문단 교수진의 잇단 지적에 부여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수라간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엌 정도는 맞는 것 같다”며 한발 물러섰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이 보안 등을 이유로 사전에 정밀한 학술자문을 거치지 않고 보도자료부터 배포한 것은 적절하지 못한 처신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자문에 응한 한 전문가는 “지난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익산 왕궁리의 발굴 성과를 필요 이상으로 확대 해석하면 자칫 국제적 망신이 될 수 있다”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좀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익산=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진위논란#백제#왕궁 부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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