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안드레이 란코프]흡수통일과 공존통일의 사이에서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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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흡수통일 단어 금기시… 현실성 없는 공존통일 기대
북한 민중 지난 20여년간 해외지식 늘고 감시공포 줄어 독재체제 도전할 세력 성장
55년 전 서울의 ‘4월 혁명’… 평양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잊지 말고 적절한 준비를

안드레이 란코프 객원논설위원 국민대 국제학부 초빙교수
안드레이 란코프 객원논설위원 국민대 국제학부 초빙교수
올해는 4월 혁명 55주년을 기념하는 해이다. 1960년 4월 19일 남한 주민은 부패한 독재정권에 도전하고 나라의 운명을 직접 결정짓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북한의 미래를 생각하면 4월 혁명의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55년 전에 서울에서 벌어진 일은 향후 평양에서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북한 민중의 운동에 의한 흡수통일은 거의 유일한 통일의 시나리오로 보인다. 그러나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이 같은 시나리오를 무조건 환영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요즘 흡수통일이란 단어는 한국 언론, 정치에서 거의 금기시되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비싸고 혼란스러울 수 있는 흡수통일보다 남북 정권이 회담을 통해 타협적으로 이뤄나가는 단계적이며 점진적인 공존통일에 희망을 걸고 있다. 정치인들은 공존통일과 다른 방식을 주장하고 나서면 당선되기도 힘들다.

정치인들이, 유권자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사실은 공존통일 희망은 현실성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연방제 국가라고 하더라도 수령을 중심으로 한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북한은 민주제를 실시하는 남한과의 통일이 불가능하다.

북한의 정치 엘리트는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의 확산이나 주민 감시가 완화되는 것을 치명적인 위협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공존통일의 방향으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공존통일을 준비하는 단계라도 북한 민중이 남한 생활에 대한 ‘위험한 지식’을 많이 배우고, 반면에 체제에 대한 공포감이 약화된다면 자발적인 혁명의 가능성은 크게 높아질 것이다. 북한 엘리트들에게는 공존통일을 시도하는 것이 집단자살과 다를 바 없는 정책이라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충분한 셈이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북한 체제가 변해야 통일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주도할 세력은 북한 민중밖에 없다.

간부들로 구성된 북한의 세습 집권계층이 현상 유지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돈주’로 알려진 신흥 사업계층 역시 체제를 반대하고 통일을 지지하는 세력이 아닐 수도 있다. 그들은 정치 체제에 대해 부정적인 의식을 갖고 있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남한과 외부의 경쟁을 차단할 독립국가 북한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남한을 비롯한 외부 세력은 북한 핵개발과 인권 침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북한 정치노선의 변화를 원한다. 그럼에도 북한 정권의 붕괴가 초래할 혼란이나 비싼 통일비용에 대한 우려 때문에 북한 내부의 위기를 적극적으로 촉진하려는 의지가 별로 없다.

북한 사회의 서열 밑바닥에 있는 서민은 체제에 도전하고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다. 통일이 되면 하루아침에 그들도 남한 주민처럼 개인의 자유, 물질적인 안락, 사회적 복지를 누릴 수 있음을 믿게 된다면 말이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엄격한 감시와 진압 때문에 남한의 4월 혁명이나 6월 항쟁과 같은 대중운동이 북한에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난 15∼20년 사이에 주민에 대한 감시완화 및 해외에 대한 지식의 확산이 이뤄졌을 뿐 아니라 보위부 같은 치안 기관에 대한 공포감도 어느 정도 줄었다. 또 공산권 위기의 역사를 살펴보면 폭력 혁명이 발생한 나라는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역설적으로 이 나라는 주변의 동유럽 정권보다 주민들을 더 엄격하게 통제했던 루마니아였다.

물론 혁명적 흡수통일밖에 통일을 이루는 시나리오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이런 시나리오를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는 있다. 세계 역사가 잘 보여주듯 폭력과 혼란을 가져오는 혁명보다 점진적인 진보와 진화가 훨씬 나은 방법이다. 북한 엘리트 계층이 개혁을 시작하려는 조짐이 보이는 상황에서 북한의 연착륙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혁명보다 단계적인 변화를 환영할 만한 이유다. 그렇지만 이 같은 연착륙이 통일보다는 평화공존 원칙에 의한 남북 분단의 장구화(長久化)를 의미할 수도 있다.

북한에서 혁명이 불가능하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얼마 전에 화제가 됐던 정종욱의 ‘흡수통일 준비팀’ 발언에 대한 남한 사회의 부정적인 반응은 잘못된 것이다. 북한 혁명과 흡수통일을 바라지 않고 북한의 진화를 지지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혁명이 발발할 가능성도 없지 않은 상황에서 적절한 준비와 계획을 마련하는 것은 정부의 의무다.

안드레이 란코프 객원논설위원 국민대 국제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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