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비선 의혹’ 일축한 朴대통령 발언을 반길 수만은 없는 이유

  • 동아일보

박근혜 대통령은 어제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정윤회 국정 개입 의혹’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에 대해 “문건을 외부에 유출한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국기문란 행위”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조금만 확인해보면 금방 사실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을 관련자들에게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비선(비線)이니, 숨은 실세가 있는 것같이 보도를 하면서 몰아가는 자체가 문제”라며 “선진국을 바라보는 대한민국에서 이런 근거 없는 일로 나라를 흔드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는 말도 했다. 박 대통령이 이번 사건의 본질을 ‘문건 유출’과 ‘근거 없는 보도’라고 본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고 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은 검찰을 향해 “내용의 진위를 포함해 모든 사안에 대해 한 점 의혹도 없이 철저하게 수사해 명명백백하게 실체적 진실을 밝혀 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먼저 결론을 내리다시피 했으니 검찰이 그 ‘가이드라인’을 벗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박 대통령이 이번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확인해 본 결과 정 씨의 국정 개입 의혹이 전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면 나라를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근거 없는 풍문을 퍼뜨려 국정 혼선을 부추기고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세력이 있다면 발본색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수사는 살아서 움직이는 생물이다. 수사를 하다 보면 고소인이 예상치 못했던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 대통령은 이미 결론을 내렸는데 검찰이 이와 다른 수사 결과를 내놓을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또 수사 끝에 대통령과 똑같은 결과를 내놓는다고 해도 과연 국민이 믿어줄지 알 수 없다. 1999년 옷로비 사건도 김대중 대통령은 ‘마녀사냥’이라고 규정했지만 국민이 믿지를 못해 국회 청문회와 특검 조사까지 하고 말았다. 검찰수사가 권력에 의해 예정된 결론에 이르렀다고 국민이 의심하면, 결국 다시 국정조사니 특검이니 하는 중복조사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있다.

‘정윤회 문건’을 둘러싼 대통령의 첫 발언에서 노기(怒氣)를 느끼는 국민의 심경도 편치는 않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한 잇단 인사 실패와 소통의 실패가 결국 비선 실세 전횡설, 권력 내부 암투설 등으로 터져 나왔다는 것을 대통령은 알기 바란다. 과거 비서실장 역할을 했던 정 씨와 ‘문고리 권력 3인방’이라는 측근 비서관들, 동생 지만 씨가 권력 암투설의 한 축으로 등장하는 상황에 대해 박 대통령은 국민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청와대 비서실의 기강 해이가 ‘정윤회 문건’의 토양이 된 것은 누구도 부인 못할 것이다. 적폐를 탓하기에 앞서 박근혜 정부는 투명하고 공정한 인사 관행을 확립해야 한다. 대통령의 가혹하리만큼 철저한 주변 관리야말로 이번 사건에 대한 국민의 우려를 불식하는 근원적 처방이라고 본다.
#박근혜#비선 의혹#정윤회 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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