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광주비엔날레, 부산영화제의 初心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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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문화의 불모 시기에 ‘藝鄕의 자부심’과 ‘정치색 차단’으로 성공
박근혜 그림, ‘다이빙벨’은 표현의 자유 아닌 행사 수준의 문제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1995년 열린 제1회 광주비엔날레는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개막 전까지만 해도 좋은 결과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문화계 내부에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더 강했다. 지방의 문화 여건이 지금보다도 훨씬 나쁠 때였다. ‘비엔날레’(2년마다 개최하는 행사)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개막에 앞서 광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참 희한한 것 하데”라고 질문했던 일화도 남아있다.

당시 광주비엔날레를 취재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광주는 모처럼 축제 분위기였다. 시민들은 “비엔날레가 뭐하는 거냐”며 서로 농담 삼아 물으면서도 표정은 밝았고 기대감에 넘쳐 있었다.

제1회 행사 때 관람객은 163만 명에 이르렀다. 미술행사로는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 해외 유명 비엔날레는 관람객이 10만 명만 넘어도 축하의 박수를 받는다. 광주는 한국의 대표적인 예향(藝鄕)이다. 문화예술의 중심지라는 시민들의 자부심이 광주비엔날레를 이끈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광주에 자극을 받은 부산은 이듬해인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창설했다. 부산은 이제 ‘영화의 도시’로 자리 잡았지만 영화제 첫해에는 관계자들이 “부산이 문화의 불모지라는 콤플렉스를 깨고 싶어 영화제를 만들었다”고 토로할 정도로 사정이 많이 달랐다. 광주처럼 힘들게 출발한 부산영화제의 성공 비결 중 하나는 ‘정치인 사절’이었다.

제2회 부산영화제는 1997년 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개최됐다. 김대중 이회창 후보가 부산으로 달려갔으나 영화제 측은 냉담했다. 두 후보는 개막식 단상에도 오르지 못하고 여러 축하객 중 한 명으로 머물러야 했다. 부산영화제가 대중적 인기를 모으면서 많은 정치인이 무대에서 축사를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원천 봉쇄됐다. 한때 영화제 측은 부산시장이 하도록 되어 있는 ‘개막 선언’의 원고까지 먼저 보겠다고 나서 마찰을 빚기도 했다. “정치적 멘트를 걸러내겠다”는 이유였다. 정치성의 차단과 배제는 부산영화제의 전통으로 굳어졌다.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두 행사가 올해 정치적 시비에 함께 휘말렸다. 광주비엔날레에선 홍성담 화가가 박근혜 대통령을 다룬 작품을 전시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부산영화제에서는 세월호 관련 다큐멘터리인 ‘다이빙벨’이 문제가 됐다. 해당 작가와 일부 문화계 인사는 지자체가 전시나 상영을 막는 것은 ‘표현의 자유 침해’라고 주장했으나 초점이 틀렸다.

이들이 개인적으로 자기 돈을 들여 발표한다면 막을 사람은 없다. 여기까지는 표현의 자유가 걸린 일이다. 그러나 이번 시비는 주최 측이 두 작품을 선택한 데서 빚어졌다. 해당 작품은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묘사하거나, 실패로 끝난 ‘다이빙벨’의 진실을 호도하는 내용이었다. 올해 광주비엔날레에는 45억 원의 세금이, 부산영화제에는 74억 원의 세금이 들어갔다. 수준 이하의 작품과 행사에 국민 세금을 쓰는 것이 적절한가의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들을 뽑은 주최 측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광주비엔날레의 홍성담 씨는 작품 전시를 철회한 뒤 표현의 자유를 빼앗긴 피해자로 행세했고 외신 인터뷰에서는 ‘무능한 대통령’을 거론했다. 부산영화제에서 ‘다이빙벨’ 상영에 성공한 제작자 이상호 씨는 “진실을 품어준 영화인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이 씨는 “정권이 세월호의 실수를 가리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들은 자신들이 노렸던 정치적 목적과 효과를 충분히 달성했다.

외부의 정치적 입김을 단호히 거부해온 주최 측이 내부의 정치적 의도에는 이용을 당하고, 오히려 이들을 감싸고 나선 꼴이다. 올해 두 행사는 ‘홍성담’과 ‘다이빙벨’에 파묻히는 바람에 정작 관람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이미지 훼손 등은 산술적으로 계산할 수 없는 손실이다.

중세 암흑기를 종료시킨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피렌체에서 태동했다. 피렌체의 전면에는 위대한 예술가들이 있었으나 이들 뒤에는 안목 높은 시민들이 있었다. 진정한 예술과 사이비 예술을 구별해내는 시민 앞에서 가짜 예술은 발을 붙일 자리가 없었다. 두 행사는 곧 20세 성년(成年)을 맞는다. 광주와 부산의 시민들이 성년을 앞두고 바라는 것은 정치적으로 물들지 않고, 더 수준 높은 행사로 발전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광주비엔날레#부산국제영화제#다이빙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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