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자가 산자를 가르친다는데…“한국은 법의학 후진국” 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11일 16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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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에서 포즈를 취한 이호교수(오른쪽)와 노상재박사. 이교수는 노씨가 법의학자의 길로 들어선 것을 ‘사명감의 전이’ 때문이라며 반겼다.
연구실에서 포즈를 취한 이호교수(오른쪽)와 노상재박사. 이교수는 노씨가 법의학자의 길로 들어선 것을 ‘사명감의 전이’ 때문이라며 반겼다.

"법의학은 사회적 건강을 평가한다. 한 사람이 죽음에 이르렀다면 그 죽음이 자기 의사에 반한 것인지, 사회구조적으로 예방 가능했는지, 인권 침해를 받았는지를 규명해 사회구조를 개선하고 억울한 죽음의 재발방지에 기여한다."

이호 전북대 의학전문대학원 법의학교실 교수는 법의학은 사인 규명을 넘어 사회발전과 인권 향상에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서구의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에 써 있는 '망자가 산자를 가르친다(mortui vivos docent·모투이 비보스 도슨트)'란 말을 법의학 강의실에 붙여놓고 싶어 한다. 법의학의 사회 기여가 크기 때문이다.

"법의학은 죽음으로부터 배우는 학문이다. 제대로 된 법의학은 죽음의 원인을 찾아내기도 하지만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가를 규명하는데 더 비중을 둔다. 개인적인 실수로 인한 죽음도 사회적 시스템의 미비 탓에 발생한 것일 수도 있기에 철저하게 '어떻게' 죽었는가를 밝혀내 더이상의 억울한 죽음이 나오지 않도록 노력한다."

이 교수는 호주에서 쓰레기차가 후진기어를 넣을 때 소리가 나도록 법을 제정한 것을 예로 들었다. "쓰레기차가 후진하면서 차에 깔리는 사망사고가 빈번히 일어났다. 처음에는 운전자의 개인적인 실수라고 생각했지만 계속 같은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에 쓰레기차가 후진할 때는 큰 소리가 나도록 법을 만들어 운전자와 주위 사람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켜 같은 죽음을 막았다."

이호 전북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법의학교실 교수는 전라북도의 유일한 법의학자다. 그는 연구실에서 현미경을 갖다 놓고 틈나는 대로 시료를 분석한다. 그는 법의학이 증거기반 학문이기 때문에 항상 과학자적 입자을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호 전북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법의학교실 교수는 전라북도의 유일한 법의학자다. 그는 연구실에서 현미경을 갖다 놓고 틈나는 대로 시료를 분석한다. 그는 법의학이 증거기반 학문이기 때문에 항상 과학자적 입자을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교수는 한국처럼 죽음을 범죄 연관성에서만 바라보면 죽음 뒤에 가려진 더 큰 것을 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공사장에서 목격자가 있는 가운데 인부가 발을 헛디뎌 추락사한 사건이 일어났다면 한국에서는 범죄 혐의가 없다는 이유로 부검을 하지 않는다. 건축주만 안전관리 미비로 형사입건하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영국이나 미국 등은 왜 죽음에 이르게 됐는지에 대한 자세한 조사를 한다. 개인적인 병력, 습관, 작업환경 등등을 세밀히 조사해서 작업자가 현장에 근무할 때 최적의 몸 상태로 근무할 수 있게 해 부주의나 피로로 인한 사고까지도 일어나지 않도록 시스템을 만드는데 법의학이 역할을 한다."

즉 한국에서는 범죄 연관성이 의심될 경우만 부검을 하는데 비해 영미법 체계를 적용하는 나라에서는 어떤 사망이든 검시관이 검시와 부검을 통해 '어떻게' 사망에 이르렀는가를 체계적으로 조사해 사회시스템 보완의 기초로 삼는다는 것. 또 이들 나라에서는 '죽음의 과정'을 주목하는 법의학이 사법시스템 안에서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기에 만약 그 나라에서 세월호 사고가 일어났다면 사망의 원인은 물론이고 사망에 이르게 된 사회적인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를 몇 년이 걸리더라도 계속했을 것이라고. 이 교수는 2007년 호주 연수 당시 경비행기가 추락해 2명이 숨진 사건을 4년째 검시법원에서 다루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한다. 청문회처럼 열리는 법정에서 판사가 사망원인 확증을 위해 비행기 제작사와 운항사를 참석시켜 그들의 논리를 세세히 따지고, 결국에는 사망원인에 관계된 시스템의 개선을 위한 입법을 제안하는 것으로 심리를 마치는 걸 보고 부러움을 느꼈다는 것.

미국의 경우 2006년 CDC(질병종합센터) 통계에 따르면 51개 주 중 22개주에서 법의관 제도(Medical Examine)를, 11개주에서는 검시관(Coroner)제도를, 18개주에서는 이 두 제도를 혼용해 쓰고 있다고 한다. 법의관은 사망의 원인뿐 아니라 사망의 종류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데 법의관은 선출위원회에서 엄격한 자격기준에 의해 선출돼 주지사가 임명한다. 변사 사건의 경우 반드시 법의관에게 통보하고 법의관은 독자적으로 사후검사를 실시해 범죄와 관련된 경우는 경찰에 통보한다(문국진, 죽은 자의 권리를 말하다, 글로세움, 43p). 영국 역시 1887년 검시관 관계법(Coroner's Act)을 만들어 검시란 '사회적 이익을 위해 사망을 조사하는 것'(같은 책 39p)이라고 명문화하고, 여기서 얻게 되는 자료를 사회발전의 기초자료로 활용하는 길을 텄다. 이 교수는 우리보다 못 사는 파키스탄, 인도 등도 영국 사법체계의 영향을 받아 한국보다 나은 검시 시스템을 갖고 있다며 한국은 '법의학 후진국'이라고 말한다.

이호 전북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법의학교실 교수가 법의학자의 길에 들어선 계기는 80년대 중반 민주화운동을 했던 고 이철규씨 사체가 발견 된 후 고문치사에 의한 죽음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이호 전북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법의학교실 교수가 법의학자의 길에 들어선 계기는 80년대 중반 민주화운동을 했던 고 이철규씨 사체가 발견 된 후 고문치사에 의한 죽음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한국 법의학의 후진성은 법의학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시스템과 인프라의 부재에서 비롯됐다. 법의학자들은 죽음을 통해서 얻는 각종 정보가 사회시스템의 개선에 많은 도움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정치권과 국민 정서 때문에 선진적인 검시제도를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제도의 부재는 의대교육에서 법의학 교육의 미비를 불러오고 이것은 법의학 전문의의 절대 부족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마디로 한국의 법의학은 인프라가 없는 실정. 41개 의대 중에서 법의학 교실을 개설한 대학은 12개에 불과하다(같은 책, 32P). 또 의사국가고시에 법의학 과목이 없기 때문에 관심 있는 의대생만 과목을 수강할 뿐이다.

이러다 보니 12만 명의 현역의사(의대생, 의전원생 포함. 2014년 기준) 중 법의학자의 비율은 0.004%인 48명뿐이다. 이 안에는 6명의 은퇴 법의학자도 포함돼 있는데 이들이 한해 평균 3500~4000구의 범죄 연관성 시신을 부검한다. 일반 의사도 검시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유병언 변사 사건에서 보듯 정밀한 검시는 기대하기 힘든 실정이다. 만약 미국 영국 등과 같이 변사자를 무조건 부검해야 한다면 한국의 법의학자들은 1년 내내 하루 종일 부검에 매달린다 해도 전부 끝내지 못할 판이다. 그래서 한국 최초의 법의학자 문국진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는 이렇게 주장한다. "한국은 의료분쟁, 교통사고, 대량재해, 보험관련 사건, 뇌사자로부터 장기이식, 독거고령자의 이상사체 증가 등 그 사인을 정확히 구명해야할 시체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의 범죄수사를 위한 사법검시만으로는 사회 환경의 변화나 국민의 권리 옹호를 위한 사인구명은 묵과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사법 및 행정검시 모두가 가능한 검시만을 전담하는 전문직 검시체계의 필요성이 절실하다."

이 교수를 비롯한 법의학자들은 사명감 하나로 시신과 씨름하고 일반의사에 비해 낮은 보수를 견디며 묵묵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호 교수는 전남대 조선대 법의학자들 4명과 함께 올 4월 22일부터 5월 초까지 팽목항에 내려가 국과수 법의학자들과 세월호 희생자들의 검시를 맡았다. 이들이 약 2주 동안 검시한 시체 190구는 대부분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었다. 이 교수는 팽목항에 내려간 이유를 "어느 시점이 되면 시신이 다량으로 올라올 텐데 법의학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시신들이 대기해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고, 침몰 후 정부가 한 명도 구조를 못해 신뢰를 잃고 있는 상황에서 국과수의 검시도 시비의 대상이 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스스로 내려갔다"고 말했다.

사망자 294명 실종자 10명(9월 11일 현재)의 대량 인명손실을 불러왔던 세월호 침몰과 같은 대형 사고를 피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개선해야 할까? 모든 국민들이 다시는 세월호 같은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으지만 누구하나 무엇을 어떻게 하자고 나서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시스템이 변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다시 억울한 죽음을 맞을 수 있다. 50년 넘게 지속된 적폐의 해소를 통한 국가개조도 중요하지만 그 첫 단추는 무엇인가. 제대로 된 법의학 시스템이 처음이 되면 안 될까.

전주=이종승 전문기자 (동아일보 대학세상.www.daese.cc)
#대학세상#법의학#전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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