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난 사람]‘장애인 돕는 장애인’ 이재승씨 가족

동아일보 입력 2014-01-11 03:00수정 2014-06-02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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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게 많으니 나눠야죠” 봉사로 불행 이겨낸 장애 3父子
잇따라 닥친 역경을 봉사로 이겨내고 있는 이재승 씨(앞에서 두 번째)의 가족이 큰아들 원중 씨(뒤)가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는 경기 군포 노인복지관에서 환하게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원중 씨가 재생불량성 빈혈, 동규 씨(앞에서 세 번째)가 교통사고로 인한 장애를 입었지만 하트를 그리고 있는 어머니 최명숙 씨를 비롯한 가족의 얼굴은 밝았다. 군포=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잘 크던 큰아들이 불치병에 걸렸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믿음을 가지고 여기저기 어려운 곳을 살피며 평생을 봉사하는 자세로 살았는데…. 동생에겐 “형이 언제 하늘나라로 갈지 모르니 잘하라”고만 했을 뿐 온통 장남의 병을 고치는 데만 집중했다. 그래서 벌을 받은 것일까. 둘째 아들이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지체장애 6급 판정.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지만 좌절하기엔 앞으로 살아갈 인생이 길었다. 희망을 생각했다. 두 아들이 아직 잘 살고 있는 것에 감사했다.

이재승 씨(59)는 예기치 않게 잇달아 찾아온 역경을 ‘봉사’라는 두 글자를 통해서 극복하고 있다. 이런 아버지를 보고 불편한 몸이지만 두 아들 원중 씨(28)와 동규 씨(22)도 봉사를 자연스럽게 익혔다.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남을 돕는 것으로 잊으며 행복을 찾는 자세가 ‘봉사왕 3부자’를 탄생시켰다.

1996년 5월이었다. 원중 씨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때 코피가 멎지 않아 병원을 찾았는데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재생불량성 빈혈’. 일종의 백혈병으로 완치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골수 이식뿐이었다. 이 씨 부부는 1차 테스트에서 이식 불일치가 나왔고 동생 동규 씨는 1차 테스트는 통과했는데 2차에서 불일치 판정을 받았다.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 중국 대만 등을 수소문해 골수 이식에 맞는 사람을 알아봤지만 찾지 못했다. 재생불량성 빈혈은 신체 내에서 골수가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해 다른 사람 혈액을 통해 필요한 것을 공급해 줘야 한다. 백혈병을 치료하듯 온갖 약도 먹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피를 수혈하다 보니 체내에 불필요한 철분이 쌓여 이를 제거해 주는 약을 매일 아침 공복에 먹는다. 입원과 수혈을 반복하는 힘겨운 생활이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서도 이 씨를 버티게 해 준 것은 봉사였다. 성당을 열심히 다녔던 이 씨는 1987년부터 천주교가 운영하는 장애인학교 명희원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장애인 목욕을 도와주는 봉사로 매주 주말이나 일손이 필요할 때마다 자원했다. 남을 도와주며 느끼는 뿌듯함이 좋았다. 큰아들 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면서도 봉사는 쉬지 않았다. 쉬는 순간 아들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도 있었다. 이후 집 근처인 경기 안산의 본오종합사회복지관과 시립 요양원 등에서도 봉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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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5월, 형이 불치병 판정을 받은 뒤 4년이 지난 시기에 동생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동규 씨가 건널목을 지나다 버스에 치인 뒤 끌려가는 대형 사고를 당했다. 왼쪽 발목이 으스러지고 피부가 완전히 벗겨지는 중상을 입었다. 9번의 피부 이식 수술을 받았고 재활도 3년간 했지만 끝내 지체장애 판정을 받았다. 걷기는 하지만 발의 슬관절과 족관절의 회전이 안 돼 부자연스럽다. 달릴 수도 없었다.

형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아버지는 둘째에게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죄책감을 느꼈다. 항상 “형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형에게 잘하라”고만 했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둘째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동생이나 형이나 아버지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아버지가 고마웠다. 형은 대학 1학년, 동생은 중학교 1학년이 될 때 아버지의 길을 따랐다. 아버지의 권유로 시작했지만 두 아들도 곧바로 봉사의 즐거움에 빠져들었다.

투병 중에도 원중 씨는 2005년 호서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병이 있다 보니 몸이 힘들어 체육시간에 참여하지 못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컴퓨터와 인터넷에 빠졌다. 인터넷에 판타지 소설을 올렸는데 반응이 좋았다. 몸은 아프지만 자신의 글에 대한 피드백에 힘을 얻어 글 쓰는 재미를 느끼게 됐다. 동규 씨는 “형은 글을 쓸 수 있는 모든 곳에 소설을 썼다”고 했다. 원중 씨가 국문과를 선택한 이유였다.

하지만 1학년 여름방학부터 아버지를 따라 복지관과 요양원에서 나이 드신 분들의 손과 발이 돼 주는 봉사를 시작하면서 큰 변화가 찾아왔다. 원중 씨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안 좋아 늘 도움만 받았다. 그래서 예전에 도와줬던 분들을 생각해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돕기 시작했는데 보람도 있었고 기분도 좋았다”고 말했다. 원중 씨는 아버지와 상의해 사회복지학을 복수 전공했다. 2009년 졸업하며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땄고 지금은 군포 노인복지관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다. 봉사가 직업이 된 셈이다. 원중 씨는 첫 월급을 받았을 때 봉급의 일부와 헌혈증 208장을 기부했다. 수혈을 간헐적으로 받아도 될 정도로 몸 상태가 호전되면서 군부대 등으로부터 기증받았던 헌혈증을 다시 기증한 것이다. 지금도 무리를 하면 금방 피로가 몰려오지만 매일 약을 먹으면서도 봉사하는 자세로 즐겁게 일하고 있다.

원중 씨가 어릴 때부터 진료하고 있는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조혈모이식센터(BMT) 정낙균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악성 빈혈에 적응하면서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힘든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남의 피를 받으면 체내에 철분이 쌓이는데 이를 제거하는 약을 먹으면서 또 수혈을 받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철분이 쌓이면 간과 심장이 나빠져 쉽게 피로가 쌓인다. 또 혈소판이 부족해 쉽게 출혈될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도 봉사를 계속하고 있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말했다.

동규 씨도 형과 비슷한 시기인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중학생은 자원봉사자로 받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오랫동안 봉사를 해 온 아버지 덕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시작했지만 봉사에 있어선 역시 ‘부전자전(父傳子傳)’이었다. 나이 드신 분들을 도와주는 일이었는데 능숙하게 잘해 칭찬을 받았다. 집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도 요양원에서 필요하다는 연락이 올 정도였다. 동규 씨는 “한 할머니께서 제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해 달려간 적이 있었다. 봉사를 하면서 ‘오늘은 어떻게 할머니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릴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설렌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발 치료를 받을 당시 의사 선생님의 정성 덕분에 그나마 걸을 수 있게 됐다”며 “그분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성심성의껏 도와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고 말했다. 발의 통증이 몹시 심했는데 담당 의사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냉정한 자세로 치료해 준 덕분에 더 큰 장애를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가식이 아닌 진심 어린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알았다.

공주대 물리학과에 다니는 동규 씨는 공부하느라 바빠 요즘은 방학 때가 아니면 봉사를 하지 못한다. 하지만 형을 위해 어렸을 때부터 했던 헌혈은 매달 하고 있다. 헌혈증 하나면 형이 한 번 수혈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4학년이 되는 동규 씨는 1학년 2학기 때부터 전액 장학금을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있다. 졸업해 직업을 찾으면 다시 봉사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두 아들의 병 수발을 하느라 이 씨도 허리를 다쳐 지체장애 5급 판정을 받았다. 원중 씨가 아팠을 때 몸을 사리지 않고 엎고 다니면서 무리한 탓이다. 이 씨는 “두 아들이 그나마 이렇게 잘 성장해 줘서 다행이다. 아이들이 아플 때 성당과 학교 관계자들이 많이 도와줬다. 그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했고 아이들도 그 뜻을 따라 줘 기쁠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무엇보다 이런 우리를 말없이 지켜봐 준 아내에게 고맙다”고 덧붙였다.

이 씨의 아내 최명숙 씨(55)는 큰아들이 중병 진단을 받자 15년 넘게 다니던 삼성전자를 그만두고 신문을 돌리기 시작했다. 낮에 아이와 함께 집에 있으면서 돌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아이의 몸 상태가 좋아지면서부터는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살림에 보탰다. 2.5t 화물차를 운전하며 건어물 등을 떼어다 파는 남편의 수입으론 병원비와 약값 충당이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8년째 새벽엔 신문을 돌리고 낮엔 고된 일을 하고 있다. 심신이 고달플 때가 많았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최 씨는 “자신이 힘든데도 남을 돕는다는 게 쉽지 않은데 그런 속에서 더 갚진 기쁨을 찾는 데 내가 더 뭐라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2006년엔 남편과 함께 가톨릭대 의대에 시신 기증 약정을 했다. 남편이 “아이들이 아팠지만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뭔가 해야 한다”고 해 뜻을 함께한 것이다.

이 씨는 그동안 도움을 준 곳에 매달 물품 후원을 하고 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떼어다 파는 건어물 등을 보내고 있다. 아이들이 봉사의 기쁨을 느끼도록 기회를 준 본오종합사회복지관과 수녀원 등 5곳을 10년 넘게 후원하고 있다. “내가 받은 고마움에 대한 최소한의 표시”라는 게 이 씨의 말. 이 씨 가족은 기아대책본부에 매달 1인당 2만 원씩 기부도 하고 있다. 요즘도 매주 주말 고려대 안산병원에 봉사를 나가는 이 씨는 2007년 사회복지의 날을 맞아 경기도지사 표창을 받았다.

이 씨 가족과 인연이 깊은 본오종합사회복지관 관계자는 “종교적 사명감이 있더라도 형편이 어려우면 현실적으로 봉사와 후원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다”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남을 생각하는 이재승 씨 가족의 헌신적인 봉사를 접하면서 진한 감동을 느꼈다”고 말했다.

군포=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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