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비운의 굴레’ 못 벗어난 조성민, 그의 삶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6일 09시 48분


코멘트
전 프로야구 선수 조성민(40)은 굴곡 많은 인생을 살면서 '비운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그는 6일 오전 5시 26분께 서울 강남구 도곡동 한 아파트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신일고등학교와 고려대를 졸업했으며 194㎝의 당당한 체구에서 뿜어내는 강속구를 앞세워 임선동, 박찬호, 차명주 등과 함께 '황금의 92학번'으로 불리며 큰 기대를 모았다.

고교 시절인 1991년 봉황대기·황금사자기 우수투수상 등을 휩쓸며 동기들과 함께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대표로 나섰다. 대학 시절에도 한미야구선수권대회와 하계유니버시아드,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등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활약했다.

1996년 고려대를 졸업하면서 계약금 1억 5000만 엔을 받고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명문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그의 야구 인생은 끝없는 굴곡의 연속이었다.

1997년 7월 처음 1군 무대에 올라 주로 불펜에서 경험을 쌓은 그는 1998년 본격적으로 선발로 나서 재능을 만개하는 듯했다. 6월까지 7승으로 다승 공동 1위에 오르는 등 투수 각 부문에서 상위에 올랐고 완봉승 3번, 완투승 2번 등 홀로 팀 승리를 견인하며 요미우리의 에이스 역할을 했다.

그해 조성민은 감독 추천으로 올스타에 선발됐고, 강력한 신인왕 후보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조성민은 올스타전 2차전에서 2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한 이후 팔꿈치 통증을 호소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근육염이라는 판정을 받았으나 부상은 심각했다. 1999년 팔꿈치 인대 수술을 받고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한 채 2002년 요미우리를 떠났다. 그는 일본에서 4시즌 통산 11승10패와 10세이브, 평균자책점 2.84를 남겼다.

이후 2003년과 2004년에는 연달아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 신청서를 제출해 국내 프로야구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끝내 지명을 받지 못했다. 선수생명이 끝나는 듯했던 조성민은 2005년 '재활 공장장'이라 불리던 김인식 전 감독의 부름을 받아 한화에 깜짝 입단했다.

그러나 전성기의 구위를 되찾지 못한 그는 2007년까지 3년 동안 35경기에 출장해 3승4패와 평균자책점 5.09를 남긴 채 글러브를 벗었다. 이후 방송 해설가로 나서기도 한 조성민은 2011년 두산의 부름을 받고 2군 코치로 새 출발, 지난해 말까지 선수들을 지도했다.

한편, 조성민은 야구인생 밖에서도 굴곡진 인생을 살았다.

2000년 톱스타인 고(故) 최진실 씨와 결혼해 숱한 화제를 뿌렸으나 불화를 거듭하다가 2004년 파경을 맞았다. 그 과정에서 폭행 등 논란이 꼬리를 물었다. 이후 최 씨는 2008년 10월 스스로 목숨을 끊어 큰 충격을 줬다.

<동아닷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