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플러스/드라마 캐릭터열전]이세령과 경혜공주, 갈림길에 선 두 여자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17일 17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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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공주의 남자\' 제작발표회.
드라마 \'공주의 남자\' 제작발표회.

가슴 시리도록 슬픈 사랑을 기대했다. 온 몸이 부서져라 부딪쳐도 절대 막을 수 없는 운명의 파고에 휩쓸려 산산조각이 나면서도 정인(情人)을 향한 손길을 멈추지 못하는, 그렇게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인 사랑의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해 마음껏 눈물 흘리고 싶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들)의 사랑은 가슴 시리도록 슬프지 않았다. 사랑보다 강한 배신과 분노의 감정이 그녀(들)의 삶을 일그러뜨렸기 때문이다. 정치적 격변기에 운명이 바뀌면서 혈육의 정을 나누던 사이에서 원수지간이 된 두 여자의 사연이 눈물에 앞서 한숨을 자아내는 것도 그래서이다.

왕위 찬탈에 성공한 아버지 덕에 공주가 된 이세령(문채원 분)과 숙부에 의해 공주의 자리에서 쫓겨나야 했던 경혜공주(홍수현 분)는 한 남자를 두고 엇갈린 운명 속에서 핏빛 사랑의 희생자로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조선시대의 여성들이다.

정사와 야사의 기록을 토대로 새롭게 창작된 두 여성의 비극적인 사랑은 '공주의 남자'의 핵심 사건이다. 병약한 형 문종 이후의 왕위를 노리고 있는 수양대군(김영철 분)이 당대의 세도가 김종서(이순재 분)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혼담을 넣으면서 비극적 사랑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수양대군의 장녀로 왕가의 혈통인 이세령은 자신과 혼담이 오가는 김종서의 아들 '김승유(박시후 분)'에 대한 호기심으로 경혜공주를 대신하여 강론에 들어갔다가 사랑에 빠진다.

반면에 조선 제일의 미색이라 불릴 만큼 아름답고 화려한 외모로 명성이 자자한 경혜공주는 병약한 아버지 문종과 어린 세자를 지키기 위해 김종서의 아들과 결혼하여 왕실의 권위를 굳건히 하겠다는 정치적 결단을 내린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아버지 세대의 정치적 대립과 갈등 구도 속에서 낭만적 사랑의 감정에 함몰된 이세령과 왕실을 지키기 위해 사랑 대신에 가족의 안위를 선택한 경혜공주는 그녀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공교롭게도 김승유를 가운데 두고 정서적 충돌을 겪는다.

그녀들에게 김승유는 전혀 다른 지점에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이세령에게는 아름다운 사랑의 감정을 유발하는 존재이지만, 경혜공주에게는 허약한 왕실을 지켜줄 수 있는 절대적인 조력자가 바로 김승유이기 때문이다.

공주와 종친의 딸이라는 관계를 뛰어 넘어 친자매 이상의 우애를 다져온 그녀들의 관계가 서로 다른 이유로 김승유를 갈망하면서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경혜공주를 대신 하여 강론에 들어온 이세령을 공주로 오해한 김승유는 그녀들의 관계를 인지하지 못한다. 오히려 공주 행세를 하는 이세령에게 사랑을 느끼면서 경혜공주의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녀들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아버지 문종을 위협해오는 숙부 수양대군에 맞서기 위해 김승유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경혜공주가 공주로 신분을 위장한 채 김승유와의 사랑에 취해 현실 감각을 상실한 사촌동생 이세령을 예전처럼 친근하게 대할 수 없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감정이다.

그러나 이세령은 정치적 격변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차가운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경혜공주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이렇게 서로 다른 자리에서 한 남자를 바라보는 두 여자의 대립과 갈등은 급변하는 정치 환경 속에서 증폭된다.

그 결과 수양대군의 계략에 의해 김승유가 아닌, 몰락한 양반의 자제 정종(이민우 분)과 혼례를 치러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경혜공주는 현실 감각이 없는 이세령에 대한 증오심을 숨기지 않는다.

드라마 '공주의 남자' 포스터 촬영 현장.
드라마 '공주의 남자' 포스터 촬영 현장.

수양대군이 왕위를 노리고 있으며, 김종서의 힘을 빌리기 위해 김승유와의 결혼을 선택했으니 다시는 그를 만나지 말라는 경혜공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세령은 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아버지 세대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쟁투의 현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이세령은 경혜공주는 물론 그녀가 사랑하는 김승유까지 위험을 빠뜨릴 정도로 대책 없는 인물이다.

말을 타고 달리는 느낌에 대한 호기심이 강해 번번이 실패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말 타기를 시도할 정도로 말괄량이 같은 성격의 이세령이 김승유와의 사랑에 함몰되면서 민폐형 인물로 전락한 것이다.

그래서 김승유를 포함한 김종서 일족을 몰살하려는 아버지 수양대군의 계획을 알고도 그 정치적 파장을 생각하지 못한 채 오로지 개인적 감정에 사로잡혀 정인 김승유를 살릴 방도를 찾는 그녀에게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 했던, 주체적인 여성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경혜공주의 혼례식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진 문종의 쾌유를 빌며 불공을 드리다가 저자거리를 구경하고 싶다는 동승(童僧)들을 데리고 절을 나서는 이세령에게서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를 느끼는 것 역시 결코 쉽지 않다.

김승유와 함께 말에 올라 시원하게 펼쳐진 벌판을 거침없이 달리고, 저자거리에서 그네뛰기를 하며 사랑의 눈길을 주고받고, 계곡에서 한시를 읊으며 사랑의 감정을 나누다가 입맞춤을 해도 그녀의 사랑에서 애절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그래서이다.

반면에 사랑이 아닌 정치적 이유로 선택한 남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정치적 이유로 성사되지 못한 김승유와의 엇갈린 인연 때문에 경혜공주의 사랑은 역설적으로 연민의 감정을 자아낸다.

공주로서의 위엄과 아름다움을 함께 겸비한 경혜공주는 궁궐 밖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자기 삶에 대한 자의식이 강한 인물이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대신하여 자신을 보살펴준 숙모와 사촌동생 이세령에게 마음을 의지할 만큼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속은 한없이 여렸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강론이 듣기 싫어 종학의 강사들을 골탕 먹일 정도로 장난기가 많지만, 숙부 수양대군의 왕위에 대한 욕망을 간파할 정도로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권력 쟁투가 치열한 정치 환경에서 허약한 왕실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여성으로서의 사랑을 포기하고 자신을 던졌지만, 현실이 그리 녹록하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 경혜공주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병약한 아버지와 나이 어린 동생을 지키기 위해 결심했던 김승유와의 혼사가 숙부 수양대군의 계략과 사촌동생 이세령의 철없는 사랑 타령으로 무산된 현실에서 마음에 없는 정종과 원치 않는 혼례를 치러야 하는 경혜공주의 절망감은 그 무게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다.

또한 경혜공주가 왕위 찬탈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왕실을 압박해오는 숙부 수양대군과 맞서 결기를 드러내지만 역부족이다. 선택할 수 있는 그 어떤 방법도 남아 있지 않은 무기력한 상황에서 혼례를 축하한다며 찾아온 이세령의 뺨을 때리고, 병약한 아버지 문종을 두고 사가(私家)로 출합(出閤)하라는 숙부 수양대군을 향해 분노의 시선을 보내는 경혜공주에게서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것도 그래서이다.

사랑이 아니었음에도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경혜공주에게 사랑은 무엇일까? 그녀가 김승유를 선택한 것은 이세령과 달리 사랑이 아닌,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왜 혼례를 치루고 사가로 출합한 뒤에도 정종과의 합방을 거부하는 것일까?

이세령이 자신을 위로하겠다며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소에서 가져온 꽃을 버리지 않고 곱게 말리고, 출합 이후 처음 맞는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이세령을 돌려보내지 못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혹시 권력 쟁투라는 거대 담론과 사랑이라는 미시 담론이 충돌하면서 정치적 결기가 살아 있던 경혜공주의 캐릭터에 균열이 발생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부마로 거론되던 김승유가 이세령과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세령을 질시하는 경혜공주의 감정이 혼란스러운 것은 아니었을까?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한 공주(들)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난 것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이라는 정치적 격변기에 잉태된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신과 분노의 감정에 휘말린 비극적 사랑이었기에 슬픔보다 한숨이 앞선다.

당대 청춘남녀의 사랑을 비극으로 몰아간 조선왕조시대의 정치적 격변에서 연애와 결혼 그리고 출산을 포기하게 만드는 21세기 대한민국의 경제적 격변의 흔적이 보이는 것 같아 가슴 한 구석이 씁쓸하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드라마평론가 drama@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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