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플러스/북스] ‘홍대문화’ ‘나가수’ 그리고 ‘케이팝’의 원조 세시봉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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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29일 10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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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서울을 휘어잡은 '음악다방'의 매력●조영남, 윤형주, 이장희, 송창식, 양희은…청년문화의 소중한 발원지

1970년대 유행했던 음악감상실의 일반적 풍경. 서구의 문화를 국내 젊은이들에게 전달한 최고의 문화공간이었다(동아일보 DB)
1970년대 유행했던 음악감상실의 일반적 풍경. 서구의 문화를 국내 젊은이들에게 전달한 최고의 문화공간이었다(동아일보 DB)

세시봉(C'est Si Bon)이란 프랑스어로 "멋지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쓰인다. 1960년대 우리나라 '청년문화'의 상징으로 읽히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됐는지 그 연원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기독교가 조선 말 선교사를 통해 들어왔듯이 팝은 미8군과 세시봉을 통해 직수입 됐죠. 세시봉은 진보 음악이 태동한 곳이니 팝의 선교사쯤 될 겁니다. 1966년 쯤 제가 바로 이곳에서 팝을 부르며 데뷔할 수 있었습니다."(가수 조영남)

한국전쟁의 포화가 채 사그라들지 않은 1953년 서울 중심가 충무로에 찻집 하나가 문을 연다. 그 이름은 바로 세시봉이었다. 한국 최초의 대중음악감상실로 기록된 이 찻집의 주인공은 기독교방송 성우 천선녀 씨였다. 그는 미국 군사고문과 국제결혼을 한 덕분에 팝 레코드가 많았다고 한다.

'세시봉'이란 원래 샹송가수 샹송가루 샤를르 트레네의 히트곡 제목이다. 그런데 한국전쟁통에 미국의 문화가 서울로 물밀듯 밀려들어왔고 미국의 재즈뮤지션 루이 암스트롱이 리메이크해 부른 '세시봉'이 서울에서도 큰 인기를 얻으며 가게 이름으로 낙점됐던 것.

세시봉의 처음 위치는 세 번 바뀌었는데 명동과 종로2가를 거쳐 1964년 종로1가 피맛골 맞은편 스타다스트 호텔 옆으로 이전하면서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했다. 현재 서린동 SK빌딩 자리로 당시에도 서린동이지만 '무교동'으로 불리던 자리다. 음악감상실이 문을 열자 새로운 감성에 목마른 젊은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당시 음악다방의 모습은 엇비슷했다. 최근 히트한 영화 '써니'에도 70년대 후반 유행했던 음악감상실 모습이 살짝 등장한다. 신성일과 트위스트 김이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수많은 한국 고전영화에서도 그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70년대 음악다방에는 다방 전면에 유리 음악박스가 있었고 수천 장의 음반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으며 물에 적신 수건으로 닦은 음반을 플레이어에 얹는 DJ들이 있었다.(동아일보 DB)
1970년대 음악다방에는 다방 전면에 유리 음악박스가 있었고 수천 장의 음반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으며 물에 적신 수건으로 닦은 음반을 플레이어에 얹는 DJ들이 있었다.(동아일보 DB)

■ 1960년대 이후…음악 감상실의 전성시대

DJ가 주재하는 일종의 극장식 다방 컨셉인 음악감상실은 입장료(당시 20원)을 지불하면 음료수 한잔을 받고 몇시간이고 음악을 즐길 수 있었다. 담배냄새가 자욱했고 DJ이들은 신청곡을 받아 멋들어진 멘트와 함께 50~100여명에 달하는 청중들에게 음악을 전달했다.(공연이 열리는 날에 세시봉에는 250명까지 들어앉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놀이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라 극장을 제외하곤 젊은이들에게 음악감상실이 거의 유일한 휴식처였다.

게다가 요즘처럼 음악을 자유롭게 들을 수도 없는 시대였다. 1960~70년대에는 KBS와 DBS CBS 또는 주한미군의 라디오 방송 아니면 집에서 전축을 통해서만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전축 없는 사람들든 좋은 음향을 듣기 위해 음악감상실을 찾았고 또래 젊은이들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찾는 이들도 있었다.

실제 1970년대 이곳에서는 소설가나 작곡가들의 명사초청 강연회가 열리기도 하며 시국토론회의 기능을 하기도 했다.

30대 직장인들에게는 여흥을 즐길 수 있는 장소로, 20대들에게는 첨단 유행의 상징이자 열린 쉼터로, 10대 청소년들에겐 선망의 장소로 기능했다. 때때로 트위스트 경연대회 아마추어 가수선발대 회가 열려 화제가됐다. 인기가수 라이브라도 있는 날이면 구경꾼으로 북새통을 이뤘다고 전한다.

세시봉은 수많았던 음악 감상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당초 클래식 감상실도 인기를 끌었지만 점차 서양의 대중음악을 소개하는 곳이 주류가 됐다.

세시봉 이어 종로 2가 YMCA 뒷골목의 극장 우미관 근처의 '디쉐네' 중구 소공동 미도파 백화점 옆 '라 스칼라' 종로 2가 네거리 화신백화점 3층에 '메트로'가 들어차 젊은이들을 끌어들였다. 충무로에는 ' 카네기' 관철동에는 '뉴월드' 태평로 조선일보사 옆에는 '아카데미' 명동 극장 뒤에는 '시보네'가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 톱스타였던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이 여전히 자신들의 정체성을 고집하며 시대의 아이콘으로 남았다.
1970년대 톱스타였던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이 여전히 자신들의 정체성을 고집하며 시대의 아이콘으로 남았다.

■ 이 가운데 최고의 음악감상실은 단연 '세시봉'

그야말로 '대중음악감상실'의 전성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세시봉은 그 가운데 최고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조영남씨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음악감상실의 경쟁포인트란 첫째 최신 LP를 얼마나 갖고 있는가. 둘째 어떤 DJ가 출연하는가, 이벤트는 재미있는가?"에 모아졌다고 한다. 이 가운데 가장 돋보였던 것이 바로 세시봉이었다는 얘기다.

'세시봉 친구'의 저자 김종철는 당시 세시봉은 음악감상실이라는 틀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이벤트로 젊은이들을 유혹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회고한다

"'대학생의 밤' '신인가수 선발대회' '시인 만세' '스타와의 만남' 등 다양한 아마추어들의 무대가 마련됐고 자연히 끼 있는 젊은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재능을 발휘하고 또 인기를 모으며 세시봉 스타군단을 만들기도 했다."

단순 음악감상실에서 대학생들을 위한 무대가 마련되면서 이들은 자연스럽게 대중문화예술인으로 진화해 나간다. 또한 당시 급성장하던 방송계의 핵심 인재들로 활약하기도 했다.

가장 먼저 스타가 된 가수들은 지금도 인기대중예술가오 활약중인 조영남과 트윈폴리오였다.

1966년경 매주 금요일 밤에 시작된 '대학생의 밤'이란 행사를 통해 조영남(66), 송창식(64)과 윤형주(64)의 트윈폴리오, 김세환(63), 이장희(64) 등의 포크 레전드가 스타로 탄생한 것이다. 당시 진행은 홍익대 재학중이던 이상벽(64)이 맡았다.

일개 대학생이던 이들은 점차 하나의 문화집단으로 성장해 나갔고 자연스레 그 시대를 움직이는 첨단문화전도사로 커나갔다.

1970년대 최고의 DJ이자 스타로 군림했던 이장희 씨는 이곳에서 '명사회자' 이상벽을 통해 같은 학교(홍익대)의 기타리스트 강근식을 만나고, 고교와 대학 동창인 윤형주, 같은 무대 멤버인 조영남, 신중현, 서유석, 송창식, 김세환, 김민기, 김도향 등과 함께 밥을 먹고 예술을 논하면서 동질성을 키워갔다고 한다.

이후 그는 인기 DJ인 이종환의 권유로 1집앨범 '겨울이야기'를 발표하며 인기를 끌기 시작하더니 1973년 '0시의 다이얼' DJ를 맡으며 청춘문화 최고의 아이콘으로 완전 떠버렸다. 1974년 '별들의 고향'의 영화음악을 작곡하면서는 부와 명예까지 함께 쥐었다. 이 세대 예술가들의 절정은 따지고 보면 이런 식으로 함께 성장하고 문화를 선도해 갔다.

이 밖에도 세시봉에서 사회를 보고 이벤트를 하기도 했던 이백천이나 정흥택을 방송 언론쪽 인물이었고, 이장호나 최인호 같은 영화 문단 등 예술계 젊은이들도 여럿 모였다.

이들에게 시련이 찾아온 것은 1975년이었다. 1차 가요정화운동으로 대부분의 세시봉 군단 노래들이 금기곡 목록에 올랐고 연말에는 윤형주 이장희 이종용 등 인기연예인 80여명이 대마초(마리화나) 파동에 연류 되 방송활동이 아예 금지됐다.

박정희 정권의 철권통치가 시작된 시점이었고 안타깝게도 그 첫 타겟은 젊고 자유분방한 문화의 정점이던 '세시봉 문화'에 대한 탄압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이들의 통기타 문화는 1980년대 록음악에 자리를 물려주면서 한 시대의 절정을 고하게 된다.

음악감상실 역시 점차 발달하는 전자기술(전축과 오디오 기술)로 인해 쇠퇴하게 된다. 어느순간 통기타를 치고 음악감상실에 다닌다는 것이 촌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미국으로 건너갔고 어떤이들은 미사리에서 통기타를 계속 연주하기도 했다.

■ 2011년 돌아온 '세시봉' 한국대중문화사에 큰 획

잠자던 이들이 깨어난 시간은 30여년의 시간이 훌쩍 지난 2010년 이었다.

조영남을 비롯해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이 MBC TV '놀러와' 추석특집 코너를 통해 다시 등장한 것이다.

잠깐 일고 지나가는 '찻잔 속의 태풍'인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들의 공연은 연이어 매진이 됐고 대중들의 이들이 부르는 아름다운 통기타 선율에 귀를 기울이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낙원상가의 통기타 판매까지 급상승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른바 '제 2차 세시봉 열풍'이 시작된 것이다.

여세를 몰아 세시봉 열풍의 주역들 중 맏형 격인 조영남이 1960~70년대 세시봉 문화를 담은 '쎄시봉 시대'(민음인)를 펴냈다. 또한 '대학생의 밤' 행사를 기획했던 언론인 김종철도 당시의 문화현상을 기억하고 평론하는 '세시봉 이야기'(21세기 북스)도 펴냈다.

이 밖에도 이장희,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김민기 등 음악다방 세시봉에서 그 시절을 함께한 친구들과의 우정과 음악, 낭만과 추억을 하나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현재 우리가 즐기고 있는 '홍대문화' '나가수 열풍' '케이팝 현상'의 원류는 '세시봉'으로 귀결된다. 처음 시작은 번안가요를 부르며 미국 문화를 베끼는 수준이었지만 여기에 재능있는 젊은이들이 모여들며 우리의 정서가 녹아든 한국대중문화의 원류를 만들어 낸 것이다.

청바지에 통기타, 생맥주, 포크송… 이제 우리에게도 홍대에서 힙합을 즐기는 손자와 종로에서 비틀즈를 들었던 할아버지와의 공감대가 만들어 질 수 있는 고리를 찾은 셈이 됐다. 대중문화란 얼마나 사소하지만 위대한 것인가?
■ 주목할만한 '세시봉 관련 책들'

◆세시봉 이야기 (김종철 저 | 21세기북스 | 2011년 4월)
http://www.yes24.com/24/goods/5056549

"할아버지 할머니도 그때 세시봉에 가보셨어요?"

세시봉 현상이 계속되자 30~40대가 된 자녀들이나 10~20대의 손자들이 할아버지에게 '세시봉'을 주제로 다양한 질문을 했다고 한다. 저자도 이 같은 질문을 듣고 책을 써내려갈 결심을 하게 된다.

통기타 1세대들의 산실로 평가받는 쎄시봉은 단순한 음악 감상실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놀이터이자 프로와 아마추어의 공연장을 겸했다. '대학생의 밤', '신인가수 선발대회', '시인만세', '스타와의 만남' 등 젊은이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었다. 아마추어가 무대에 나설 기회를 제공했기에 끼 있는 젊은이가 모여들었고, 그 결과 쎄시봉 스타 군단이 탄생한다.

이 '대학생의 밤'이란 프로그램을 준비한 것은 당시 서울대 문리대를 다니던 김종철이란 학생이었다.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대학가가 흉흉해 지자 출근도장을 찍다시피한 저자는 어느날 가장 한가한 시간인 금요일 오후 시간 '대학생'을 위한 무대를 기획해 세시봉 주인을 설득한다. 그리고 직접 사회와 출연자를 섭회하며 단순한 음악감상실을 하나의 무대로 승화시켜내는데…. 언론인 출신이 전하는 암울했던 시대에 대한 대중문화에 대한 충실한 기록서.

◆쎄시봉 시대 (조영남 이나리 저 | 민음인 | 2011년 6월)
http://www.yes24.com/24/goods/5209973


'세시봉 시대'의 주역 조영남이 이나리 기자와 함께 쓴 쎄시봉 시대의 낭만과 사실에 관한 이야기. 세시봉의 초창기 멤버 가수 조영남이 1960~70년대 대중문화의 상징이었던 음악다방 문화를 특유의 입담으로 풀어냈다. '학사 가수, 청바지 문화, 통기타 부대' 등 신조어가 출몰하던 그 시절, 이십 대 청춘을 함께하면 새로운 문화의 장을 연 친구들과의 우정, 음악, 낭만이 이 책에 흥미롭게 녹아있다.

그 주인공들이 세시봉과 어떻게 인연을 맺기 시작했는지에서 시작해 세시봉 친구들을 만나 함께 노래하고 밥 먹고 술 마시며 40년 우정을 쌓아 가는 과정을 사실적이면서도 유쾌하게 그려낸다. 여러 증언들을 효과적으로 비교하며 그 시대를 정확하게 묘사했다는 평가.

◆세시봉, 서태지와 트로트를 부르다 (이영미 저 | 두리미디어 | 2011년 5월)
http://www.yes24.com/24/goods/5113809

1990년대 최고의 음악평론가 중에 하나였던 이영미의 신작 평론집. 저자는 세시봉 열풍의 배경을 짚은 후 이들 '세시봉 세대'의 재등장과 세대교체가 담고 있는 사회적 함의를 '세대공감'으로 연결시킨다.

세시봉 열풍을 한순간 유행으로 남길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강고한 세대 장벽을 허물고, 음악을 통해 각 세대의 문화를 소통하게 만드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미 그런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말한다. 중간격인 '세시봉'이 '서태지'와 앞 세대인 '트로트' 세대를 불러(Call)와 대화를 시도한다.

<본 기사는 YES24와 함께 합니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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