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죽여 사체 ‘돼지고기’로 속여 팔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2월 5일 14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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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여성 김혜경 씨가 3일(현지시간) 캐나다 의회 인권분과 위원회에서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국가, 북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해 자신이 겪은 경험을 증언했다.

인터넷 보도매체 뉴데일리에 따르면 대중국 라디오방송 희망지성 국제방송(SOH)은 5일 캐나다 의회 인권분과위의 마리오 실바 자유당 의원이 "이 증언이 위원회에서 들은 이야기들 중 가장 비극적이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큰 선글라스로 얼굴을 감추고 앞에서 증언을 한 이 여성의 가족은 아직 북한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SOH가 전한 김 씨의 증언을 재구성한 것이다.

김 씨는 북한 제18수용소에서 그녀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녀의 가족 모두는 그녀의 할아버지가 6·25 전쟁 당시 실종됐을 때 북한 당국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그의 가족들이 4세대를 살아오는 동안 거의 상상하기도 힘든 독재가 이뤄지고 있던 교화소에서는 상당수의 수감자들이 사망했다.

그녀는 "여러분은 저희가 살던 집을 집이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짐승들이나 살 집이죠"라고 말했다.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배고픔을 넘어 구타와 죽음의 위협이 늘 상존했다. 채소 절도에서부터 아동 살해까지 갖가지 죄목으로 공개 사형이 보편적으로 이뤄졌다.

28년 동안 수감돼 있으면서 김 씨는 죽고 싶어 자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하고 그 대신 그녀가 속한 수감자 계층을 증오하는 다른 수감자들이 뱉은 침을 강제로 삼켜야 하는 모욕을 당했다.

수감자들이 먹던 옥수수 죽은 밀가루에 소금을 좀 넣은 것이었다. 배급량은 광산에서 일하는 수감자들에게는 좀 더 나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호흡기 질병을 일으켰다.

근무는 하루 8시간이지만 보통은 12시간에서 16시간까지 지속됐고, 그 후에는 동일한 시간동안 먹을 수 있는 식물을 찾아 산을 뒤졌다. 배급되는 깨끗한 물은 충분하지 않았고, 비누도 없었다.

공개 사형은 1994년 김정일이 권력을 잡은 뒤 더 증가했다. 사체들이 길에 너무 많이 쌓이자 이를 처리하는 특별 팀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김 씨는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나중에는 그런 광경이 너무 흔해서 더 이상 두렵지 않았어요"라고 말했다.

20년 이상 모범 생활을 한 김 씨는 2001년 석방됐다. 그녀는 그녀의 아이들과 수용소를 떠났고, 2년 후 아이들은 마을을 휩쓴 홍수에 실종됐다.

그녀는 아이들을 찾아 수개월 동안 북한 전역을 찾아 다녔으며, 결국 찾는 것을 포기하고 2005년에 중국으로 갔다. 그녀는 중국 상인에게 팔린 24살과 27살의 두 여성과 함께 브로커를 통해 중국으로 떠났다.

50살이 넘어 보이는 김 씨를 누구도 원하지 않아, 그녀는 식당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북한 탈주자를 집집마다 수색하고 다니던 공안에게 발각될까 봐 항상 떨었다.

그녀는 "공안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 숨어야 한다"며 중국 공안이 북한 탈주자를 보고하면 5000 위안까지 보상받는다고 증언했다.

후에 식당 주인은 씨돼지를 사기 위해 그녀를 북한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그는 그녀에게 돼지 10마리를 받은 후 5마리를 더 요구했고, 그녀는 시장에서 식당 주인을 기다리다 붙잡혀 북한으로 돌려보내졌다.

다시 수용소로 돌려보내지기 전, 김 씨는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가져가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고 분과 위원회에 말했다. 수용소에서는 돈이 생명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많은 돈을 그녀의 음부 속에 숨기고 나머지를 삼켰다. 배변 시 그 돈을 다시 꺼내 썼다.

김 씨는 2008년 수용소 상황이 더 악화됐다고 말했다. 그녀는 한 엄마에 대한 얘기를 소개했다.

그 엄마는 배급된 쌀을 다 먹어버린 아들을 도끼로 살해한 후, 아들의 사체를 토막 내 돼지고기로 팔았다는 것.

김 씨는 그 여성으로부터 그 '돼지고기' 한 토막을 샀다. 김 씨는 그 엄마가 그녀의 아들을 죽인 것을 몰랐고 나중에 들었다고 말했다.

다른 여성은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고열이 있자 나중에 딸을 살해한 후 먹었다는 죄로 사형됐다.

김 씨는 맨발로 수용소를 탈출해 라오스로 도망친 뒤 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왔다.

그녀는 "매 순간 숨을 쉴 때마다 나는 아직 내 아들과 딸을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보내는, 부칠 수 없는 편지를 통해 그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해줄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사과했다.

그녀의 편지는 '너희들을 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단다'로 끝맺었다.

위원회가 북한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묻자, 김씨는 "북한에 가축용 사료를 보내라"고 말했다. 식용을 보내면 절대 인민들에게 돌아가지 않지만 가축용 사료를 보내면 인민들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한편 캐나다의 스티븐 하퍼 총리는 지난 2일 김 씨를 만나 격려하고 북한인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하퍼 총리는 이 자리에서 "캐나다는 언제든지 탈북자 문제를 경청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 탈북자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디지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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