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집중분석] 상상력의 고갈? ‘끼’보다 ‘인맥’만 눈에 띄는 ‘퀴즈왕’

동아일보 입력 2010-09-10 18:16수정 2010-09-10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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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진 브랜드'마저도 추석대목 노린 상업성 영화로 소모되나?
● '퀴즈쇼'에 대한 냉철한 고민 없이 만든 범작
#1. 1994년 배우출신 감독인 로버트 레드포드는 '퀴즈쇼'란 영화로 그해 박스오피스 1위는 물론 각종 비평가상을 휩쓴다. 시청률을 위해 퀴즈쇼에 출연한 미남의사의 승부를 조작하는 방송사 쇼 프로그램을 통해 1950년대 후반 미국사회의 추한 이면을 성공적으로 그려냈다.

#2. 2008년 영국의 대니 보일 감독은 '슬럼독 밀리어네어'라는 퀴즈영화로 2009년 아카데미 8개 부문을 수상하는 등 전 세계 88개 영화상을 싹쓸이 했다. 인도 빈민가 청년의 기구한 일생이 퀴즈문제와 우연하게 맞아 들어가며 인생역전을 이루는 감동적인 스토리가 일품이었다.

"한 사람이 한번씩만 웃겨도…추석대박"
"133억짜리 퀴즈쇼…우린 봤다? 정답!"

16일 개봉하는 영화 '퀴즈왕'의 홍보문구다. 말 그대로 추석 대목을 겨냥한 시즌 영화다. 제작비도 3억5000만원에 불과할 정도로 아담하고, 세계인이 열광하는 한류스타도 등장하지 않는다.
충무로의 대표적인 천재감독 \'장진\'의 새영화 \'퀴즈왕\'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동아일보 DB)

▶드디어 장진이 퀴즈쇼를 놓고 영화를 만든다,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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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사람들이 이 영화를 주목하는 이유는 장진 감독(39)이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다.

장진 감독은 한국 영화계에서 시나리오와 연출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인식시킨 감독이다. 1998년 '기막힌 사내들'을 시작으로 '간첩 리철진'(1999) '킬러들의 수다'(2001) '아는 여자'(2004) '웰컴 투 동막골'(2005) '굿모닝 프레지던트'(2009)의 각본 및 감독을 맡아 적은 투자로도 재밌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한 천재이다. 언제나 관객의 기대를 뛰어넘는, 연극무대에서 갈고 닦은 튼실한 연출실력으로 국내 영화 팬들 사이에서는 일찍부터 '차세대 거장 1순위'로 꼽혔다.

또한 그의 영화는 배우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기회의 장으로 기능해 왔다. 배우를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으로 수많은 스타를 발굴했을 뿐만 아니라 슬럼프에 빠졌던 톱스타들에게까지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는 '장진 사단'이라 불리는 실력파 배우들이 다수 출연해왔다. 이른바 '장진표 영화'의 아이덴티티가 뚜렷하다는 얘기다.

특히 이번 영화는 충무로에서 처음 제작되는 본격적인 퀴즈쇼 영화라는 점 때문에 더 큰 주목을 받았다.

본래 퀴즈게임에서는 우연과 실력이 중요하지만 상금과 시청률이라는 TV쇼의 성격이 가미되면서 다양한 스토리의 변주가 가능해졌다. 이를테면 '방송사'라는 거대자본과 상금을 차지하기 위한 인간 군상의 욕망이 충돌하는 파격적인 설정이 그것이다. 영화 '매그놀리아'에서는 퀴즈쇼로 인정받았던 천재의 몰락이 처참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이 같은 이유로 '장진표 퀴즈쇼'에 대한 기대는 어느 때보다 높게 형성됐다. 이 좋은 소재를 활용해 기존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신선한 충격을 주기를 기대한 것이다.

장진표 '퀴즈왕'은 파격적이기는 했다.

▶장진 사단의 대거 등장? 도대체 왜 등장했을까?
인도 빈민층의 실상을 고발하면서도 퀴즈영화의 묘미를 살린 수작 슬럼독 밀리어네어

우선 무척이나 다양한 실력파 배우들이 출연했다. 김수로, 한재석, 신하균, 송영창, 임원희 이한위 등 연극과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는 물론이고 가수 이수영까지 단역으로 등장할 정도다.

출연료를 제대로 지불하고 이들을 섭외했다면 꽤 많은 제작비가 들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3억5000만원이라는 저예산 영화일 뿐이다. 대부분 배우들이 장진 감독의 호출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심지어는 출연료 대신 러닝 개런티를 받는 방식을 택했다(제작비를 대폭 줄이면서도 무게감을 갖춘 방식이긴 하지만 영화가 전체적으로 어수선해진 것은 사실이다).

두 번째. 이번 퀴즈대회는 아마도 세계 영화사상 최대의 상금이 걸린 대회로 기록될 전망이다. 상금이 무려 133억원이다. 방송 17회까지 우승자가 나오지 않아 상금이 누적됐기 때문이라는데,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우승상급이 단지 6억원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지나칠 정도로 현실성이 결여됐다.

심지어 일부 누리꾼은 "상금으로 케이블 방송사를 인수할 수 있겠다"고 비꼬기도 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10억원'에서 서바이벌 게임의 우승상금을 놓고 "과연 단 돈 10억원 때문에 사람을 죽여야 할까"라는 논쟁을 벌였던 것과 비교하면 정반대의 상황이다.

마지막으로는 어이없을 정도로 허술한 퀴즈쇼의 시스템이다. 사실 퀴즈영화의 성패는 어떤 방식으로 퀴즈대회를 진행하는지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버트 레드포드의 '퀴즈쇼'는 2명의 참가자가 밀폐된 방에서 난이도에 따라 21점을 먼저 쟁취하는 시스템으로 치러졌다. 부정을 방지하면서도 시청자들의 관심을 최고조로 올릴 수 있어야 영화가 성공할 수 있다.

그런데 장진의 '퀴즈왕'에선 30개가 넘는 문제를 단 한번도 틀리지 않고 모조리 맞춰야 한다. 지금까지 그 어떤 퀴즈 대회에서도 채택된 적이 없는 황당무계한 설정이다. 심지어 고등학생이 출연하는 '장학퀴즈'나 '골든벨'에서도 패자부활전이 존재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리얼리티는 확연하게 추락한다.

▶"장진 감독의 출연 장면이 가장 빛나는 대목"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시도되는 본격 퀴즈쇼 소재 영화 장진의 퀴즈왕

그 밖에도 어이없을 정도로 황당한 1번 퀴즈뿐만 아니라 심지어 퀴즈쇼 출연자들이 만들어 온 퀴즈(문제 검증조차 안됐음)까지 등장한다. 각본을 쓴 감독이 퀴즈쇼를 제대로 이해하고 영화를 만들었는지조차 의심이 들 정도로 허술하다. 이것이 과연 133억원이란 거액을 놓고 대결하는 사상 최고의 퀴즈 혈투일까?

마지막으로 퀴즈 대회에 참가한 출연자들이 갖고 있는 허술한 '비하인드 스토리'마저도 관객의 심금을 울리기는커녕 조롱꺼리가 되고 있다.

고작 '철가방의 비애'나 '우울증의 극복' '도박 빚 청산' 등을 목표로 퀴즈쇼에 등장해 거침없이 문제를 맞춰간다는 설정은 2009년 우리가 목도한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인도 청년 자말이 담고 있는 역동적인 스토리와 비교한다면 감독의 상상력 고갈을 확인하는 장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밖에도 감독의 전작 패러디(우울증환자 인터넷 카페 정모, 유도복을 입은 동치성, 형사로 출연한 장진 감독 등)까지 남발된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시사회가 끝나자 이곳저곳에서 장진 감독의 한계를 지켜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는 술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이내 영화평론가들은 "장진 감독의 연기력이 늘었다"는 칭찬으로 분위기를 무마하고 나섰다.

장 감독의 뛰어난 연기력 덕분에 그가 출연한 장면이 가장 빛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는 과연 칭찬인가 비판일까?

정호재 기자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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