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센 놈이 이긴다”는 강박증 보이는 월드스타 이병헌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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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12일 14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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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운의 페르소나' 거칠고 섹시한 남성미 발산● 최신작 '악마를 보았다' 스타일에 대한 극단적인 집착● 이병헌은 여전히 멋있다. 그러나 이젠 지겨워지려 한다

이병헌 주연의 영화 \'악마를 보았다\' 사진제공 엔드크레딧
이병헌 주연의 영화 \'악마를 보았다\' 사진제공 엔드크레딧

배우 이병헌은 조금 복잡한 인물이다. 그는 완벽한 외모를 앞세우는 미남형 배우도 아니고, 신세대의 개성을 앞세우는 신인배우도 아니며, 연기로 승부하는 투사형(?) 배우도 아니다. 예능에서 재치를 발휘하는 엔터테인먼트 형 배우는 더더욱 아니고, 길쭉하고 시원한 몸매를 자랑하는 모델형 배우군에도 물론 속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잠재성을 보고 미래에 기대를 거는 어린 배우도 아니다. 그런데 그는 줄곧 정상에 서 있었던 듯 하다. 왜 일까?

내가 기억하는 한 그의 데뷔는 1992년 TV 드라마 '내일은 사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많은 인기를 끌었던 이 드라마에는 고소영, 박소현, 김정난, 김정균, 이경심 등이 함께 출연했고 '가을동화'의 윤석호 감독이 공동 연출을 맡았다. 지금 생각하면 한 시대를 풍미할 미래의 대형 스타들이 무더기로 출연했던 드라마였다. 그리고 이병헌은 하얀 이를 고스란히 드러낸 환한 미소로 자신의 얼굴을 처음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물론 우리가 기억하는 이들의 순서가, 당시의 인기나 배역의 중요도와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말이다.

TV에서 청춘스타로 활약하던 1996년 당시의 이병헌. 왼쪽은 정선경. 동아일보 자료사진
TV에서 청춘스타로 활약하던 1996년 당시의 이병헌. 왼쪽은 정선경. 동아일보 자료사진

▶ '이병헌의 1990년대' 브라운관과는 달리 스크린에선 두각 못 나타내

성공적인 데뷔를 했지만 이후 약 10여 년 동안 이병헌에게 소위 대박 드라마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폴리스', '아스팔트 사나이', '아름다운 그녀', '백야 3.98' 등 TV 드라마 부문에서 착실하게 인기를 유지했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장동건이나 정우성에 비해 그 폭발성은 부족했다 하더라도, CF나 TV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하며 자신만의 자리를 구축해 나갔다.

반면 영화의 경우엔 별 소득을 보지 못했다. 당시의 영화 환경이 지금과는 차이가 있음을 감안해도,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 '런 어웨이', 그들만의 세상', '지상만가' 등 그의 출연작들을 살펴보면 그리 기억에 남는 영화는 눈에 띄지 않는다. 지속적인 도전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감은 스크린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였다. 거의 영화 징크스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TV형 배우라는 은근한 폄하도 있었다.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 의 수혁이 되기 전까지는, 바로 그랬었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지금의 이병헌을 시작하게 한 영화다. 이 영화로 그는 상업적 흥행과 함께 평단의 지지, 나아가 해외에까지 이름을 알릴 초석을 쌓았다. 북한군과 우정을 나누며 해맑게 웃는 모습과 비극적 사건을 은폐하며 고뇌에 찬 모습을 동시에 드라마틱하게 담아냈던 이병헌은, 이후 '번지점프를 하다', '중독', '누구나 비밀은 있다', '쓰리 몬스터' 등에 출연하며 상업적 성공과 예술적 성취에 꾸준히 도전했다.

2005년 영화 '달콤한 인생'으로 첫 인연을 맺은 이병헌(왼쪽)과 김지운 감독.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5년 영화 '달콤한 인생'으로 첫 인연을 맺은 이병헌(왼쪽)과 김지운 감독. 동아일보 자료사진

▶ 배우 이병헌은 김지운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로 나뉜다

그러던 2005년, 그는 김지운 감독을 만난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이병헌을 시작하게 한 영화라면, '달콤한 인생'은 그를 꽃피게 한 영화였다. '이병헌이 가장 아름다울 때 찍을 수 있어 만족했다'고 했던 감독의 말처럼, 그는 이 영화에서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병헌은 강해졌고, 깊어졌고, 견고해졌다. 그 동안 주로 드라마나 로맨스 장르에 편중해 왔던 그는, 이 영화 이후로 본격적인 액션 느와르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영화를 계기로 김지운 감독 역시 더 이상 '반칙왕'의 김지운이 아니게 되었듯 말이다.

사실 이병헌의 전체 연기인생에 비해 김지운 감독과의 만남은 비교적 늦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만큼 그 영향은 더욱 강했던 듯 하다. '달콤한 인생'의 선우에서 '놈놈놈'의 창이까지, 그는 몇 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김지운 감독의 화제작에 연속으로 출연하며 어느새 김지운 감독의 페르소나로까지 불리기 시작했다.

2007년 7월 12일 일본 도쿄 부도칸에서 열린 이병헌의 사진집 발간기념 쇼케이스. 일본 팬클럽 회원 1만9000여 명에게서 생일 축하를 받았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7년 7월 12일 일본 도쿄 부도칸에서 열린 이병헌의 사진집 발간기념 쇼케이스. 일본 팬클럽 회원 1만9000여 명에게서 생일 축하를 받았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이병헌이 이후 김지운 감독의 영화에만 출연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는 '그 해 여름'과 같은 로맨스 물에도 출연했고 '지.아이.조'로 할리우드에도 입성했으며, '나는 비와 함께 간다' 등 국제적인 작가감독의 영화에도 도전했다. 그가 기무라 타쿠야나 조쉬 하트넷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는 것은 빈번해졌고, 성공적이었던 블록버스터 '지.아이.조'의 속편에도 이미 캐스팅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새 일본에서도 막강한 티켓 파워를 가지는 한류스타가 되었다. 눈부신 성장이다.

▶ 날렵하고 단단한 몸, 냉철하면서도 폭발적인 눈빛…'마초' 매력 발산

2005년 이후 그의 이러한 성공을 들여다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눈에 띈다. 바로 강한 액션을 앞세운 남성적 캐릭터이다. 그는 사랑을 찾아 방황하기 보다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또는 복수를 위해 칼을 드는 전사가 되었다. 날렵하고 단단한 몸은 그의 특징이 되었고, 냉철하면서도 폭발할 것 같은 눈빛은 그의 상징이 되었다.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남성적 매력은 그를 줄곧 정상의 자리에 있게 한 힘이었다.

그의 이러한 철저한 자기관리는 사실 놀랍다. 다른 또래의 배우들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중후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변하는 동안, 마흔 살이 넘은 이병헌은 여전히 젊고, 거칠고, 섹시함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이런 모습은 최근작 '악마를 보았다'에서 한층 거세어졌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감독 김지운) 기자시사회가 11일 오후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열려 최민식, 이병헌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
영화 '악마를 보았다'(감독 김지운) 기자시사회가 11일 오후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열려 최민식, 이병헌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

'악마를 보았다'는 개봉 이전부터 많은 화제를 모았다. '아이리스'로 한참 인기몰이를 하고 있던 이병헌의 출연소식이 공개되면서 처음 관심을 모았고, 그 상대역이 오랜만에 스크린에 복귀하는 연기파 배우 최민식이라는 데 다시 한번 관심을 모았으며, 이병헌과 김지운 감독이 다시 만난 영화라는 점에서 또 한번 관심을 모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로 일주일 전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사실상 상영불가 판정이라 할 수 있는 제한상영등급을 재차 받으면서, 그 폭력성의 수준에 대한 호기심을 폭발시켰다.

일각에서는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도 보내고 있지만, 사실 개봉날짜를 못 박아 놓은 상태에서 많은 위험을 감수하며 일부러 이런 배짱을 부렸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의도적이건 아니었건, 결국 개봉 하루 전날 언론 시사가 열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악마가 궁금하다'는 홍보효과를 톡톡히 누린 것은 사실이다.

2008년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언론시사회에서 포토타임을 갖는 이병헌. 스포츠동아 자료사진
2008년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언론시사회에서 포토타임을 갖는 이병헌. 스포츠동아 자료사진

▶ '악마는'의 이병헌, 지난 5년간의 모습과 별반 다른 게 없어

이렇게 가까스로 베일을 벗은 '악마를 보았다'는 예상했던 대로 보기에 고되고 힘든 영화였다. '약혼녀를 죽인 살인마에 대한 복수'라는 영화의 소재 상 폭력은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지만, '반드시 그렇게까지' 표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감독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에 대해 '끝까지 가는 지독한 복수극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는데, 그는 정말로 끝까지 가는 지독하고 잔인한 복수를 그려내었다. 문제는, 그 외의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병헌의 모습 역시 예상대로 거칠고, 잔인하고, 냉정하다. 물과 불처럼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캐릭터를 가진 최민식과의 연기 호흡은 선명하게 빛나고(최민식이 보여주는 에너지는 실로 대단하다는 것을 별도로 언급하고 싶다), 영화를 가득 메우는 화학적 에너지는 그가 훌륭한 배우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킨다. 차갑게 절제된 광기 속 눈빛에선 역시나 넘치는 카리스마가 엿보인다.

그런데 그 역시, 문제는 여기에서 멈춰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한층 거세고 독해졌을 뿐, 지난 5년간의 모습과 별반 다른 것은 없어 보인다. 조직폭력배이거나 총잡이이거나 또는 국정원 직원이거나, 현란한 액션을 선보이며 종횡 무진해 왔던 그의 차가운 모습에는 강도만 더해졌지 새로움은 더해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젊고 멋있지만, 그의 다음 표정과 행동은 너무도 예측 가능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식상해지려 한다.

어쩌면 이는 김지운 감독 역시 함께 직면한 과제일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 느와르 감독이 된 김지운과 정상의 배우 이병헌. 이제 서로에 대한 스크린 안과 밖의 아바타라 할 수 있는 이들은 기대만큼 더 전진해야 하고, 더 강한 인상을 주어야 하며, 무언가를 더 이루어야 한다는 비슷한 압박감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이것이 이들을 스타일에 대한 극단적인 집착으로 몰고 갔을 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국내뿐 아니라 해외 시장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 지금, 이들은 자신들을 각인시켜 왔던 기존의 차별점과 앞으로의 새로운 시도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 것인지, 그 접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 이병헌은 약혼녀를 죽인 살인마에게 거칠고, 잔인하게 복수하는 국정원 요원 역할을 부여받았다.  사진제공 엔드크레딧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 이병헌은 약혼녀를 죽인 살인마에게 거칠고, 잔인하게 복수하는 국정원 요원 역할을 부여받았다. 사진제공 엔드크레딧

이병헌표 빳빳한 카리스마 유효기간 다 됐나

공교롭게도 현재 이 영화는 비슷한 폭력성으로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아 먼저 개봉한 '아저씨'와 여러 면에서 비교되고 있다. 지난 주 개봉한 '아저씨'는 첫 주말, 백만여 명의 관객을 모으며 현재 흥행몰이 중이다. 과연 '악마를 보았다'가 '아저씨'의 흥행 돌풍을 잠재울 수 있을지, 중견 감독 김지운과 신인 감독 이정범, 최고의 스타 선후배인 이병헌과 원빈의 자존심 대결이 자못 흥미진진하다.

만일 이 대결에서 '아저씨'가 승리한다면, '악마를 보았다'가 이병헌에게 남긴 과제는 더욱 분명해 질 것이다. 원빈은 '아저씨'에서 변화했고, 이병헌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 그의 빳빳하기만 한 카리스마가 이제는 유효기간이 다 되었다는 것이다.

정주현 영화진흥위원회 코디네이터 janice.jh.ch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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