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서울 대학로 서울연극센터에서 열린 ‘책, 영화와 만나다’ 행사에서 영화평론가 이동진 씨(오른쪽)가 에 밀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 ‘박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 제공 서울문화재단
박찬욱 감독의 ‘박쥐’는 프랑스의 자연주의 소설가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소설을 있는 그대로 영화로 옮기진 않았지만 캐릭터나 플롯은 소설에 크게 의존했다.
27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서울연극센터에서 열린 ‘책, 영화와 만나다’에서 영화평론가 이동진 씨는 두 작품을 소재로 첫 강연을 진행했다. 주제는 ‘원작 테레즈 라캥과 영화 박쥐의 결합 50 대 50’. 이 씨는 “‘테레즈 라캥’은 140년쯤 전에 이렇게 인간에 대해 차갑고 리얼하게 쓴 소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소설”이라면서 “박 감독은 이 책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아 영화로 만들 생각을 계속 해왔다”고 설명했다.
소설은 여러 면에서 영화와 비슷하다. 배경은 1860년대 파리. 어려서 고모인 라캥 부인에게 맡겨진 테레즈는 병약한 사촌 카미유와 함께 자란다. 라캥 부인은 둘을 결혼시키지만 욕망을 채우지 못한 테레즈는 남편 친구 로랑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급기야 두 사람은 카미유를 센 강에 빠뜨려 살해한다.
이 씨는 “박 감독은 ‘뱀파이어가 된 의사 이야기’를 10년 정도 구상해왔는데 구체화하지 못하다가 ‘테레즈 라캥’을 읽은 뒤 두 이야기를 결합하기로 결심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 둘의 결합으로 텍스트가 지나치게 풍부해졌다는 점. 이 씨는 “지극히 사실적인 소설과, 판타지에 속하는 뱀파이어 이야기가 결합함으로써 이 영화는 ‘불균질’한 모습이 됐다”고 해석했다.
이 씨의 설명대로 영화는 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여주인공 태주(김옥빈)는 시어머니 라 여사(김해숙), 무능력한 남편 강우(신하균)와 함께 욕망을 억누른 채 살아간다. 그런 태주 앞에 전능한 힘을 가진 뱀파이어 신부 상현(송강호)이 등장하고 태주와 상현은 육체적 관계를 맺은 뒤 강우를 호수에서 죽인다. 이 씨의 설명에 따르면 박 감독은 소설 속 ‘라캥’ 부인의 이름에서 ‘라 여사’라는 이름을 따왔고 ‘태주’ 역시 ‘테레즈’를 음차했다.
소설과 영화의 큰 차이점은 박 감독이 강조하는 ‘전락’과 ‘영원’이라는 테마가 소설에는 없다는 것. 영화에는 상현이 공중을 날아다니는 장면에서 ‘떨어지는’ 이미지는 자주 등장하지만 뛰어오르는 쾌감을 보여주는 컷은 전혀 없다.
이 씨는 ‘이질성’도 영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꼽고 주요 장소인 ‘행복 한복집’에서 나타나는 이질적 모습에 대해 설명했다. “한복집인데 건물은 일본식이고 사람들이 하는 게임은 마작이다. 라 여사가 좋아하는 술은 보드카고 배경에는 이난영의 오래된 가요가 흐른다. 방안에는 십자가도 있고 불상도 있다.”
마지막 장면 역시 소설의 마지막과 유사하다. 승용차 보닛에 앉아 바다를 향해 있던 두 사람의 몸은 해가 떠오르자 점점 타들어 간다. 몸이 마비되고 말도 못하는 라 여사는 뒷좌석에 앉아 아들을 죽인 그들의 소멸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소설은 ‘뒤틀려 엎어진 두 시체는 등피를 씌운 램프의 노란빛을 받으며 밤새도록 식당의 마루 위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정오경까지 약 열두 시간 동안, 뻣뻣한 몸으로 말없이 앉아서 라캥 부인은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듯 발밑의 두 시체에 무겁고 매서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로 끝을 맺는다.
이 씨는 “영화에서 두 사람이 굳이 라 여사를 바닷가로 데리고 간 것을 보면 박 감독이 소설의 이 대목을 가장 좋아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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