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77>

  • 입력 2009년 9월 9일 13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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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의 사랑 고백을 읽은 후 석범은 욕실로 향했다. 사흘 꼬박 근무를 서느라 몸을 닦을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과장되게 움직이는 민선의 입술을 보는 순간, 시원한 샤워기 아래 몸을 적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실로 가다가 발목이 꺾일 뻔했다. 거실과 욕실 사이에 작은 상자가 하나 놓였던 것이다. 그 상자에 복사뼈를 부딪친 후 석범은 잠시 스스로에게 물었다.

저게 뭐였더라?

왕할매 이윤정이 챙겨 보낸 어머니 손미주의 유품상자였다. 석범에겐 죽은 이의 흔적을 더듬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 상자를 발로 밀어 식탁 아래로 넣은 다음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차고 세고 경쾌했다. 석범은 그 아래 머리를 디밀고는 30초 남짓 석고상처럼 서 있었다.

앵거 클리닉에서 함께 치료받은 이들을 최볼테르가 연쇄적으로 죽인 후 그 뇌를 관악산 비밀연구소로 가져와서 로봇에 얹는 실험을 했다? 여기까진 그럴 듯하다. 그러나 볼테르를 주범으로 간주할 때 생기는 결정적인 결함은 이 긴 문장 이전에 놓인다. 함께 치료받은 이들은, 볼테르를 제외하면, 아니 어쩌면 볼테르까지 포함해서, 우연히 모인 이들이 아니라, 누군가가 불러 모은 것이다. 살인할 대상을 미리 골랐다는 뜻이다. 볼테르는 앵거 클리닉에 가서 그들을 처음 만났을 뿐이다. 만에 하나 볼테르가 연쇄 살인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에게 피해자들을 모아준 이는 따로 있다. 살해당한 노윤상 원장일까? 노원장이 왜? 그가 살인을 저지를 동기는…… 없다.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훔치며 거실로 나왔다. 냉수를 들이키며 노민선보다 앞에 담긴 영상메시지를 틀었다.

화면이 흐리다. 아니, 화면이 흐린 것이 아니라 모래폭풍이 화면 전체를 휘감은 탓이다. 쿨럭 쿨쿨럭. 기침을 쏟으며, 흰 수건으로 머리를 칭칭 감은 채 바싹 다가선 이는 드라마 <산악자전거> 연출을 위해 실크로드로 떠난 이윤정 피디다.

"서울특별시 보안청이 세긴 세더구나. 고비 사막을 무사히 지나고, 어제 둔황에서 하루를 묵고 새벽에 타클라마칸으로 접어들었단다. 손미주 여사에 대한 미움은 이제 접었겠지? 유품은 손 여사가 생전에 미리 챙겨 놓은 거란다. 꼭 한 번 시간내서 살펴보도록 하렴. 어머니도 이해하지 못하는 녀석이 어떻게 타인에게 상을 주고 벌을 하겠니? 세상엔 많은 길이 있단다. 초원길이 있으면 산길도 있고 또 이렇게 사막길도 있지. 넘어지지 않으려면 그 길 하나하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해. 곧 보자, 서울에서!"

이윤정이 다시 모래바람으로 흐려졌다. 되돌아 나오지 못하리. 그녀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세로로 질러 내려간 후 꼭 되돌아올 것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식탁 아래 상자로 눈이 갔다.

상자를 꺼내 식탁에 올렸다.

석범은 한때 자연인 그룹을 연쇄살인자로 의심했다. 그들은 부엉이 빌딩과 보노보 방송국 그리고 상암동 로봇격투기 전용경기장을 잇달아 테러할 만큼 대범했고, 손미주 여사는 그들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지금 돌이켜보니 자연인 그룹은 연쇄살인과 무관하다. 자연생태주의를 주장하는 확신범들이 사람을 죽여 그 뇌를 로봇에 이식할 까닭이 없다.

어머니가 지금도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난…… 찾아가서 잘못을 빌었을까.

상자를 열었다.

먼저 그녀의 저서 <나는 로봇에 반대한다>와 <도시의 종말>의 친필 원고뭉치가 나왔다. 백지에 또박또박 써내려간 글씨가 정갈했다. 그 아래에는 수첩들이 가득했다. 그녀는 메모광으로 유명하다. 여행이나 강연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떠오르는 생각을 수첩에 적었다. 이 수첩들은 힘 있고 독창적이며 박학한 저서를 계속 길어 올리는 우물 같은 역할을 했다. 상자 제일 아래에서 사진 한 장이 나왔다. 낡은 흑백사진이었다. 가운데 갈래머리 손미주 여사가 섰고, 왼쪽에는 흰 머리가 하나도 없는 이윤정 피디가 자리를 잡았다. 오른쪽 큰 키에 긴 생머리 여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석범은 너무 놀라 사진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잠시 후 다시 집어 들었을 때, 그는 사진 뒤에 적힌 문장을 발견했다.

우정을 기념하며.

손미주, 이윤정 그리고 박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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