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기오]성적 비교보다 시험방법 개선을

  • 입력 2009년 8월 19일 02시 56분


정보화에 힘입어 이제 우리는 학교에 대해 점점 많은 내용을 알아간다. 이번에는 학교별로 1학기 중간시험 기말시험 결과가 학교정보공개시스템에 올라왔다. 숨겨뒀던 교육자의 ‘비밀의 화원’이 공개됨에 따라 비교와 줄 세우기를 즐기는 사람에게 흥미로운 얘깃거리가 될 것이다. 이미 많은 학교와 학부모가 술렁이고 언론이 다양한 담론을 만들어낸다. 시험점수 결과가 논의의 주요 초점이다. 학교정보공개는 교육소비자의 선택권을 높이겠다는 취지이나 점수를 중심으로 학교 간 불필요한 경쟁이 벌어질 경우 소비자의 권익을 침해할 수 있다. 필자가 주목하는 점은 학교별 시험점수 결과가 아니라 시험방법이다. 시험방법이야말로 사람의 의식을 근원적으로 지배하기 때문이다.

선다형 시험의 특징은 몇 개의 대안을 놓고 제한된 시간에 최선의 대안을 선택하는 데 있다. 대부분의 학교가 성적의 7할을 이런 선다형 객관식 시험으로 산출한다. 선다형 시험을 통해서 길러지는 의식과 습관은 어떤 것일까. 먼저 주목할 점은 신속한 선택과 결정의 습관이다. 1980년대 이후 나라 안팎의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지속 성장한 배경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반면에 한국인은 대안을 만드는 창의적 역량이 모자란다. 대안을 만드는 일은 출제자의 몫이며 수험생은 대안 중에서 선택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대안 없이 비판만 하는 습관이 든 더 깊은 연원이 있다. 선다형 시험문제를 잘 푸는 방법은 정답이 아니라 오답을 먼저 찾아내 지워나가면서 마지막에 남은 것을 정답으로 선택하는 식이다. 학교공부를 잘했던 사람일수록 남의 틀린 점을 찾아 비판하다 보면 마지막에 남는 자신이 바로 정답이라고 여긴다. 선다형 시험이 초래한 다른 악습도 많다. 한국인은 음모론을 매우 좋아한다. 이런 습관 역시 선다형 시험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우수한 학생일수록 선다형 문제 앞에 섰을 때 문항 출제자의 의도에 관심을 집중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누군가의 계획과 음모의 산물이라고 여기는 습관이 여기서부터 형성된다.

질문의 형태라는 점에서 볼 때 선다형 시험문제는 유도심문에 속한다. 응답자의 선택지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유도심문은 본질적으로 권력자가 약자를 향해 던지는 질문 방식이다. 한국인이 권력 앞에서 무비판적으로 순종하거나 무조건 저항하는 양극단의 행동양식을 보이는 이유도 감수성이 예민한 학창시절을 이런 권력적 질문방식에 일방적 일상적으로 노출돼 지냈기 때문이다.

인류는 이미 150년 가까이 시험을 놓고 철폐론과 옹호론의 양극단 사이를 오가는 논쟁을 했다. 논쟁의 귀결은 매번 시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시험의 방식이 문제라고 한다. 그 결과 시대마다 시험의 내용과 방식이 변했다. 이런 시험제도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이념이 있다. 첫째, 평등과 공정의 이념이다. 시험을 통해 온갖 특권을 타파함으로써 인류는 근대사회로 나아갔다. 둘째, 합목적성과 효과성의 이념이다. 시대 변화에 따른 인재 부족 현상에 직면할 때마다 모든 나라가 새로운 시험제도를 통하여 이를 극복하고 필요한 인재를 확충해 왔다. 시험을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증폭되고 있는 한국사회는 무언가 중요한 인재부족 현상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한국의 후진적 정치문화 역시 선다형 시험문제를 즐겨 사용한 학교가 인재를 잘못 길러낸 탓이다. 지금은 학교별로 공개된 시험 결과를 놓고 상대적 비교와 형평을 논하기보다는 과연 어떤 인재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어떤 시험내용과 시험방법이 효과적인가를 논의할 시기이다.

정기오 한국교원대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