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35>

  • 입력 2009년 7월 13일 13시 48분


135회

"얼굴을 보여줘. 괜찮아?"

석범이 물었다. 민선이 일부러 홀로그램을 보내지 않은 것이다.

"퉁퉁 부은 꼴 보이기 싫고요. 석범 씨! 저 밖에 귀찮은 벌레들 치워줘요."

민선의 목소리엔 짜증이 묻어났다.

"벌레?"

"남 앨리스 형사랑 동료들 말이에요."

보안청 형사들의 잠복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보호하려는 거야, 살인마로부터."

"감시가 아니고요? 죽이려면 진작 죽였겠죠. 또 저렇게 밖에 숨어 있다고 살인을 막을 수도 없고요. 나 나가야 해요."

"어딜 가려고?"

"몰라서 물어요? 이제 결승전만 남았어요. 팀에 합류해야죠."

"오늘은 집에서 쉬어. 수목장도 치르고 많이 피곤할 텐데……."

"아빠 잃은 슬픔에 몸져눕기라도 하란 건가요? 전 자발적 고아예요. 제가 선택한 길이죠. 잊지 않으셨죠? 가야 해요. 근데 저 벌레들이 미행이라도 하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요. 그리고 이 아파트에서 제가 편히 쉴 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니죠? 살인마는 벌써 여길 알 거예요! 지금 이곳은 서울특별시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라고요."

민선의 목소리에선 슬픔이 사라졌다. 냉정하고 꼬치꼬치 따지던 민선으로 돌아온 것이다.

"남 형사랑 같이 움직여. 혼자는 안 돼."

"그 여잔 믿어요?"

갑작스런 물음에 석범이 말을 더듬었다.

"그, 그 여잘 믿느냐고?"

"적은 항상 가까이에 있다고 명탐정 셜록 홈즈가 말했잖아요? 남 형사가 범인 쪽 사람이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 되죠."

"앨리스는 그럴 여자가 아냐."

"앨리스? 둘이 있을 땐 남 형사라고 안 하고 앨리스라고 부르나 보죠? 혹시 엑스 걸프렌드?"

"괜한 소리 말고, 남 형산 확실하니까 외출해야겠거든 같이 움직여. 알겠지?"

"은 검사님! 꼭 남편처럼 구네요. 착각하지 마시고, '눈보라 뒤에' 마을이나 무사히 다녀오세요. 끊어요."

"저, 저기……."

하는 순간 스마트카폰이 꺼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핸들을 돌리고 싶지만, 지금은 손미 주 여사를 만나는 일이 더 급했다.

쿼런틴 게이트를 벗어나자, 어둠이 찾아들었다.

특별시를 밝히던 불빛이 한 순간에 사라지고, 밤하늘에 강물처럼 흩뿌려진 별들이 반짝였다. 석범은 자동차의 윗덮개를 벗겼다.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최고 속도로 질주할 작정이었다.

"여기서부턴 걸어가야 해. 자전거를 제외하곤 모든 탈 것의 출입을 금하고 있거든."

이윤정이 '눈보라 뒤에' 마을 어귀까지 마중을 나왔다. 석범은 차에서 내려 표정을 살폈다.

혹시 벌써……?

윤정이 그 마음을 읽었는지, 걸음을 떼며 말했다.

"벌써 갔어야 하는데…… 네가 올 때까지 기다리나 보다."

"네에……. 근데 얼마나 걸어야 합니까?"

석범이 어둠에 잠긴 좌우 숲을 번갈아 살폈다.

"걱정 마. 여긴 돌연변이 따윈 없으니까."

"돌연변이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윤정이 걸음을 멈추고 석범을 노려보았다.

"노 원장 얘긴 들었다. 고지식해도 마음은 따듯한 사람이었는데 안 됐어. 설마 그 일을 미주가 시켰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석범이 따라 멈추지 않고 그녀를 지나쳤다.

"실크로드엔 언제 가세요? 벌써 출국했어야 할 시간 아닌가요? 부모가 죽어도 촬영일정만은 바꾸지 않는 사람이 왕고모 아니었던가요? 그러고 보니 손미주 여사가 왕고모에겐 부모보다 아니 드라마보다 더 중요한가 봅니다."

윤정이 석범의 등을 찰싹 쳤다.

"고약하구나, 비비 꼬인 마음이라니. 네가 왔으니 날이 밝는 대로 나는 출발할 게다."

"노 원장과는 언제부터 아는 사입니까? 손미주 여사와도 당연히 교류가 있었겠지요?"

"뭘 알고 싶은 게냐? 날 취조라도 하는 게냐? 멍청한 놈!"

윤정은 답을 주지 않고 성큼 앞서 걸었다.

별똥별이 길게 획을 그으며 오음산으로 떨어졌다.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최악의 시나리오, 그러니까 손미주 여사는 벌써 죽었고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자연인 그룹이 은석범 검사를 납치하여 감금하는 일은 상상에 머물렀다.

초가처럼 옹기종기 둥근 지붕을 인 집들을 지났다. 벌써 잠자리에 든 듯 고요하고 아득했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잠든다는 삶의 원칙에 충실한 것이다. 타원형 마을의 무게 중심 쯤에 자리 잡은 집 앞에서 윤정이 돌아섰다.

"멍청한 짓 좀 그만 하고 편히 보내드려. 신체 접촉은 피해야 해. 전염 가능성이 있으니까."

석범이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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