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57>

  • 입력 2009년 3월 25일 13시 44분


사소한 끼적임조차도 둘이서만 안다면 목숨을 걸고 간직할 비밀이 된다.

창수가 대답 대신 검시 보고서를 허공에 띄워 올렸다. 차트를 넘기다가 '사용처 미확인' 파트에 멈췄다.

"이상하게도 말입니다. 달링 4호의 손목에서 인간전용 칩이 발견되었습니다. 바로 이 놈입니다."

달링 4호의 손목을 절개하고 새끼 손톱만한 칩을 끄집어내는 동영상이 빠르게 지나갔다.

"칩에는 아무 것도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달링 4호의 품질 보증 칩은 따로 이곳 귀밑에 있습니다."

"그럼 그 칩은 누구 겁니까? 혹시 변주민이 자신의 칩을 달링 4호에다가……."

석범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창수가 말허리를 잘랐다.

"아닙니다."

창수가 변주민의 오른 손목을 확대한 사진을 허공에 띄웠다.

"격투가들은 누구나 오른 손목에 칩이 있습니다. 의료 관련 항목이 쉰 두 가지나 첨가된 칩이죠. 경기 중 생명을 위협할 만큼 큰 충격을 받게 되면 즉시 칩이 생체 변화를 읽고 경기장 전속 의사에게 신호를 보내게 됩니다. 경기를 시작하기 전, 감독관은 반드시 선수들의 팔목에서 이 칩을 확인합니다."

병식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성 형사! 대체 뭘 찾아냈다는 거야?"

창수는 대답 대신 차트를 한 장 한 장 침실 벽에 띄워 붙였다. 종이 차트를 붙인 것은 아니고 따로 스캔한 차트를 가상으로 옮긴 것이다. 그리고 잠시 둘러볼 여유를 주겠다는 듯 침묵했다. 석범은 실눈을 뜨고 낯선 풍경을 살피는 사람처럼 천천히 물러났다. 이상하고 어색한 부분이 있는 듯했지만 보일 듯 보일 듯 보이지 않았다. 석범이 고개를 다섯 번이나 도리도리 흔드는 것을 확인한 다음 창수가 입을 열었다.

"변주민의 별명이 '알람'이란 건 아시죠? 자기 관리에 철저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이야 적어둘 필요가 없었겠지만, 특별한 약속이나 계획 등은 분명히 따로 정리했을 겁니다. 헌데 변주민의 소지품을 아무리 뒤져도…… 없었습니다. 공책에도 컴퓨터에도 칩에도 일상의 메모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깔끔한 변주민 답지 않은 일입니다."

"이상하네. 정말!"

병식이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긁어댔다.

"이걸 한 번 봐주십시오."

창수가 달링 4호의 오른 손목에서 뽑은 칩을 조심스럽게 변주민의 오른 손목에 갖다 댔다. 처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1초, 2초, 3초 마침내 10초가 되자, 갑자기 새로운 차트들이 풍선처럼 떠오르면서 벽을 가득 메웠던 차트들을 덮어나갔다. 군데군데 달링 4호의 연필 스케치와 스냅 사진도 나타났다. 간단한 메모와 함께 올해 훈련 스케줄과 꼭 지켜야할 일정이 꼼꼼하게 적혔다.

"20년 쯤 전일 겁니다. 커플 칩이라는 것이 유행했지요. 인간의 몸에 칩을 넣는 것을 두고 논쟁이 끊이질 않던 시절이었죠.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칩 생산 회사들이 대대적으로 홍보한 것이 바로 커플 칩입니다. 두 칩을 갖다 대고 10초가 지나면 둘만의 비밀이 나타나는 식입니다. 몸에 칩을 넣는 일이 보편화된 후론 사라진 풍속도인데, 변주민은 이 커플 칩에 달링 4호와 자신만의 비밀을 담아둔 겁니다. 변주민은 정말 달링 4호를 아꼈나 봅니다."

석범이 빠르게 변주민의 일정을 훑기 시작했다. 하나는 시간까지 적혔고 또 다른 하나는 이름뿐이었다.

6월 28일 15시 노윤상 클리닉

서사라

"뻐꾹!"

갑자기 뻐꾸기 울음이 지하방을 울렸다. 석범과 두 형사는 움찔 놀라며 무하마드 알리와 아밀리넨코 표도르 사진 위에 놓인 골동품 벽시계를 노려보았다. 석범이 긴장을 유지한 채 창수와 병식에게 물었다.

"도그맘 여사를 상담 치료한 앵거 클리닉 원장이 노윤상 아니었나요? 누가 다녀왔었죠?"

병식이 답했다.

"제가 노윤상 원장을 만나고 왔습니다만 특이점은 없었습니다."

석범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특이점이 없다니요? 뇌가 사라진 피살자들이 모두 노윤상이 원장으로 있는 앵거 클리닉에 다녔습니다. 도그맘이 앵거 클리닉을 오간 스케줄은 체크했었나요?"

"그게…… 노원장이 환자들의 프라이버시 침해라며 자료 제출을 거부했습니다."

석범이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뭐라고요? 거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