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성희]‘리벳공 로지’부터 집에 가야 하나

  • 입력 2009년 3월 13일 22시 14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직장 일을 하며 사실상 그를 키운 외할머니에 대해 “진짜 리벳공 로지(Rosie the Riveter)”라고 말한 적이 있다. 리벳공은 기계로 리벳(철판을 연결하는 대형 못)을 박는 일을 하는 일꾼이고 로지는 여자 이름이다. ‘리벳공 로지’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후방의 공장에서 남성을 대신해 거친 일을 하는 여성을 상징하는 캐릭터다. 화가 노먼 로크웰이 그린 같은 제목의 그림 때문에 더 유명해진 이름이다.

고용대란 波高의 첫 피해자들

리벳공 로지는 미국 정부가 만들고 장려한 캠페인이었다. 전쟁 때문에 공장에서 일할 인력이 부족해지자 집 안의 여성을 일터로 끌어내기 위해 미 정부는 남성 못지않은 강한 여성 이미지를 창출했던 것이다. 캠페인은 효과를 보았다. 300만∼600만 명의 여성이 공장에서 군복을 만들고 탄약과 군수물자를 제조했다. 문제는 전쟁이 끝난 뒤였다. 남자들이 전장에서 돌아오면서 여성들은 다시 집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이는 여성의 자의식을 눈뜨게 만들어 1960년대 페미니즘운동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요즘 같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여성이 고용대란 파고의 첫 피해자가 되고 있다는 소식에, 정부가 필요할 때만 써먹었던 리벳공 로지가 겹쳐진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1월 국내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47.8%였다. 경제위기가 시작된 지난해 9월 50.4%에서 줄곧 내리막이다. 지난해 1월에 비해 줄어든 일자리의 82%가 여성 일자리라는 통계도 있다.

물론 기업이 여성만 골라 해고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비정규직 비율이 높고 자영업체의 부도가 속출해 식당종업원, 사무보조원 등 여성 일자리가 많이 사라진 탓이다. 30, 40대 남성 실직도 허다한 마당에 여성 일자리를 찾는 것을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여성이라고 절박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얄팍한 월급봉투로나마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여성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런 딜레마를 푸는 데는 정부가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지만 아쉽게도 이 정부에는 젠더(남녀) 이슈에 대한 뚜렷한 관점이 없어 보인다. 그것은 어쩌면 이 정부가 여성가족부를 없애려다가 여성계의 반발로 무늬만 여성부를 존치시킬 때부터 드러났다.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 중에서도 여성에 대한 사항은 막연한 두 가지뿐이다. ‘여성과 고용취약계층을 위한 일자리 창출’과 ‘선진국 수준의 양성평등 달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두 항목의 성적표도 좋지 않다. 세계경제포럼(WEF)의 2008 글로벌 성(性)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조사대상 130개국 중 108위를 기록했다. 2007년 128개국 중 97위보다도 더 떨어졌다. 교육성취도, 건강과 생존 분야에서는 선진국 못지않지만 경제참여와 기회, 정치권한 부여 분야의 평가가 특히 낮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여성권한척도(GEM)에서도 한국은 2007년 64위에서 2008년엔 68위로 더 떨어졌다.

MB정부 여성정책 있기나 한가

지난 정부에서 호주제 폐지, 성매매 특별법 제정 등 여성계의 큰 숙제가 처리됐기 때문에 긴급한 여성현안이 없어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성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최근 고시 합격률에서 여성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고 여성 의원도 늘어났지만 일부 성공담이 전체 여성의 삶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 인사에서도 여성 홀대가 심각하다. 민주당 김진표 의원이 이 정권 출범 직후 장차관급, 청와대 비서관급, 주요 공공기관장 및 감사 등 322명을 분석한 결과 여성은 8명에 불과했다.

위기일수록 역발상을 하라고 한다. 고용사정이 어렵다고 여성을 직장에서 내몰 것이 아니라 임금을 줄이면서 남녀 근로자의 근무시간을 단축하는 전략은 어떨까? 엄마건 아빠건 먼저 퇴근하는 사람이 자녀를 돌본다면 보육비 부담도 조금은 가벼워져 줄어든 임금을 상쇄할 수 있을 것이다. 리벳공 로지를 집으로 돌려보낼 것인가. 경제위기가 이 정부의 여성정책을 시험하고 있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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