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박현모]정조는 왜 편지로 막후정치를 했나

  • 입력 2009년 2월 14일 02시 58분


장면1. 1796년 2월 18일

“어찌 전하께선 술수를 부리듯이 이처럼 비밀스럽고 종잡을 수 없는 이상한 처사를 하십니까.” 강화도에 유배 가 있는 은언군을 비밀리에 만나고 있는 국왕 정조를 비판하는 심환지의 상소였다. 심환지는 왕이 궁궐의 아전 무리들을 동원해 역모죄인 은언군을 몰래 만나는 것은 국법을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장면2. 1797년 7월 8일 저녁의 창덕궁

“간밤에 잘 지냈는가. 나는 밤에 더워서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새벽이 되자마자 빗질하고 세수한 뒤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피곤한지… 우스운 일이다.” 심환지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 정조는 놀랍게도 세 사람의 인적 사항을 자세히 적은 다음 “경의 뜻이라고 하면서 이조판서와 상의하는 게 어떤가”라고 지시하고 있다.

장면3. 1797년 8월 16일 밤 경기도 안산행궁

우의정 이병모가 어마(御馬)를 막아서며 읍소했다. “강화도의 죄인(은언군)을 몰래 빼내와 며칠째 함께 지내고 계시니 종묘사직이 실로 위태롭습니다.” 이복동생 은언군을 데리고 수원화성의 사도세자 묘소까지 함께 가는 것은 인정상 이해되지만, “나라의 역적과 황벽(荒僻)한 처소에서 홀로 지내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반왕 세력 주도자 포섭노려

이날 신료들의 행동은 장면1에서 심환지가 상소를 보낼 즈음인 1년 전과 상당히 달랐다. 국법의 붕괴를 논하고 강화유수가 왕명을 거역해가며 은언군을 다시 감금하는 등 강력히 저항하던 것과 달리 이번엔 이병모만이 홀로 말고삐를 붙잡고 반대할 뿐이었다.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비밀은 최근 공개된 정조의 편지 약 300통에 있었다. 정조는 심환지가 노론의 벽파, 즉 반왕 세력을 주도하며 부상하는 즈음인 1796년 8월부터 집중적으로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공개된 편지에 따르면 장면1의 상소가 나온 지 6개월 만에 인사(人事) 문제에 관한 왕 자신의 생각을 귀띔해주는가 하면, 부인의 질병에 쓰라고 삼 뿌리를 보내는 등 심환지를 포섭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경은 자기 편(노론)에서 경시당하고, 소론에서 거슬리며, 남인에게서 미움을 받고 있다”면서 “탁 트인 풍도(風度)로 아첨 잘하는 습속을 바로잡아 달라”며 “의리(義理)의 주인”으로 치켜세우기도 했다. 장면2에서 정조가 세 사람의 추천을 심환지의 작품인 것처럼 하라며 그에게 힘을 실어준 이유는 바로 그런 맥락에서였다. 장면3에서 심환지를 포함한 핵심 노론 벽파들이 침묵한 것은 아마 정조의 그런 막후정치의 결과였을 것이다.

사실 이런 막후정치는 조선의 국왕에게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세종대왕도 군사훈련을 핑계로 한강 가에서 ‘죄인으로 유배가 있는’ 양녕대군을 몰래 만났으며 6진 개척을 반대하는 신하들을 반박할 근거를 얻기 위해 함경도의 김종서에게 비밀 편지를 보냈다. 윤음(綸音)이나 전지(傳旨) 같은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서는 목표하는 것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될 때 왕들은 밀지(密旨)나 어찰(御札)같이 비공개적인 방식의 소통수단을 사용하곤 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비망기(備忘記)라는 소통수단이다. 전쟁 중이거나 다른 일로 형식을 갖추기 어려울 때 그야말로 ‘잊어버릴 때를 대비해’ 메모해서 승지에게 전달하는 ‘쪽지 왕명’을 가장 많이 활용한 왕은 숙종이다. 그는 당쟁으로 정국이 균열된 가운데 주요 정치세력을 중재하기 위해 비망록을 종종 활용했다. 인현왕후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들이는 기사환국(1689년) 때는 하루에 수차례의 비망기를 내리기도 했다. 미복(微服) 차림으로 백성들 곁에 나아갈 때 사용한 것도 비망기였다.

형식 넘어선 의사소통 의지

중요한 점은 형식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편지며 쪽지인가였다. 심환지 등이 언관의 비판을 무릅쓰면서까지 비밀 지시를 받고 따랐던 이유는 치우치지 않는 왕의 태도 때문이었다. 효율적인 국가경영을 위해서는 때로 형식을 넘어서는 권도(權道)의 발휘가 필요하다고 인정했던 것이다. 여야 간 또는 정파 간의 소통이 요즘처럼 단절된 경우가 또 있었나 싶다. 꽉 막힌 정치를 풀 수만 있다면 그것이 비밀 편지든 비망록이든 대수이겠는가.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연구실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