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녕]‘노무현 지뢰’ 피하기

  • 입력 2008년 7월 23일 19시 56분


정부의 한 고위 인사는 쇠고기 파문을 “노무현 정부가 뿌려놓은 지뢰를 아무 생각 없이 밟았다가 대형 폭발사고를 일으킨 것”이라고 표현했다. 쇠고기 수입은 미국의 요구를 다 들어줄 것처럼 약속한 노 정부가 마땅히 처리해야 했는데 말년에 그렇게 하기가 부담스러워 회피한 것을 이명박 정부가 멋모르고 도장 찍었다가 낭패를 당했다는 것이다. 지금 돌아가는 정황으로 보아 일리가 있는 설명이다.

쇠고기 협상이 지뢰라면 노 정부가 도처에 심어놓은 지뢰는 이 밖에도 수두룩하다. 125개 공공기관을 전국 10곳에 이전시키기로 한 혁신도시 계획도 그렇다. 노 대통령은 직접 현장을 다니며 말뚝을 박고 지역 주민들에게 “다음 정부가 말뚝을 뽑지 못하도록 잘 감시해 달라”고 당부까지 했다. 공기업 민영화만도 벅찬 일인데 혁신도시의 말뚝을 뽑는다면 지방의 반발이 여간 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정부가 내놓은 것이 ‘상생·분권정책’이다. 내용은 복잡하지만 핵심은 노 정부의 지방균형계획을 대체로 계승하겠다는 것이다. 지뢰를 밟기 겁나니 피해 가기로 작정한 셈이다.

종합부동산세도 비슷하다. 부동산 부자들한테서 돈을 걷어 재정이 열악한 지방의 자치단체에 나눠주도록 교묘하게 장치를 해놓았기 때문에 일반 국민과 지자체의 반발을 이겨낼 자신이 없고서는 손대기 어렵다. 그래서 이 정부는 개편을 아예 멀찌감치 뒤로 미뤄 놨다.

노 정부가 말년에 공공기관 임원의 임기제를 법제화하고 사장과 감사들을 대거 임명한 것도 이 정부엔 여간 큰 부담이 아니다. 억지로 솎아내자니 폭발 위험성이 있고, 그냥 두자니 잠재적 불안이 너무 커 엉거주춤 접근하고 있다. 대통령 기록물도 마찬가지다. 자칫하다간 신구(新舊)정권 간의 정치싸움으로 비화할 수도 있는 사안이라 법과 원칙에 관한 문제임에도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10·4 남북정상회담 합의는 노 전 대통령의 표현대로 ‘전임 사장 노무현’이 도장을 찍은 대형 지뢰다. ‘후임 사장 이명박’은 합의서 그대로는 결재 못 하겠다고 한동안 버텼다. 그러나 북이 워낙 거세게 생떼를 부리자 한발 물러서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얘기나 한번 나눠보자’고 대화를 제의했지만 하필이면 ‘금강산 총격사건’이 터진 날 말을 꺼내 이중으로 두들겨 맞았다. 지뢰를 피하려다 엉뚱한 복병을 만난 꼴이다.

더 꼽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 생각이 비슷해도 그럴 텐데 생각이 전혀 다른 정치세력 간에 권력을 주고받는다면 지뢰가 오죽이나 많겠는가. 이 정부만 특수한 경우가 아니니 너무 골치 아파하거나 투덜대지 말라는 얘기다. 정권을 잡았으면 이런 유산쯤은 덤덤하게 받아들여야 정상이고, 그래야 문제도 해결해 나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지뢰밭을 무사히 통과해 정권 교체의 대의(大義)를 성취하느냐이다. 쇠고기 협상처럼 지뢰인 줄도 모르고 어설프게 밟았다가 낭패를 당해서도 안 되지만 지뢰가 무서워 도망치거나 멀리 돌아가기만 하는 것도 곤란하다. 정확한 탐색을 통해 경우에 따라서는 조심스럽게 제거하기도 하고, 과감하게 폭파시키기도 해야 한다. 국민을 설득할 지혜와 용기, 인내가 필요하다. 때론 국정의 연속성도 감안해야 한다.

지금 많은 국민이 이명박 정부에 실망하는 것은 그런 일을 잘 해낼 수 있을지 미덥지 않기 때문이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