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권희]생필품

  • 입력 2008년 5월 2일 02시 59분


양귀자 씨의 소설 ‘원미동 사람들’에서 경호네는 ‘김포쌀상회’로 알뜰히 돈을 모아 ‘김포슈퍼’를 차린다. 그러자 부근 김 반장네 형제슈퍼도 쌀과 연탄을 취급하기 시작해 출혈경쟁이 벌어진다. 그 덕분에 싼 값에 물건을 사게 된 동네 사람들은 신바람이 난다. 그 와중에 김포슈퍼와 형제슈퍼 사이에 싱싱 청과물점이 생겨 부식거리와 김까지 팔았다. 경호네와 김 반장은 동맹 관계를 맺고 싱싱 청과물에 대항한다.

▷백화점 대형마트 동네가게들이 ‘원미동 사람들처럼’ 경쟁을 벌이면 물가가 떨어질 수 있다. 2월 말엔 오르는 밀가루 값에 맞춰 제조업체들이 라면 값을 올리는 데도 홈플러스는 자체 브랜드의 라면 값을 평균 20% 내렸다. 미끼 전략이라고도 한다. 홈플러스에 라면을 사러 들렀다가 다른 물건도 함께 사는 소비자들이 많을 것이다. 미국 유통업계에선 혁신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진다. 미국에서는 작은 도시라도 품목별로 구색을 갖춘 대형 마켓이 있다. 산골 마켓과 대도시 마켓 간에 물건 값도 별 차이가 없다. 서민 생필품은 싸게 공급해주는 미국식 유통의 힘이다.

▷4월 소비자물가가 1년 전에 비해 4.1%, 생활물가지수는 5.1%나 올랐다. 이명박 대통령이 달포 전 생필품 가격을 안정시키라고 내각에 지시하자 라면 소주 학원비 이동전화통화료 등 ‘52개 생필품 리스트’가 만들어졌다. 전체 가구의 하위 40%를 차지하는 월소득 247만 원 이하의 서민계층이 자주 구입하고 지출 비중이 높은 품목들이다. 4월엔 이들 중 41개 품목의 가격이 올랐다. 각종 서비스 요금도 뛰고 있다. 지갑이 얇아진 서민은 이달 잇단 연휴에 가족 나들이를 하는 것도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일각에서 과거의 물가통제 방식이 나오지 않을까 우려하는 데 대해 청와대는 “통제가 되는 여건도 아니고 할 일도 아니다”라며 “다만 현실에 적합한 관리를 하겠다”고 밝혔다. 할당관세 인하로 공급 애로를 풀어주고 원가 인상분보다 더 올리거나 매점매석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은행 정문을 들어서면 큰 글씨로 ‘물가안정’이라고 쓴 현판이 눈길을 끈다. 그러나 물가안정은 한국은행 혼자 힘으로는 이루기 어렵다. 서민 생필품의 ‘유통 혁명’이 필요하다.

홍권희 논설위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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