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천광암]日수학 ‘원주율 약 3’의 실패

  • 입력 2007년 12월 6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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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 메달’을 수상한 아시아인은 지금까지 4명이다. 1명은 중국인이고 나머지 3명은 일본인이다. 국제수학자연맹이 수학 응용분야 최고 공로자에게 4년마다 한 번씩 주는 ‘가우스상’의 첫 수상자도 일본인이다.

나름대로 ‘수학 강국’이라고 믿었던 일본의 자존심이 4일 처참하게 무너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학업성취도 국제비교연구(PISA) 결과 일본 고교 1년생의 수학응용력이 세계 6위(2003년)에서 10위로 추락한 것. 아시아권만 따져도 5위라는 초라한 성적표다.

2000년 32개 조사 대상국 중 당당히 1위를 했던 일본 고교생들의 수학응용력이 미끄럼을 탄 원인은 무엇일까. 많은 일본인은 2002년 4월 11일 TV에 나왔던 한 기자회견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당시 관방장관으로 재임 중이던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총리가 정례브리핑을 위해 출입기자들 앞에 섰다. 한 기자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원주율(圓周率)은 ‘3.14’로 하는 것이 좋을까요? ‘약 3’이 좋을까요?”

잠시 뜸을 들인 후쿠다 장관이 단숨에 대답했다.

“원주율이 3이면 외울 수 있어도 3.14면 외울 수 없다는 생각은 이상합니다. 나는 더 길게 말할 수 있어요. 3.14159265358….”

선문답 같지만 그해 일본 열도를 뜨겁게 달군 ‘유토리(여유) 교육’ 논란을 가장 압축적으로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논쟁의 불씨를 던진 것은 문부과학성이 그해 4월부터 시행한 초중고교의 새 학습지도 요령. 큰 틀의 변화만 따지면 전후(戰後) 8번째에 해당하는 이 개정안은 일본교직원조합이 주창하고 교육당국이 1970년대 후반부터 단계적으로 받아들여 온 ‘유토리 교육’의 완성판이었다.

개정안은 학생들이 스스로 사고할 시간을 갖도록 학교 공부 부담을 덜어 준다며 수업시간을 7%가량 줄였고, 초등학교의 경우 사다리꼴의 면적을 구하는 공식과 같은 귀찮고 어려운 내용을 교과서에서 무더기로 삭제했다. 소수점 아래 ‘거추장스러운 꼬리’가 달린 원주율도 개혁 리스트에 올랐다. 개정안은 “초등학교에서는 필요에 따라 원주율을 ‘3가량’이라고 가르쳐도 좋다”는 지침을 내렸다.

“원주율이 3이면 원에 내접(內接)한 육각형의 둘레와 원의 둘레가 같아지는데, 원이 육각형과 같다고 가르친단 말인가.”

반론이 잇따르자 교육 당국은 그해 8월 ‘발전적 학습’이라는 미봉책을 통해 유토리 교육 노선을 일부 수정했지만 근본적인 손질은 지금에 와서야 이뤄지고 있다. 유토리 교육의 철학이 지배하는 시스템 아래 교육을 받은 고교 1년생의 성적표가 이번 학력조사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물론 원주율은 유토리 논란의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고, 0.14라는 단순한 수치의 차가 수학 교육을 망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귀찮고 어려운 공부’지만 정석대로 열심히 하라고 가르치는 것과 ‘대충 편하게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를 낳는지를 유토리 교육 실패는 잘 보여 준다.

일본 고교생 중 가장 수학을 잘하는 가타오카 도시키(片岡俊基·17) 군의 사례도 암기와 같은 기본을 소홀히 하면서 창의성이나 고도의 지능을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발상인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가타오카 군은 세계의 수학 영재들이 고도의 문제 해결력을 겨루는 수학올림피아드에서 2번이나 금메달을 땄다. 이 가타오카 군의 프로필에 항상 따라다니는 표현이 있다. 그는 ‘원주율을 소수점 아래 500자리까지 외우는 학생’이다.

천광암 도쿄 특파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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