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천광암]아베가 ‘물러남의 미학’ 알았더라면…

  • 입력 2007년 9월 22일 02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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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상쾌하네요.”

지난해 9월 21일 오전 8시경, 일본 도쿄(東京)의 자택 문을 나서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장관이 기자들을 향해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오늘 생일이신데….”

“그렇군요.”

전날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그에게는 이중으로 경사스러운 아침이었다.

이날부터 사실상 총리 신분이 된 그가 처음으로 발길을 향한 곳은 자신의 중매를 섰던 고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전 총리의 자택이었다.

후쿠다 전 총리의 자택에서는 장남인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관방장관이 아베 장관을 맞았다. 아베 장관은 후쿠다 전 총리의 영전에 예를 올린 뒤 후쿠다 전 장관과 덕담을 주고받았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총리 자리를 놓고 대등하게 경쟁을 하는 위치였지만 앞에 놓인 길은 정반대였다.

한 사람에게는 전후 최연소 총리로서 창창한 대로(大路)가, 다른 한사람에게는 은퇴를 향한 쓸쓸한 뒤안길이 펼쳐져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꼬박 1년이 지난 21일, 아베 총리는 53번째 생일을 병상에서 쓸쓸하게 맞았다. 후쿠다 전 장관이 후임 총리 자리를 사실상 예약한 상태에서 정책구상 등을 밝히며 바쁜 하루를 보낸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하루였다.

아베 총리에게 생애 최악의 생일을 안긴 퇴임극을 보면서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2월 25일 도쿄국립연예장에서는 일본의 유명한 라쿠고가(落語家)인 산유테이 엔라쿠(三遊亭圓樂·74)의 공연이 열렸다. 라쿠고란 ‘1인 만담’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의 전통 공연.

2005년 뇌경색으로 쓰러졌던 그가 일주일에 3번씩 인공 투석을 받으면서도 3개월간 피나는 연습을 한 끝에 마련한 무대였다.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공연이 끝나자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예술가는 죽을 때까지 현역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해 준 공연”이라는 찬사도 나왔다. 그럼에도 그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입장료를 받기에는 부끄러운 공연이었다”며 은퇴를 선언했다.

7월 29일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한 뒤 자민당 안팎에서 거센 퇴진 압력을 받았던 아베 총리가 진작 이 같은 ‘물러남의 미학’을 알았더라면 이날처럼 쓸쓸한 생일을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광암 도쿄 특파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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