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심규선]북한이 총련에 진 빚

  • 입력 2007년 7월 18일 20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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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특파원 시절 세 번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중앙본부에 가 본 것 같다. 2000년 8월 도쿄에서 열린 제10차 북-일 수교교섭 본회담의 북측 대표단이 총련 중앙본부를 찾았을 때가 처음이다. 북한 대표단이 중앙본부를 방문한 것도 처음이어서 대표단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상화가 걸린 1층 로비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50년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 북한

다음은 2001년 5월 총련이 제19차 전체대회를 열어 새 의장을 선출할 때다. 이틀 행사 중 첫날만 잠깐 취재할 수 있었다. 1950명이나 되는 대표들이 모여 회의하는 모습이 ‘작은 북한’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1955년 총련 결성 이후 46년간 장기 집권해 오다 타계한 한덕수 전 의장의 후임을 뽑기 때문인지 변화에 대한 기대도 감지됐다.

마지막은 2001년 11월 도쿄 경시청이 조긴도쿄(朝銀東京) 간부의 횡령 혐의를 확인하기 위해 중앙본부를 압수수색했을 때다. 건물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밖에서 총련 관계자들이 “정치 탄압 중지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몸싸움 벌이는 것을 지켜봤다. 총련 본부에 일본 경찰이 발을 들여놓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짧은 시간에 일어난 세 사건은 총련의 급격한 위상 변화를 상징한다. 한때 겁날 것 없던 시절도 있었으나, 변화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결국은 법의 처분을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 버렸다는…. 그 후에도 총련의 추락은 계속됐다. 일본 경찰이 중앙본부에 들어오는 것에도 분개하던 총련이 이제는 빚 때문에 본부 건물을 통째로 내줘야 할 처지에 몰려 있다.

한때 50만 명이나 되는 재일동포를 거느리던 총련이 둥지마저 잃어버리는 건 재일동포들에게는 비극이다. 비록 노선은 다르지만 총련의 약화는 민단계, 총련계, 그리고 1980년대부터 일본으로 건너간 소위 ‘뉴커머’ 등 세 그룹으로 짜여 있는 재일동포 사회의 대(對)일본 영향력이 줄어든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총련은 그동안 북한의 돈줄이라는 비난을 받아 가며 ‘조국’인 북한에 헌신해 왔다. 이제는 도움을 줄 만도 한데 ‘조국’은 여전히 제 앞가림조차 못하고 있다. 도움은커녕 북한은 일본인 납치, 간첩선 침투, 미사일 발사, 핵 개발 등 세계적 뉴스로 총련을 곤경에 빠뜨렸다. 그런 북한이 요즘 총련 구하기에 나선 모양이다. 북한은 일본 정부가 총련 본부 건물을 경매에 넘기려는 것을 “우리 공화국에 대한 흉악한 주권 침해 행위”라며 “악의 땅 일본 열도를 통째로 쓸어버리고야 말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평양시민과 원산시민은 규탄대회까지 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이 문제를 언급하며 일본 정부를 비난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입으로는 총련을 구할 수 없다. 예전 일본 경찰에는 ‘3개의 성역’이 있었다고 한다. 조직폭력배인 ‘야쿠자’, 공명당의 모체이자 종교단체인 창가학회, 그리고 총련이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는 않겠다는 묵계였다. 하지만 총련은 이미 ‘성역’에서 멀어졌다. 쫓아낼 순 없지만 맘에 들지 않는 조직을 특별 대우할 필요가 없다는 게 요즘 일본의 분위기다.

이젠 원격 통제와 조종에서 풀어줄 때

북한이 총련에 진 빚을 갚을 방법이 있긴 하다. 총련이 안고 있는 부채 627억 엔을 갚아 주는 게 그중 낫다. 그러지 못할 바엔 차제에 사상 통제와 원격 조종의 끈을 놓고 총련을 자유롭게 풀어 주는 것이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을 외치는 ‘본국파’를 끌어안으려는 것까지 막을 순 없다. 그러나 ‘이제는 헤어지고 싶다’는 ‘자립파’에게는 길을 터 줘야 한다.

얼마 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 ‘김정일은 어떻게 일본 팬들을 잃었는가’라는 기사가 실렸다. ‘일본 팬’은 재일동포를 말한다. 일본 팬들이 북한에 실망해 등을 돌리고 있다는 게 기사의 요지다. 한때나마 사랑했으나 이제는 책임질 수 없다면 행복을 빌며 상대방을 보내 주는 게 순리다.

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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